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2장에서는 인격과 재물 언어를 통한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세상에서 어떻게 언행을 해야 할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이 올바르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진 여인, 지혜자의 혀, 근면(잠 12:1-28)
1-4절, 훈계, 선인, 의인, 어진 여인
[1절]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한다. ‘훈계’(무사르)라는 원어는 ‘징계’(discipline)라는 뜻이다(BDB, NASB, NIV). 징계는 하나님의 뜻 곧 의(義)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죄악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권면하고 인도하는 것이다. 징계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지혜와 지식과 영혼 사랑과 용기가 있는 자이며, 징계받기를 좋아하는 자도 징계의 목적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해하고 겸손히 징계를 받고 참는 마음이 있는 자이다. 잠언 3:11-12,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무사르)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토카카스)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그러나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 ‘징계’라는 원어(토카카스)는 ‘책망’이라는 뜻이다(BDB, NASB).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 그는 지혜가 없고 어리석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는 일에 부족하고 죄를 버리고 멀리하는 일에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며, 죄는 불행의 원인이다. 죄인은 현세에서 평강과 형통을 얻지 못하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2절] 선인(善人)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선인(善人)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다. 선은 도덕적 이상에 맞는 것이다. 선과 의는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것도 선(good)이라고 표현한다. ‘좋은 차, 좋은 날, 보기 좋다’는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또 ‘은총’이라는 원어(라촌)는 ‘선한 뜻, 기쁨, 호감, 은총, 사랑’ 등의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하고 착하고 좋은 사람 되기를 원하신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천국은 선한 사람, 착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롬 2:7; 14:17).
그러나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을 것이다. 로마서 1:28-32에 보면, 추악, 악의가 가득한 자, 악독이 가득한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등이 하나님께 정죄받을 죄악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악과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마지막 날에도 노와 분으로 심판하실 것이다(롬 2:8).
[3절] 사람이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하나니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사람은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한다. 무엇이 악인가? 불경건이 악이다. 무신론과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것과 안식일 없이 사는 것과 우상숭배 등이 악이다. 또 부도덕이 악이다. 부모 거역,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이 악이다. ‘굳게 서지 못한다’는 말은 안정을 얻지 못한다, 평안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악인은 평안하지 못하다. 시편 1:4-5,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건강도, 경제도, 가정도, 사회도 평안치 못하다. 악인은 질병이나 경제적 궁핍 등을 당하며 그 사회는 전쟁을 경험할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경고하셨고, 또 이스라엘 역사는 그것을 생생하게 증거하였다.
그러나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의와 선을 행하는 자,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를 말한다. 뿌리가 움직인다는 표현은 뿌리가 뽑혀 나무가 죽는다는 뜻이고, 뿌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표현은 뿌리가 깊이 박혀 있어 안전하다는 뜻이다. 의인에게는 평안이 있고 안정이 있다. 평안이라는 말 속에는 건강도, 경제적 안정과 번영도, 사회적 평안도 포함된다. 의인은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도 있고 가정적, 사회적 평안도 있다.
[4절]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어진 여인은 남편의 면류관이다. ‘어질다’는 원어(카일)는 ‘힘, 능력, 덕’이라는 뜻이다. 잠언 31:10에서는 ‘현숙한 여인’이라고 번역했다. 영어 성경들은 ‘덕 있는 아내’(KJV), ‘휼륭한 아내’(NASB)로 번역하였다. ‘어진 여인’은 덕과 능력을 가진 여인, 즉 지혜, 사리 판단력, 실천 능력을 가진 여인이다. 그는 돕는 자로서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자 즉 좋은 아내, 훌륭한 아내이다. 그는 집안일뿐 아니라, 또한 자녀 관리도 잘 한다. 어진 여인은 그 남편의 면류관, 즉 그는 그 남편의 자랑과 기쁨이다. 잠언 31:10에는 현숙한 여인은 진주보다 귀하다고 표현하였다. 또 현숙한 여인은 온 동네의 자랑이기도 하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현숙한 여자인 줄을 성읍 백성이 다 안다고 증거하였다(룻 3:11).
