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서 17장에서는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연단해야 합니다. 악인들을 말을 함부로 하여 사람의 마음을 죽입니다. 조롱하는 말을 하여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우리는 말을 잘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말을 하여 하나님께 칭찬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혀를 조심하여 말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화목, 용서, 말 절제(잠 17:1-28)
1-4절, 화목, 슬기로운 종, 연단, 악인
[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饍)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른 떡 한 조각만 있다’는 말은 고기나 우유나 과일이 없는 가난한 가정의 모습을 나타낸다. ‘화목하는 것’이라는 원어(솰와)는 ‘조용함, 평안함’이라는 뜻이다. 다투는 가정에는 시끄러움이 있으나 서로 사랑하고 화목한 곳에는 조용함과 평안함이 있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생활의 모습이다.
‘육선(肉饍)’이라는 원어(지브케)는 ‘제물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의 규정대로, 화목 제물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화제(火祭)로 드리고 또 일부분을 제사장에게 돌린 후에, 나머지는 제사드린 자들이 먹는 것을 가리킨다. 제물들이 집에 가득하다는 말은 물질적으로 유여하고 식탁에 고기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물질적 유여가 있는 집이라도 다툼과 시끄러움이 있으면 행복하지 못하다.
가정의 행복은 돈의 많음에 있지 않고 가족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조용하고 평안한 삶에 있다. 잠언 15:17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부요를 추구하지 말고(딤전 6:9-10) 평안함과 자족하는 마음을 구해야 한다. 골로새서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2절]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
종들 중에는 슬기로운 종이 있고 미련한 종이 있다. 미련한 종은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성질도 말씨도 나쁘지만,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뜻을 알고 부지런하며 충성되고 헌신적이며 성격도 말씨도 좋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부모에게 수치가 된다.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릴 것이다. 주인은 그가 신임하는 그의 충성된 종에게 자기 아들을 맡기며 그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어 아들을 다스리게 하며, 그 종은 주인의 기쁘고 선한 뜻을 받들어 아들을 충실하게 교육하며 돌볼 것이다.
또 슬기로운 종은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을 것이다. ‘아들들’이라는 원어(아킴)는 ‘형제들’이라는 뜻이다(KJV, NASB, NIV). 그 형제들이란 그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아들들 가운데서 유업을 나눠 얻는다는 말은, 주인이 그 종을 자기 아들들 중의 하나처럼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 마치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종 시바에게 그 주인의 소유를 주었듯이(삼하 16:4), 그 주인은 자기 아들들에게 줄 기업의 일부를 그 종에게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교역자들과 교회 직분자들은 그의 종들이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주실 기업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때를 따라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라고 교훈하셨다(마 24:45). 미련한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게으르고 악하지만, 슬기로운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부지런하고 충성될 것이다.
[3절]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연단하다’는 원어(바칸)는 ‘검토하다, 시험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검토하시고 시험하신다.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 악한 자는 악한 마음으로 악을 생각하고 행하며, 선한 자는 선한 마음으로 선을 생각하고 행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심히 부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하였다.
중생은 마음의 변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겔 36:26).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였다(엡 4:22-24).
성화는 마음의 계속적 변화이다. 에베소서 4:23에,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아나네우스다이)는 현재부정사로서 진행적, 반복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우리의 성화에 관계된다. 용광로가 원광을 제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금과 은을 만들어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여 악성과 악습을 제거하고 깨끗하고 선하고 좋은 인격을 만드신다. 그것이 성화이다. 성화는 마음의 단련이다. 그것은 계속적이며 점진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을 항상 긍정하고 그 현실 속에서 마음의 단련을 받아 성화를 이루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시 26:2).
