로마서 13장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이 사회생활을 할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성도들도 국가의 권세에 복종하여 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성도는 국가에 더 복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범이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세상의 이웃에 대해서 성도들의 의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종말을 앞둔 성도들의 경건의 의무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회생활에 대해(롬 13:1-14)
1-7절, 국가의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라
구원받은 성도는 가정과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에서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가 국가의 위정자들에 대해 가지는 의무에 관해 교훈한다.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존재하는]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위에 있는 권세들’은 국가의 위정자들을 말한다. 성도는 국가의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 이유는 국가의 위정자들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세들은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그것들을 세우셨다. 악한 정부라도 무정부 상태보다는 낫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3:1에서도, “정사(政事)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라”고 말하였다.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거스름]이니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국가의 위정자들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들을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국가의 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심지어 악한 국가에서라도 성도는 통치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들을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하게 된다.
물론, 국가의 위정자들에 대한 복종은 신앙 문제에 충돌이 없을 경우에만 해당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명령에 복종할 수는 없다. 종교적 의무와 국가적 의무가 충돌할 때 성도는 종교적 의무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국가 위정자들보다 높으시다. 성도는 심지어 핍박을 받더라도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 던지우면서도 왕이 내린 우상숭배 명령을 거절했던 것처럼, 또 예수님의 사도들이 매 맞음과 옥에 갇힘을 당하면서도, 전도하지 말라는 유대 지도자들의 명령을 순종치 않은 것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 명령 순종이 첫 번째이다.
[3-4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국가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아래서 사회의 질서와 최소한의 도덕성 유지를 위해 세워진 자들이다. 만일 그런 통치자들이 없고 사회에 법들과 규칙들이 없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사회가 얼마나 더 혼란해지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속사회가 극단적으로 악해지거나 혼란해지지 않도록 일반 은총으로 보호하시며 이를 위해 국가의 위정자들과 그들의 양심과 예부터 전래되어 내려오는 관습들과 규례들이나 그들이 제정한 법들을 사용하신다. 이런 점에서 국가의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사자[일꾼]’이다. 본문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두 번 부른다.
국가의 위정자들의 임무는 백성들의 선을 격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들이 두려움이 되지 않으나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된다. 그들은 악을 징벌하기 위해 칼을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칼의 권세, 즉 악한 자들을 죽일 수도 있는 권세를 주셨다. 사회의 질서 유지와 공의의 집행을 위해 극악한 죄인의 사형도 가능하다.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2의 진술대로, 이 칼의 권세에 근거해서 세속국가는 자신의 안녕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합법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성경은 사형과 합법적 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5절]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성도는 세상 통치자들의 형벌이 두려워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의 양심을 인해 그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국가의 위정자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존중하고 그들이 정한 바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인 줄 알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6절] [이는] 너희가 공세(貢稅)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힘씀이니라].
‘이 일’이란 사회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과 도덕적 질서 유지의 일을 가리킨다. 국가의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며 그들이 바로 이 일을 위해 항상 힘쓰고 수고하는 것이다. 국민의 세금은 일차적으로 그런 일을 위해 쓰이는 것이다.
[7절] [그러므로](전통본문)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貢稅)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國稅)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공세(貢稅)’라는 원어(포로스)는 모든 국민에게 부과되는 세금이며 ‘국세’라는 원어(텔로스)는 소득세, 통행세, 관세 같은 세금을 가리킨다고 한다(BDAG). 그러므로 성도는 세금을 내는 일도 법에 정한 대로, 국세도 내고 지방세도 내며 재산세도 내고 소득세도 내어야 할 것이다. 국민이 바치는 세금이 없다면, 세속국가 통치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마 22:21). 또 성도는 사회에서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도 국가의 통치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에 관해 교훈하기를,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襃獎)하기[상주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벧전 2:13-15). 국가의 위정자들의 주된 직무는 권선징악을 통한 사회의 질서 유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1-2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세속국가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 이유는 세속 사회의 평안을 위해서이다. 사회가 평안해야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을 행하는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국가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뽑은 대통령과 시장을 존경하며 그들의 정당한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 물론, 그들이 헌법에 위배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한다든가, 부도덕한 행동을 할 때에는 그것을 비평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그들이 정당하게, 합법적이게, 도덕적이게 행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사회의 질서와 평안을 위해 복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정해진 세금을 잘 내어야 한다. 세금은 국가의 위정자들이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재정이다. 그것은 사회의 질서와 평안을 위해 또 권선징악의 직무 수행을 위해 쓰일 것이다.