그러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남편으로 뼈가 썩음 같게 한다. 욕을 끼친다는 말은 남편을 부끄럽게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남편을 무시하고 그에 대해 불만하고 불평하며 남편과 다투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성경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하며 아내는 자기 남편을 주님처럼 존중하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1:3,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에베소서 5:22-2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남편으로 뼈가 썩음 같게 한다. 남편의 심적 고통이 매우 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잠언은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했다(잠 21:9; 25:24).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좋아하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자. 책망과 징계는 당장에는 우리에게 슬픔과 낙망을 주지만,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로 가게 하며 우리에게 결국 복과 유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악을 꾀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는 선한 사람이 되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자가 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공 여부는 그가 의롭게 사는가, 악하게 사는가에 달려 있다. 거기에 하나님의 복과 재앙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인 생각을 하지 말고, 경건하고 도덕적인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여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덕스럽고 유능한 좋은 아내가 되어야 한다. 또 그는 자기 남편이 그의 머리임을 깨닫고 그를 존중해야 한다.
5-8절, 의인의 생각, 입, 집, 칭찬
[5절]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니라.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다. ‘생각’(마카솨바)이라는 원어는 ‘생각, 판단, 계획’이라는 뜻이다. ‘공직하다’는 말은 올바르다는 뜻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자인데, 그의 생각은 올바르고 정정당당하다. 그것은 불의하거나 악하지 않고 또 거짓되지도 않다. 그것은 십계명이나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고 성경 교훈에 어긋나지 않고 양심이나 이성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다. ‘도모’(타크불라)라는 원어는 ‘계획, 조언’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잠언에서 ‘도략, 모략’으로 번역되기도 했다(11:14; 20:18; 24:6). 악인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법을 거스르는 자,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인데, 그의 계획은 거짓이다. 그는 거짓으로 악을 계획하고 거짓으로 악을 행하는 자이다.
사람의 생각하는 바는 그의 사람 됨됨이를 나타낸다. 잠언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사람의 됨됨이]도 그러한즉.” 사도 바울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했고(롬 8:5-6), 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했다(롬 12:2). 성도는 바르고 진실한 생각을 해야 한다.
[6절]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어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며 남을 미워하는 악인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고 말한다. 사람의 말은 그의 생각과 마음의 표현이다. 악한 말은 악한 생각과 악한 마음에서 나온다. 의인은 사람을 면전에서 책망할지언정 뒤에서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은 은밀히 남을 해치며 그를 죽이려 한다. 그것은 그의 행동이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일임을 자기 양심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피를 흘리는 일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고, 출애굽기 21장에서는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고 명령하셨다(12, 14절).
그러나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양심대로 그의 계명에 복종하며 사는 자이다. 그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뜻인가? 그는 악인에게 위험을 당한 순진한 자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려줌으로써 그리고 악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 깨닫게 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받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7절]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된다. 악인들의 형통은 잠시뿐이며 길어도 이 세상에서뿐이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엎드러질 때도 있다. 악인들은 언제, 어떻게 엎드러지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환난과 재앙으로 치실 때에 그렇게 된다. 그들은 원수들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거나 강도나 도적을 만나든지, 전쟁이나 기근을 당하든지, 화재 같은 대형사고나 부도를 당하거나 무서운 질병의 침입을 당하여 엎드러진다. 악인들은 엎드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망한다.
그러나 의인의 집은 든든히 서 있을 것이다. 의인들에게도 고난은 있다. 고난은 죄와 부족에 대한 징벌 때문에 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높으신 뜻 가운데서 오기도 한다. 그러나 고난은 유익이 많다.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고 성결하게 만들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게 만든다. 고난은 성도로 온전한 인격이 되게 한다. 의인은 그 고난을 다 이겨내며 거기에서 구원을 얻는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특히 ‘의인의 집’ 즉 의인의 자녀들은 든든히 세움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적 복을 약속하셨다.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의 자손들은 자자손손 복을 받을 것이다. 다윗은 시편 37:25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하였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의 자손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린 것은 그 증거일 것이다.