[4절]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궤사한’이라는 원어(아웬)는 ‘거짓된’(KJV), ‘악한’(BDB, NASB, NIV)이라는 뜻이다. 거짓과 악은 잘 통한다. 사람의 악은 마귀의 거짓말에서 비롯되었다(창 3장). 그 후, 거짓은 인간 본성의 죄악성의 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예수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악들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등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거짓과 악은 서로 통한다. 악은 정당성이 없으므로 속여야 행할 수 있고 거짓말은 대개 악을 행하기 위해 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거짓말 자체는 악이다. 그러므로 선의의 거짓말도 안 해야 한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도 좋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명하실 때 거짓말하지 말 것도 명하셨다. 십계명의 제9계명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했다(엡 4:25). 거짓말은 지옥갈 죄이다. 요한계시록 21:8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다. 또 요한계시록은 거짓말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을 것도 분명히 증거한다(계 21:27; 22:15).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饍)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 우리는 부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서로 사랑함과 평안한 마음을 귀중히 여기며 지키자.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며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 않고 영광을 돌리며 그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지혜롭고 충성된 종들과 자녀들이 되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지만,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신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이 겸손하게 되고 더러운 마음이 깨끗하게 되고 악한 마음이 착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과 마음의 단련을 받자.
우리는 악을 행치 말고 악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멀리하자. 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말고 또 거짓말을 듣지도 말자.
5-8절, 조롱, 손자, 거짓말, 선물
[5절]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이다.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고 학대하는 자가 왜 그를 지으신 자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되는가? 왜냐하면 첫째로 가난한 자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빈부가 섞여 살며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이시다(잠 22:2). 둘째로 가난한 자의 환경여건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환경여건은 창조주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신 것이다. 셋째로, 부자들의 물질적 유여함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역대상 29:14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였고, 사도 바울은 교만하고 자랑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책망하듯이 말하였다(고전 4:7).
또 다른 사람이 재앙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이다. 잠언 24:17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는가? 왜냐하면 자신도 그 사람과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이며, 자신이 재앙을 받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 때문이며, 자신에게 어떤 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는 참된 의를 행할 수 없다.
[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다. 노인들에게 손자들은 세상에서의 기쁨과 낙이며 자랑거리다. 노인이, 경건하고 훌륭한 손자들을 많이 가진 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고 그 몸의 소생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출 20:6; 신 28:4).
그러므로 시편 112:1-2는,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하였고, 시편 127:3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또 시편 128:3-4는,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말하였다. 노인에게 경건하고 지혜롭고 착한 손자와 손녀가 많고 그들이 교회와 사회의 훌륭한 인물들이 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복이다.
또 아비는 자식의 영광이다. 많은 자녀들에게는 그들의 아빠, 엄마가 세상에서 최고일 것이지만, 특히 그 부모가 복될 때 부모는 그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 부모는 언제 복된 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화를 이루어 좋은 인격자가 되고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을 때이다. 즉 자녀들은 부모님의 훌륭한 인격과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과 기도 응답과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체험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특히 부모가 교회에 기둥 같은 성도와 일꾼이 되고 성도와 직분자의 좋은 본이 될 때, 자녀들은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7절] 분외의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치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분외의 말’이라는 원어(세팟 예세르)는 ‘과도한 말’ 혹은 ‘거만한 말’(BDB, NIV)이라는 뜻이든지, ‘훌륭한 말’(KJV, NASB) 혹은 ‘적당한 말’이나 ‘경우에 맞는 말’(Vg)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미련한 자는 과도한 말이나 거만한 말을 하는데 그것은 사람으로서 합당치 않다. 물론, 훌륭한 말이나 경우에 맞는 말도 합당치 않다.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는가? 합당치 않다. ‘존귀한 자’는 왕이나 방백 등을 가리키며, 또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와 왕 같은 제사장이 된(요 1:12; 벧전 2:9) 신약 성도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미워하신다(잠 6:16-19).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며(요 8:44),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그러므로 존귀한 자에게는 거짓말이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利)를 미워하는 자이어야 했다(출 18:21, 24). 또 신약교회의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 자이어야 하였다(딤전 3:8). 교회 직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성도는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진실은 하나님의 백성의 증표이며 인간 관계의 모든 신임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이해 관계를 떠나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
[8절]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
‘뇌물’이라는 원어(쇼카드)는 ‘뇌물’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나, ‘선물’이라는 뜻도 있다(BDB, KB). 옛날 영어성경은 ‘선물’(KJV)이라고 번역했다. 선물과 뇌물은 비슷하다. 그 차이는 의도에 있다. 선물은 순수한 사랑과 감사의 표이지만, 뇌물은 무엇을 얻고자 기대하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 ‘임자’라는 원어(베알라우)는 ‘그것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선물은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보석과 같아서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한다.