셋째로, 추가적으로, 우리는 세속국가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양심적으로 그들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8-14절, 사랑과 거룩의 삶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물질적 빚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에 대해 말한다. 물론, 우리는 남에게 물질적 빚도 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혹시 부득이 빚을 진 경우는 떼어먹지 말고 반드시 또 속히 갚아야 한다. 내가 받을 것은 혹 잊어도 괜찮지만, 줄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랑의 빚은 불가피한 일이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거래가 아니고 대가성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그냥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받는 자에게는 언제나 빚이다. 그러나 늘 무거운 짐이 되는 빚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그의 명하신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의 빚을 많이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정상적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율법의 정신이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과 같다.
[9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등 십계명의 모든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법 속에 다 들어 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인격과 그의 생명과 그의 순결성과 그의 소유와 그의 명예를 존중하고 또 그의 가족과 자녀들의 행복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살인하거나 간음할 수 없고 또 도적질하거나 거짓 증거할 수 없을 것이며, 또 남의 것을 탐내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하라는 명령 속에 이 모든 내용이 들어 있다.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육신적, 육욕적, 이기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그것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다. 참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배려하며 악을 행치 않는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에게 선을 베풀 것이며 그에게 해를 끼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십계명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마 22:37-40). 인간관계의 계명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다. 내게 사랑이 있다면,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을 공경하고 다른 이들의 생명과 순결성과 소유와 명예를 귀히 여길 것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 천국은 사랑의 나라이다. 주께서는 땅 위의 교회도 이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서로 사랑하며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돌보며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인간관계가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인간관계이다. 그것이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인간관계일 것이며, 또 이 땅 위에서도 행해야 할 바이다. 이 일을 위해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이다.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우리의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광의 구원이다. 그날은 의인의 부활과 변화의 날이다. 그날에 우리는 몸의 모든 죄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영화로워질 것이다. 이 날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웠다. 이미 사도 시대에 성도들은 종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정말 가깝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림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교훈하셨다(마 24:42). 우리는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것은 경건과 순종의 삶,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가리킨다.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과 낮은 대조된다. 밤은 저녁부터 아침까지요, 낮은 아침부터 저녁까지이다. 본문의 밤과 낮은 비유이다. 밤이 깊다는 것은 배교와 불신앙, 부도덕과 죄악의 밤이 깊다는 뜻이며, 낮이 가깝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이 가깝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어두움의 일은 죄악된 일을 가리키고, 빛의 갑옷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행실을 가리킨다. 성도의 옷을 ‘갑옷’이라고 표현한 것은 성도가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굳센 마음으로 무장하고 고난을 각오하고 마귀의 여러 가지 시험을 이겨야 함을 보인다.
[13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낮에는 사람들이 보통 바른 정신으로 일한다. 술 취하면 실수하며 단정함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낮에는 술 취하지 않는다. 사람은 감정이 흥분하면 실수하고 단정함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서로 싸우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성도로서 합당치 않다.
[14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의를 붙잡고 그의 성품을 본받고 그의 교훈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은 죄악된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죄악된 일은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다. 육신의 죄악된 성질의 중심에는 이기적인 욕심이 있는 것이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듯이, 이 세상에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시기와 싸움이 많아질수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이 점점 가깝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어두움의 일들, 곧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다툼의 모든 죄악된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옷, 의의 옷,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 입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경건과 의와 거룩, 그리고 그의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을 단장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버리자. 어두움의 일들이란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호색, 싸움과 시기 등 죄악된 일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기 전의 삶, 즉 우리 모두의 옛 사람의 모습이며, 죄악된 세상에 속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한 죄악된 일들을 다 벗어버리고 다시는 육신의 죄성과 욕심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자.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인 줄을 바로 알고 서로 사랑하며 선을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또 성결을 실천하자.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 그것은 의와 거룩, 선과 사랑의 인격과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죄인의 신분과 상태로부터 의인의 신분과 상태로 건져내시는 것이다. 구원의 목표와 방향은 거룩이다. 우리는 죄가 없는 거룩한 인격과 삶을 이루어야 한다.
[로마서 4장 성경 주석 설교말씀] 아브라함의 믿음(로마서 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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