[8절] 사람이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패려한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을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부도덕하게 행하는 것, 남을 미워하고 이기적이고 음란한 것, 또 세상의 것, 육신의 것만 구하는 것, 또 게으른 것 등이 미련함이다. 예레미야 8:9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고 말씀하셨다. 지혜는 사물을 바르게 보고 사리에 맞고 양심에 맞게 바르게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다. 야고보서 1:5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지혜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사람은 다 이성과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성적이게, 양심적이게 행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이 그렇게 온전하게 살지는 못해도 이성적이게, 양심적이게 행하는 자를 다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패려한 자는 멸시를 받는다. 패려하다는 말은 패역하다는 뜻과 같다. 그것은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생각과 판단력이 비뚤어진 것을 말한다. 그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생기는 것 같다.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잘못된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며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한다. 마음이 패려하면 말과 행동도 악하고 비뚤어지게 된다. 그것은 지혜가 없는 미련한 마음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그의 말과 행동이 경우나 사리에 맞지 않고 양심에도 어긋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하고 거짓된 생각을 가지지 말고 그런 생각을 버리고 멀리하고, 항상 바른 생각을 가지고 올바르고 정정당당하게 살아가자. 그것이 사람의 정로요 사람답게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복과 평안을 얻는 길이다.
우리는 남을 해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악한 말을 하는 악인이 되지 말고, 오직 사람들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는 정직한 자가 되자. 악인은 무가치한 자이며 남을 구원하는 의인은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자이다.
우리는 악인의 일시적, 이 세상적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 우리의 집과 자손들이 든든히 세워지게 하자. 악인의 형통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의인의 복은 영원하며 자손들에게 이어진다.
우리는 마음이 비뚤어진 자가 되어 멸시를 받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칭찬을 받는 자가 되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정로요 인간다운 삶이다.
9-12절, 실속, 잔인, 근면, 불의의 의
[9절]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가 되라고 권장한다. 그는 왜 사람들에게 비천히 여김을 받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아마 자신을 높이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직접하고 겸손하며 근면하고 그래서 사람들 보기에는 종들과 똑같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을 소유하고 있고 그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 감독하고 일을 하게 하는 자이다. 그러면 그는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고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는 농사를 짓거나 과수원을 하거나 기타 무슨 일을 하든지 소득을 얻을 것이다. 윗사람은 적절히 일을 시키는 자가 잘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스스로 높은 체하지만 음식이 핍절한 자가 있다. 그는 자신을 고상한 자라고 생각하고 궂은 일이나 땀 흘리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부릴 종이 없거나 종이 있어도 부리지 않고 그에게 일을 시키거나 감독하지 않는다. 그는 아랫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보기에 고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의 일에 아무 진전이 없고 좋은 결과가 없고 열매나 소득이 없다.
오늘날같이 어려운 시대에는 100만원도 못 버는 사장보다 100만원이라도 버는 직원이 낫고, 취직도 못하는 대학졸업자보다 취직이라도 하는 고등학교졸업자가 낫다. 또 손에 기름떼 묻히며 일하지만 돈을 좀 버는 기술자가,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지만 일거리가 없어서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무직원보다 낫다. 겉치레나 체면을 중시하지 말고 내면과 실속을 중시하는 것이 지혜이다.
[10절]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본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 생명, 정조, 재산, 명예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짐승들의 생명까지도 돌아본다. 그들은 짐승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추위와 더위를 염려하고 아프면 치료해주고 그것들을 학대하지 않는다.
성경은 살생(殺生)을 금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본래 채소와 과일을 먹으라고 명하셨으나 홍수 심판 후에 생물도 먹도록 허락하셨다(창 9:3). 단지, 짐승 중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것만 먹고 물고기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만 먹고, 또 생물을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다(레 11장; 17장). 물론, 신약시대에는 이 법을 그대로 지키지 않고, 오직 도덕적 의미만 참고한다.
가축의 생명을 돌아보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심정이며 섭리이다. 율법에는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말했다(신 25:4). 욥은 하나님께서 까마귀 새끼가 그를 향해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신다고 말하였다(욥 38:41). 시편 104:21, 27은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며 바다 생물들이 주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말씀하셨다(마 6:26, 30).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라”고 말한다. 악인은 가축들에 대해서도 학대하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아플 때 치료해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노부모 학대, 여성 학대, 아동 학대, 외국인 노동자 학대뿐 아니라, 또한 동물 학대도 미워하신다.