선물은 어느 때든지 효과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연다. 잠언 18:16은,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고 말하며, 잠언 19:6은,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21:14는,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에도 감독 곧 장로의 자격 요건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들어 있다(딤전 3:2). 선을 베푸는 것은 남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것과 같다.
뇌물도 효과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뇌물은 불의를 조장하고 도덕적 해이를 가져오고 사회를 부패시킨다. 악인은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한다(잠 17:23). 이스라엘 사회가 부패했을 때, 뇌물이 성행했다. 이사야 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3:8). 또 시편 15:5는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는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않는 자라고 말하였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또 재앙 당하는 자를 기뻐하지 말자. 우리는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버지는 자식의 영광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적 자녀들뿐 아니라, 영적 자녀들이 번창하고 그들이 복 받기를 기도하며, 또 그들에게 신앙적, 인격적 본이 되고 복의 본도 되기를 소원하자.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성도로서, 또 교회 봉사자라면 더더욱, 모든 거짓말을 버리고 항상 진실만을 말하자. 그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합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여는 효과가 있다. 우리는 남에게 선을 베풀고 남을 대접하는 좋은 인격자가 되자. 그러나 뇌물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9-12절, 용서, 총명, 반역, 미련함
[9절]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이다. 잠언 10:12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랑이 있으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다.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했다(벧전 4:8).
우리에게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남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이 와서 잘못했다고 말하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아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22). 우리는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하였고(고전 13:4, 7), 또 교훈하기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엡 4:31-32).
그러나 어떤 문제를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이다.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한번 용서하면 그것을 거듭해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않으신다(렘 31:34). 우리는 하나님의 이 일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거듭 말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10절]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개로[혹은 ‘백 대’]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경계’라는 원어(게아라)는 ‘책망’이라는 뜻이다(BDB). 미련한 자와 지혜자는 큰 차이가 있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이다. 그는 교만하고 반항적이고 불평 원망하고 항상 남의 탓만 하고 바른 책망을 진지하게 받지 않는다. 그에게는 백 대의 매도 별 효과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증거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여러 번 징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범죄했다.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의 죄악성 곧 전적 부패성을 잘 나타낸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알고 남의 권면을 듣지 않는다(잠 12:15; 13:1). 잠언 27:22는,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이며 책망을 들을 때 겸손히 받고 진지하게 자신을 반성하며 고친다. 잠언 12:15는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고 말한다. 그는 부모나 선생에게 매를 맞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게는 한마디의 책망이 효력이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지혜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심령에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데 있다(잠 1:7; 9:10).
[11절]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
‘반역’은 하나님이나 왕이나 윗사람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쓴다. 왜 그런가? 그는 교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그는 세상이나 사회나 단체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위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불평하고 원망하며 대적하고 반항한다.
구약시대에 고라는 레위 지파 사람인데 동료들과 함께 당을 지어 유명한 족장 250명과 함께 하나님의 종 모세를 대적했다. 그는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 위에 자신을 높인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놓고 모세를 대적했다(민 16:1-3, 19). 신약성경 유다서에 보면, 초대교회의 거짓 교사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합법적으로 세우신 목사와 장로들을 무시하고 교회의 일들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했고 당을 지어 교회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의 일들을 방해하였다(유 8, 16, 19).
선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종하고 질서를 지킨다. 그들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하며 동료들을 사랑하고, 자신들이 속한 단체를 건립한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 세우신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하였고(벧전 2:13-14, 17), 바울은 주 안에서 성도들을 다스리며 권면하는 자들을 가장 귀히 여기라고 교훈했다(살전 5:12-13). 또 히브리서 13:17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했다.