[11절]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자’란 직장이든지 가정이든지 자기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며 수고하는 자는 소득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면 그러할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시편 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예를 들어, 농사를 지을 때,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께서 적절한 비를 주시고 병충해를 막아주시면 많은 수확을 거둘 것이다. 또 사업을 할 때, 열심히 일하고 사회적, 경제적 여건에 갑작스런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상당한 소득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되었다(창 3:19).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출 20:9). 그러므로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했고, 사도 바울도,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교훈하였다(살전 4:11; 살후 3:10).
그러나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다. ‘방탕한 것’이라는 원어(레킴)는 ‘헛된 것들’(BDB, NASB)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사치하고 시간과 돈과 힘을 낭비하며 절제치 못하는 행동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 것들을 따르는 자들은 소득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지혜가 없는 자들이다.
[12절]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악한 자들은 불의의 이익[‘악한 자들의 그물’(KJV) 혹은 ‘악한 자들의 탈취물’(NASB, NIV)]을 탐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악한 일을 하여 쉽게 돈을 버는 것이 불의의 이익이다. 예를 들어, 남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벌거나 도적이나 강도짓을 하여 돈을 버는 것이 그러하다. 악한 자들은 그런 불의의 이익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원하며 그런 일을 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장로나 집사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딛 1:7; 딤전 3:8). 우리는 땀 흘려 일함으로 얻는 정당한 이익을 구해야 한다. 시편 128: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잠언 31:27, “[현숙한 여인은]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의지하고 순종하며 그의 계명대로 살려고 애쓰는 의인들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할 것이다. ‘의인의 뿌리’란 그의 경건과 의를 가리킬 것이다. 경건과 의는 성도의 생명이다. 성도가 경건과 의 가운데서 일하며 수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셔서 수고의 대가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지 말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너무 관심을 두지 말고 겸손히, 부지런히, 실속 있게 우리의 할 일을 하는 자가 되자. 그러면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자. 다른 이의 인격과 생명을 존중하고 어려운 자들을 배려할 줄 알며 짐승까지도 돌보는 자가 되자.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목표인 하나님의 형상이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사치하거나 낭비하지 말고 절제 있게 살며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자가 되자. 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죄짓지 말고 일하면서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수고의 대가를 누리자.
우리는 결코 불의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자. 우리는 경건하고 의로운 마음과 행실로 일함으로써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누리자. 불의한 이익은 당장에는 유익하게 보여도 복이 되지 못하고 결국 화가 된다.
13-16절, 언행, 권고, 분노
[13절]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들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마 12:34-35). 악인은 말로 범죄한다. 그에게서는 독한 비난, 미움의 말, 거짓말, 이간질 등이 나온다. 악인은 그 입술의 허물로 인해 그물에 걸린다. 그는 자기의 말 때문에 곤란을 당하고 멸망을 자초한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또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하였다(약 1:19).
그러나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난다. 의인의 의로움은 그의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말로 나타난다. 의인에게도 환난은 있지만 그는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11: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절]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福祿)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복록(福祿)에 족하다는 말은 복으로 만족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말과 행위는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마태복음 12:34-35,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선한 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고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온다. 시편 35:13,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마태복음 10:12-13,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사람은 그 손의 행한 대로 받는다. 선한 행위는 타인에게 유익을 주고 자신에게도 복이 된다.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갈라디아서 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마태복음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악간의 행위에 대해 공의로 보응하신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15절]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미련한 자는 자신의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옳다고 생각한다. 그의 행위가 바르지 않지만, 그가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고집스럽기 때문이다. 완고함과 확신은 다르다. 완고함은 인간적, 주관적 생각에 근거한 무지하고 교만한 고집이다. 그러나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에 근거한 확고한 신념이다. 우리는 완고함 곧 무지하고 교만한 고집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기 주관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대한 확신은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애매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그 뜻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며 외로운 길이며 세상의 비난을 받는 길이다. 그러나 노아나 선지자 엘리야와 미가야는 그 외로운 길을 갔고 다니엘과 사도 바울도 그 고난의 길을 갔다. 옛날부터 세상은 넓은 길을 좋아했으며 오늘날 교회들 안에도 교리적, 윤리적 오류를 포용하는 무분별한 포용주의와 연합운동의 세력이 크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확신하며 좁은 길을 가야 한다.
미련한 자는 남의 말을 듣지 않지만,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 권고는 조언을 가리킨다. 조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즉 성경적 조언과 인간적 조언이다. 성경적 조언은 유익하고 건설적이다. 그것은 의와 선을 이룬다. 그러나 인간적 조언은 사람 보기에 그럴 듯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뜻과 달리 악한 경우가 많다. 지혜로운 자가 조언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적 조언을 듣는다는 뜻이다. 겸손하고 지혜 있는 자는 성경적 조언을 잘 들을 것이다.
[16절]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사람이 분노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은 불의한 일을 볼 때 정당한 분노가 생긴다. 또 사람은 자신이 물질적 손실이든지 부당한 비난이나 명예훼손이든지 남에게 손해를 당했을 때 또는 자존심이 몹시 상할 때 보통 분노한다.
사람이 분노를 당장 나타내는 것은 왜 잘못인가? 그것은 상대방의 비난이 옳은데도 자신이 잘못 판단하여 급하게 화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분노가 지나쳐 입에서 욕이나 저주 같은 말의 실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성급한 분노나 말의 실수는 죄를 짓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화가 날 때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런 훈련이 필요하다. 야고보서 1:19-20,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다. ‘참는다’는 원어(카사)는 ‘감춘다’는 뜻이다. ‘수욕을 참는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상황에서도 금방 그것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좀더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후에 화를 내어도 늦지 않을 것이며 그런 후에 화를 내는 것이 실수 방지를 위해 더 안전할 것이다. 또 생각해보니 자신이 잘못해서 당한 수욕이라면 달게 받고 반성하고 고치면 될 것이고,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 당한 수욕이라면 후에 가라앉은 감정과 마음으로 상대에게 충고하면 될 것이다. 또 우리가 다 부족과 실수가 많으므로 상대를 불쌍히 여길 수도 있다. 여하튼 그는 지나치게 반응하여 실수하거나 범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악한 마음과 악한 말을 버리고 오직 바르고 선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품고 살자. 또 환난을 당할 때 염려치 말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성찰하여 회개할 바를 회개하며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우리는 바르고 선한 자가 되어야 하고 바르고 선한 말만 하고 바르고 선한 행위만 해야 한다. 선한 말과 행위는 남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복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지하고 교만한 고집을 버리자. 우리는 성경적 조언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그 뜻대로 좁은 길, 고난의 길이라도 걷자.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참된 지혜와 평안과 생명의 길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처럼 분노를 당장에 내지 말자. 우리는 수욕을 참고 좀더 생각하고 판단한 후에 적절하게, 지혜롭고 덕스럽게 처신하자. 그것은 우리가 사모할 만한, 실수하지 않는 성숙한 인격의 모습이다.
17-20절, 진실, 지혜, 화평
[17절]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진실을 말하는 자여야 한다. 특히 우리는 주 안에서 한 몸의 지체가 되었으므로 서로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낸다. 그는 옳은 것을 말한다. 진실과 의는 함께 간다. 옳은 것은 참된 것이며 불의한 것은 거짓된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다 옳다. 사람이 진리를 말하면, 하나님의 법과 그것이 옳다는 것과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과 죄인들에게 의가 필요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가 되심을 증거할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말하면, 옳은 것을 증거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법을 실천함으로 의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한다. 거짓말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거짓은 마귀의 죄악이다. 예수께서는 마귀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성경은 거짓말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했다(계 21:8, 27; 22:15).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한다. 궤휼은 거짓을 뜻한다. 거짓 증인은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증거하며 사실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증거한다. 그는 의를 불의라고 말하며 선을 악이라고 말하고, 불의를 의라고 말하며 악을 선이라고 말한다. 진실과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세계의 덕목이지만, 거짓과 불의는 마귀의 속성이며 마귀 왕국의 특징이다. 거짓과 거짓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합당치 않다.
[18절]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말은 사람의 생각과 인격의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그러므로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이면 그는 온전한 자이다(약 3:2). 그런데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다윗은 자주 악인의 말을 칼에 비유하였다. 시편 55:21,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시편 57:4,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시편 64:3,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사람은 잘못된 판단이나 성급함, 또는 사랑 없음이나 미움 때문에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하는 말을 하기 쉽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교훈했고(엡 4:31), 골로새서에서도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을 벗어버리라고 하였다(골 3:8). 사도 베드로도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하였다(벧전 2:1).