본문은 “그러므로 그에게[악한 자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모세를 대적하였던 고라와 그 동료들과 그 가족들은 땅이 갈라져 산 채로 땅 속에 묻히어 멸망하였다(민 16:31-33).
[12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새끼 빼앗긴 암콤은 매우 성질이 나서 난폭한 상태에 있을 것이다. 미련한 자는 그보다 더하다는 것이다. 즉 미련한 자는 심히 난폭하고 거칠며 이성적 판단이나 이해심이나 자제심이 없어 보이는 자이다.
사람은 참으로 미련하고 악하다. 사람들이 서로 위하고 서로 사랑하며 조용히, 평온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매우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무시하고 없는 자는 있는 자를 적대시한다. 서로 속이고 속으며 서로 죽이고 죽는다. 세상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터이다. 사람들은 남을 짓밟고 부와 권세를 얻으려 하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불법과 비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때로 짐승보다도 못하다. 헤롯 대왕은 자기의 왕위의 안전을 위해 베들레헴 부근의 두 살 이하의 모든 어린 아기들을 학살했다(마 2:16). 이것은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보다도 더한 일이며, 이런 일이 인류역사에는 많이 있었다. 20세기의 2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의 나치 정권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 멸종정책을 폈고 약 6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또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혁명은 오늘까지 세계적으로 약 1억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추정된다. 그 가운데는 이북에서 일어난 학살과 처형들도 포함된다.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않는다. 지혜자는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어도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배려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본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너그러운 자가 되고, 그들의 실수와 잘못을 거듭하여 말하는 사랑 없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인다. 우리는 교훈과 징계을 주거나 받기 전에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먼저 지혜자가 되는 것이 필요함을 알고 지혜자 되기를 구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함으로 지혜자가 될 수 있다.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쓴다. 그러므로 잔인한 사자가 그에게 보내진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세상이나 사회나 단체의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합법적으로 세우신 권세에 복종하자. 우리는 결코 반역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런 자들과 동류도 되지 말자.
미련한 자를 만나는 것은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나는 것보다 못하다. 우리는 새끼 빼앗긴 암콤보다 더 못한 미련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13-16절, 악, 다툼, 오판, 미련함
[13절]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 . . .
본문은,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악으로 악을 갚는 것도 금하셨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도 바울도 비슷한 교훈을 하였다. 로마서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러한 행위는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본받는 것이다.
하물며, 악으로 선을 갚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그것은 배갑절의 악이다. 사람이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도 악한 일인데, 자기에게 선을 베푼 자에게 악으로 갚는 것은 얼마나 큰 악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에 대한 보응으로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사사시대에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도와 기드온의 아들 들인 그의 형제 70명을 죽이게 하였는데, 3년 후 하나님께서는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이 서로 싸워 아비멜렉과 많은 세겜 사람들이 죽게 하셨다(삿 9장). 또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배려로 7살에 왕위에 올랐던 유다 왕 요아스는 후에,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돌로 쳐죽이게 했는데, 1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람 군대의 침입으로 인해 크게 부상을 입게 하셨고 신하들의 모반으로 침상에서 죽임을 당케 하셨다(대하 24장).
[14절]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 . . .
본문은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말한다. 작은 싸움에서 큰 싸움이 나오며 사소한 다툼이 큰 다툼으로 확대된다. 담뱃불이 대형 산불로 번진다. 1914년 세르비아의 한 암살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시스 페르디난드를 쏘아 죽인 사건이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고 4년간의 전쟁으로 전세계적으로 군인들만 약 천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다툼은 육신적 죄악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0에서 사람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육체의 일들을 열거하면서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등을 말하였다. 야고보도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말하였고(약 3:14-15) 또 사람의 다툼은 육신적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약 4:1-2).
물론, 진리의 싸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근본적 진리들에 있어서는 일치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양보할 수 없으며 끝까지 싸워야 하고, 중요한 진리들에 있어서도 겸손과 인내로 변론함으로 일치된 생각에 이르기를 힘써야 하지만, 사소한, 지엽적, 혹은 불확실한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방의 견해를 존중하고 서로 관용해야 하며 무익한 논쟁이나 변론을 피해야 한다(딤후 2:23-24).
그러므로 진리의 싸움 외에는 싸움을 피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려면 겸손과 관용과 인내와 양보가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투었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양보의 정신을 발휘하였다(창 13장). 우리는 항상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전 1:10).
[15절]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 . . .
본문은,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은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이 흐린 것이며 판단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질 때 그러하기 쉽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자기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잘못을 옹호하기 쉽다. 그러나 바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유다 왕 아사는 우상숭배하는 모친을 정죄하여 그의 태후의 위를 폐하였다. 또 악한 자를 의롭다고 하는 자는 본인도 악한 자일 가능성이 많다. 악한 생각과 판단은 악에서 나온다. 사실상, 악인을 의롭다고 칭찬하면, 그로 회개치 못하게 함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또한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도 매우 악한 일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악평하며 비방하였다. 엘리야는 거짓 선지자들과 850 대 1의 싸움을 싸워야 하였고, 미가야는 거짓 선지자들과 400 대 1의 싸움을 싸워야 하였다. 예레미야도 거짓 선지자들과 싸웠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악하다고 비방하였고 그를 정죄하여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시게 하였다. 율법주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악하고 속이는 자, 돈이나 탐하는 자라고 비난하고 정죄하였다.
그러나 악인을 의롭다고 말하든지 의인을 악하다고 말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받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를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베푼 호의가 주께 베푼 것이요 그를 해친 것이 주를 해친 것이다(마 25:31-46).
[16절]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 . . .
본문은,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무지하다. 그는 진리를 깨닫는 마음,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 그러나 본문은 “미련한 자가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한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진리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나 사모함이 없으면서도 때로는 세상적 욕심으로나 형식적, 외식적으로 지혜를 돈으로 사려 한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마술쟁이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사람들이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주며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행 8:18-19).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책망하였다(행 8:20, 22).
돈은 자신이 지혜를 얻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돈이 있으면 시간의 여유를 조금 가질 수 있고 성경책이나 기타 신앙적 서적들을 살 수 있고 구제와 선행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돈으로 지혜를 살 수는 없다. 지혜는 돈을 가지고 얻을 수 없으나 돈이 없어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니다. 예배당은 입장권을 사서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여호와는 지혜를 주신다”(잠 2:6).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충만히 얻을 수 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는 악으로 선을 갚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자가 되자.
우리는 꼭 필요한 진리의 싸움, 그것도 근본적 진리의 싸움 외에는 가급적 싸움을 피하고, 겸손과 관용, 인내와 양보의 덕을 가지자.
우리는, 비록 긍휼과 용서의 마음을 가지지만, 깨끗한 양심과 말씀의 바른 지식을 통해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바른 판단을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며 성경말씀을 읽고 주야로 묵상하기를 힘쓰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얻자.
17-20절, 친구, 보증, 다툼, 패역
[17절]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 . . .
본문은,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고 말한다. 참된 친구는 어떤 때에나 사랑한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같이 어려움 당한 이웃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는다. 주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이 참 사랑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우리가 그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면 주님의 친구라고 하셨다(요 15:13-14). 우리는 주의 말씀대로 친구를 사랑하되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겠다.
형제는 위급한 때 곧 역경을 위해 났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서로 형제들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마 28:10).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형제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 형제를 미워하면 아직 사망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또 주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며 또한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요일 3:14-17).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투기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거나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고전 13:4-7). 참 사랑은 친구와 형제가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그를 돕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롯이 시날 왕과 그 연합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킨 가신들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가서 밤에 쳤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즉 약 240킬로미터 이상(서울에서 대구까지)을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을 찾아왔다(창 14:14-16). 그런 것이 참된 사랑의 행위이다.
[18절]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 . . .