그러나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 ‘양약’(마르페)이라는 원어는 ‘치료’라는 뜻이다(BDB, NASB, NIV). 지혜로운 자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물론 지혜자도 때로는 책망의 말도 한다. 그러나 참된 충고는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이며, 사랑에서 나온 책망은 상대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잠언 27:5-6,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19절]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된다. 사람들은 때때로 진리를 말하는 자, 진실을 말하는 자를 인정치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러하였다. 그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라고 말했었고(왕상 18:22), 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부르짖었었다(왕상 19:10). 또 미가야도 그러했다. 그는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다르게 홀로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말하였다(왕상 22:13-14). 사도 바울도 외로운 싸움을 하였었다. 그는 말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했고(딤후 1:15), 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다”고 말하였다(딤후 4:16). 그러나 세월이 오래 지난 오늘날 우리는 엘리야, 미가야, 바울의 말들이 진실했고 그들의 말이 남아 있음을 알고 그들의 말과 행위를 본받으려 한다.
그러나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다. 거짓 혀는 속이는 혀, 사실을 왜곡시키는 말을 하는 혀이다. 말쟁이, 아첨꾼의 혀가 그런 혀이다. 그런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속아넘어가는 동안뿐이다. 그 동안만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체가 드러나면, 즉 그의 거짓과 허풍, 속임수와 위선이 드러나면,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말하며 다 그를 떠나갈 것이다.
[20절]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 즉 거짓이 있다. 사람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악을 꾀할 때 거짓말과 속임을 사용한다. 그는 악하지 않은 듯하게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범죄케 했던 뱀의 모습이다. 그는 하와에게 “너희가 [선악과 열매를 따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었다(창 3:4). 아합과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 했을 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말하는 거짓 증인을 세웠었다(왕상 21:10). 로마서 3:13-14는 “저희[악인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화평을 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다. 진실과 선과 화평은 같이 간다. 또 거기에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했고(롬 14:17), 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했다(갈 5:22-23).
그러나 남을 속이고 해치는 자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잠언 28: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우리는 진리와 진실만 말하는 자가 되고, 의만 나타내는 자가 되자. 우리는 결코 거짓 증인이 되지 말고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말고 또 정직하지 않은 말을 하는 자가 되지 말자. 의와 진실은 참된 성도의 표이다.
우리는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덕스러운 말을 하는 지혜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온전한 말은 성화의 목표이다. 우리는 선하고 덕스러운 말로 성화를 증거하자.
우리는 말쟁이나 아첨꾼처럼 거짓말을 하지 말자.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도, 거짓말에 현혹되지도 말자. 우리는 오직 진실한 말만 하자.
우리는 악과 거짓을 버리자. 그것은 마귀의 세계의 속성이며 마귀의 자녀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오직 선과 화평을 구하자.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이다. 거기에 평안도 있다.
21-24절, 의, 진실, 지혜, 근면
[21절] 의인에게는 아무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 곧 구주 예수를 믿고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다. 그런 의인에게는 아무 재앙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의인에게도 고난은 있다. 죄로 인한 징계의 고난이 있다. 다윗은 범죄한 이후 여러 가지 징계의 고난을 당했다. 히브리서 12:8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했다. 또 욥의 고난 같은 신앙인격 훈련의 고난도 있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다.”
그러나 의인의 고난은 실상 재앙이 아니다. 의인의 고난은 멸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에서 그를 건져주신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91: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 또 고난을 포함하여 성도의 당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유익을 이룬다(롬 8:28).
순교는 가장 높은 차원의 고난이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재앙이나 징벌이 아니다. 그것은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다가 죽는 영광스런 죽음이다. 주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9).
그러나 악인에게는 앙화, 즉 재앙이 가득할 것이다.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인들에게 기근과 가난, 전쟁과 열방으로의 흩어짐, 온갖 질병 등의 재앙이 있을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성경은 내세의 지옥 형벌도 증거한다(막 9:43-48; 계 21:8).
[22절]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거짓말하는 것은 마귀의 죄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여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었다. 이단들과 이방 종교의 지도자들은 결국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열왕기상 22: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마태복음 24:11, (말세의 징조들 중 하나)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데살로니가후서 2:9-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잠언 6장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를 증거하면서 그 중에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포함하였다(잠 6:16-19). 또 성경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며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증거하였다(계 21:8, 27; 22:15).
그러나 진실히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모든 말씀은 진리 곧 진실한 말씀이다. 사람이 진리 안에서, 즉 진리대로 믿고 행하며 또 진실하게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해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라”고 말씀하셨고(슥 8:16),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5).
[23절]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 두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춘다. 슬기로운 자는 많이 알아도 아는 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하고 선하며 지식의 참 용도를 알고 있고, 또 사람의 지식이란 보잘것없는 것이며 작은 지식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는 상대가 자기보다 더 잘 알 수 있거나 또는 자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수 있다. 가르치는 경우에는 지식을 가르쳐야 하지만, 아무 때나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것을 쓰지 않고 꼭 필요할 때 쓴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많이 알아도 아는 척 하지 않고 그 지식을 감추어 두는 것이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나,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고전 8:1; 13:4).
그러나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한다. 미련한 것이란 잘못된 지식이나 잘못된 생각과 판단을 가리킬 것이다.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전파한다. 잠언의 다른 구절들도 이와 비슷한 것을 말한다. 잠언 13:16,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여도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미련한 자는 왜 미련한 것을 전파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무지하고 교만하고 사랑과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미련한 자는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는 자기 자신만 미련할 뿐 아니라, 미련한 것을 전파함으로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미련하게 만든다. 또 그는 교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려 한다. 그것은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 아니다.
[24절]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된다. 일은 보통 손으로 한다. 농사도 목축도 건축도 가사도 사무 일도 다 손으로 한다. 사람은 자기의 하는 일에 근면하고 충실해야 한다. 손이 부지런한 사람은 많은 소득을 얻는다. 한 시간에 물건을 열 개 만드는 사람보다 열세 개 만드는 사람은 여덟 시간이면 스물네 개나 더 만들며 그러면 수입도 그만큼 늘 것이다. 부지런한 학생은 성적이 올라 좋은 학교에 진학할 것이며, 부지런한 직장인은 점점 승진하여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다. 신앙인격도 비슷하다. 더 많은 성경 읽기와 배우기, 기도, 성도들 간의 교제, 봉사 등을 통해 부지런히 자신을 단련시킨 자는 지식과 인격이 많이 성장하여 교회의 중요한 책임을 맡을 직분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는다. 자기 일에 게으른 자는 그 일에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한다. 성경은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잠언 6:9-11,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8:9는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고 말한다. 그런 자는 남의 밑에서 부림을 받을 것이다. 또 성경은 게으른 자는 심지어 그 부리는 자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고 괴로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잠 10:26).
우리는 결코 악하게 살지 말고 오직 의롭게만 살자. 우리는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믿자.
우리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모든 거짓을 버리고 또 거짓말들을 멀리하며,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우리는 자신을 뽐내거나 미련한 것을 전파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자신의 지식을 감추고 꼭 필요한 때 그것을 쓰는 지혜자가 되자.
우리는 범사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 등의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앙생활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우리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주의 일에 힘쓰자.
25-28절, 선한 말, 의인, 근면, 생명
[25절]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마음으로 번뇌케 한다. ‘번뇌케 한다’는 원어(솨카의 사역형)는 ‘침체시킨다. 풀이 죽게 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약해서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마음이 침체되고 풀이 죽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모세도 불평하는 백성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의 곤고함을 아뢰었고(민 11:12-15), 하나님의 종 엘리야도 낙심하여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취하기를 소원하였었다(왕상 19:4).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염려와 생활의 염려를 조심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셨고(마 6:31)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세상의 염려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를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로 비유하셨다(마 13:22). 또 그는 우리가 깨어 그의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을 교훈하시면서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져서 그 날이 덫과 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눅 21:34).
그러나 선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선한 말, 좋은 말은 믿음으로 하는 권면과 위로와 격려의 말이다. 그것은 열두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과 같은 믿음의 말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말했다(민 14:8).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며(잠 3:6), 또 우리에게 주신 모든 현실이 결국 선을 이룰 것을 믿어야 한다(롬 8:28).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교훈했다(빌 4:6). 참 믿음에서 좋은 권면과 위로와 격려의 말도 나온다.