본문은,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지혜 없다’는 원어(카사르 레브)는 잠언에 빈번히 나오는 말인데 ‘마음이 없다,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손을 잡는다’는 원어(토케아 카프)는 ‘손바닥을 친다’는 말인데 ‘서약하다, 보증하다’는 뜻이다(BDB). 손바닥을 치는 것이 옛날부터 보증하는 행위이었던 것 같다. 욥기 17:3,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保主)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 잠언 6:1,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손바닥을 쳤으면].” 잠언 22: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손바닥을 치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보증하는 자는 지혜가 없다. 지혜로운 자는 남의 보증을 서지 않지만, 지혜 없는 자는 남의 보증을 선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바이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연대보증 때문에 집을 잃거나 물질적 큰 손실을 입었다. 보증을 서는 것이 지혜 없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보증은 상대방이 무슨 사정이 생겼을 때에 대신 돈을 갚을 만한 충분한 물질적 여유가 있는 경우에든지, 아니면 보증한 금액만큼을 잃어버릴 각오를 할 경우에만 서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닌데 이웃을 위해 재정보증을 서는 것은 명예심이나 모험심에 불과하고 악한 자들에게 이용을 당하며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일이다.
[19절]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 . . .
본문은,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고 말한다. “죄과를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좋아하는 자니라”(NASB)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본문처럼 번역하는 것(KJV, NIV)이 문맥상 나아 보인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이다. ‘죄과’라는 원어(페솨)는 ‘죄’ 혹은 ‘[율법을] 어김’이라는 뜻이다(BDB).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교만하며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서로 다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다투지 말고 관용하기를 원하신다. 주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라고 했다(약 3:13-18).
또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이다. ‘자기 문을 높이는 자’라는 말은 자기 집을 돋보이게 하는 자, 즉 교만하고 자랑하는 자를 가리킨 것이라고 본다. 그런 사람은 파괴 혹은 멸망을 구하는 자이다. 교만은 멸망을 가져온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다.
[20절]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 . . .
본문은,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고 말한다. ‘사특한’이라는 원어(익케쉬)는 ‘정도에서 벗어남, 패역함, 비뚤어짐’이라는 뜻이다. 마음이 패역하고 비뚤어진 자는 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잠언 11:20, “마음이 패려한(익케쉬)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성도는 마음이 정직하고 순진하며 온유하고 선하여야 한다. 그는 나다나엘같이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요 1:47).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는 정직하며 의로운 자이어야 한다(시 15:1-2). 성경은 우리가 과거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죄악된 습관을 따라 살았으나, 이제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엡 4:22-24).
또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진다. ‘패역하다’는 말도 ‘사특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사람이 마음이 패역하면 말도 그러하다. 그는 윗사람이나 동료에 대해 기본적 예절을 갖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이웃에 대해 이해심이 없고 남을 비방하는 말을 쉽게 한다. 그는 재앙에 빠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복과 재앙은 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0:31은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성도의 선한 인격은 그의 말로 나타난다. 시편 15:3은 하나님의 집에 거할 자는 그 혀로 남을 비방하거나 헐뜯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9).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 형제 자매된 줄 알고 서로를 위하고 어려울 때 도울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형제가 되자.
우리는 남의 빚보증을 서지 않는 것이 좋다. 잠언 22:26은 “너는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대방의 진심을 알기 어렵고 또 아무도 미래의 경제여건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하고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화목하고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자.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의 비뚤어짐과 혀의 패역함을 버리고, 정직하고 순진하고 온유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는 자가 되자.
21-24절, 미련함, 즐거움, 뇌물, 지혜
[21절]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 . . .
본문은,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경외치 않고 섬기지 않으며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뜻에 순종치 않는 자이다. 그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악하다.
사람의 미련함은 타고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그러므로 다 미련하다. 육으로 난 상태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없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여 치료불가능하다(렘 17:9).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듯이, 악에 익숙한 인생은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다(렘 13:23).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교훈으로 어느 정도 경건과 도덕성을 지니게 되고 또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9:10). 잠언 29:15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련한 자를 낳은 자는 근심을 당하며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다. 미련한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이웃을 해롭게 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잠언 10:1,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잠언 17: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잠언 19:13,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모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자녀들의 미련함을 자신의 탓으로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될 것이다.