[26절]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기를 미혹하게 하느니라.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자,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선하게 사는 자이다.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된다.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된다’는 원문(야세르 메레에후)은 영어성경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그 이웃보다 낫다’(KJV),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된다’(NASB, Lan- genscheidt), ‘그 이웃을 살핀다’(BDB, KB, NIV). 의인은 그 덕성이나 평안의 복에 있어서 이웃보다 낫다. 또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또 의인은 아무 친구나 사귀지 않고 그의 이웃을 살피며 조심할 것이다. 어느 번역도 뜻은 다 좋지만, 전통본문의 읽기나 언어적으로는 두 번째나 세 번째 번역과 해석이 타당한 것 같다.
그러나 악인들의 소행은 그들을 미혹하게 한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대로 행치 않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성경의 교훈대로 살지 않고 자기의 욕심과 세상의 악한 풍조를 따라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자기를 미혹한다’는 원어(타세엠)는 직역하면 ‘그들을 미혹하게 한다’는 뜻이다(KJV, NASB, NIV). ‘그들’이라는 단어는 우리 말 번역처럼 악인들 자신을 가리킬지도 모르나, 영어성경들의 번역처럼 문맥적으로 전반절의 이웃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악인들의 소행은 자신들을 곁길로 가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곁길로 가게 만들 것이다. 악한 사람들의 악행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악한 길로 인도할 것이다.
[27절]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 ‘사냥하다’는 원어(카라크)는 ① ‘(사냥감을 잡기) 시작하다,’ 혹은 ② 유대인의 전통이나 아람어역에 의하면, ‘(음식을) 굽는다’는 뜻이라고 한다(BDB). 영어성경들은 “게으른 자는 그 사냥한 것도 굽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게으른 자는 사냥하는 것도 힘들어하고 귀찮아하며, 또 사냥하여 잡은 짐승, 즉 이미 가지고 있는 음식 재료도 구워 먹는 일을 힘들어하고 귀찮아할 것이다. 잠언 26: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성도는 게으른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용감히 나아가 사냥도 하고 사냥한 것을 굽기도 해야 한다.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다. 손이 부지런한 자는 물질적 유여함을 누릴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바이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부지런함은 물질적 유여함보다 더 귀한 재산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재산을 모을 것이다. 또 부지런한 사람은 남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성도는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부지런해야 한다.
[28절]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다. 본래,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어 죄를 범함으로써 죽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이었다(창 2:16-17).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영원자존(永遠自存)하신 의로우신 하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 의에 근거하여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定罪)에 이른 것같이 의(義)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의의 결과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다.
의의 길에는 사망이 없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으나 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구원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말씀하셨고, 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요 11:25-26).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고백하였다(고전 15:55-57).
우리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항상 소유하고 누리자. 또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에 근거한 바르고 선한 말로 남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 교훈대로 사는 가운데 이웃을 인도하는 의인이 되고 또 그런 의로운 자들과 교제하자.
우리는 범사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 세상 일뿐 아니라, 주의 일에도, 또 개인적 경건생활에도 그러하자.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곧 그의 의를 믿는 믿음 안에만 거하자. 또 우리는 의와 영생을 소유한 백성으로서 죄짓지 말고 의만 행하자.
[욥기 23장 설교말씀] 욥--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욥 23:1-17)
'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약성경인물 설교말씀] 압살롬-도피 생활 (0) | 2022.04.17 |
---|---|
[신명기 성경지명 설교말씀] 골란-도피성과 그리스도(신 4:43) (0) | 2022.04.17 |
[예레미야 10장 하나님 말씀] 인생의 길(렘 10:23-25) (0) | 2022.04.16 |
[룻기 4장 강해설교말씀] 보아스와 결혼함(룻 4:1-22) (0) | 2022.04.14 |
[욥기 23장 설교말씀] 욥--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욥 23:1-17) (0) | 2022.04.14 |
[다니엘 12장 주일설교말씀] 마지막 때의 예언(단 12:1-13) (0) | 2022.04.05 |
[이사야 15장 하나님 말씀] 모압에 대한 경고(사 15:1-9) (0) | 2022.04.05 |
[출애굽기 성경 주석 강해설교] 만나와 메추라기(출 16:1-36) (0) | 2022.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