[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 . . .
본문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 양약은 병을 치료하고 건강 회복에 좋은 약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바로 그런 약과 같다. 그래서 오늘날 경험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이런 일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고 웃음 치료라는 말이 있고 억지로라도 웃으라는 조언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다. 슬픔과 근심은 죄로부터 왔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등을 포함한다(갈 5:22). 천국에는 더 이상 눈물과 고통이 없을 것이다(계 21:3-4).
그러나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심령의 근심이나 스트레스가 몸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질병인 우울증은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인생의 삶은 수고와 슬픔의 삶이 아닌가.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증거하였다(시 90:10). 주께서도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인간의 삶이 수고롭고 슬픔과 근심이 많은 까닭은 죄 때문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57:21). 또 심령의 근심과 염려는 뼈로 마르게 하고 몸의 건강을 해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심령의 참된 안정과 평안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
[23절]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본문은,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뇌물은 목적이 순수하지 않은 선물을 가리킨다. ‘사람의 품에서’라는 말은 뇌물이 은밀히 전달되는 것을 묘사한다. 뇌물은 다른 사람 보기에 떳떳지 못하고 양심에 거리끼므로 은밀히 주고받는다. 특히 뇌물은 판결을 굽게 한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명기 16:19,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공의는 법정의 판사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요구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다. 레위기 19:35-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시편 15:1-2,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편 106:3,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인간은 왜 불의의 길로 가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또 인간은 돈과 명예와 권세 등 세상의 욕심 때문에 불의의 길로 간다. 아간은 아름다운 외투와 금은을 탐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수 7:21), 가룟 유다는 은 30개를 위해 주님을 배신했다(마 26:15).
[24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 . . .
본문은,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끝에 두느니라”고 말한다.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다. ‘명철한 자’는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모두 명철한 자이다. 지혜는 그들 가까이에 있다. 명철한 자는 지혜를 앞에 두고 그것을 사용하고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다. 지혜는 그의 신중한 얼굴 표정에서도 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9:10; 시 111:10).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신명기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시편 25: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또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는 자는 늘 지혜롭게 살 것이다. 모세는, “너희는 [율법을]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고 말했다(신 4:6). 신명기 30: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미련한 자는 눈을 땅끝에 둔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지혜를 먼데서 찾는다. 그는 지혜가 없다. 그는 자신의 현재의 생활에 충실하기보다 이루지 못할 허영과 탐욕을 품고 항상 불만스러운 얼굴로 살 것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녀가 되지 말자. 또 우리의 자녀가 미련하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그를 위해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삶으로써 늘 평안함과 성령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자. 참 성도는 행복자이다.
우리는 뇌물, 곧 순수하지 않은 선물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항상 공의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자.
우리는 불성실과 허영과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지혜자가 되자.
25-28절, 미련함, 의인을 벌함, 말을 아낌
[25절]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아들은 불경건한 자, 곧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이며, 그 결과, 인격성나 도덕성에 결함을 가진 자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며 목사도 그러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교인들이 진리 안에서 행함을 볼 때 크게 기뻐하였다(요이, 요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 때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누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레 26장, 신 28장). 이와 같이, 우리의 자녀들도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과 형통의 복된 삶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여유와 가정적 행복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여 성경 읽고 기도할 줄 모르고 교회 생활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죄 가운데 산다면, 그들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건강에 문제가 생기며 가정에 문제가 생기며 사업이나 직장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내리실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에게, 특히 경건한 부모에게 큰 고통이 된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지옥에 들어간 부자는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세상에]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간청하였다(눅 16:28).
[26절]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니라.
본문은,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의를 명하시고 의를 장려하신다. 그러므로 의인의 의나 귀인의 정직함은 우리가 칭찬하고 기뻐하고 본받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못하고 악한 세상은 그렇지 못하여 의인을 벌하고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일들이 있다. 성경은 그런 예들을 많이 증거한다.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한 선지자 미가야의 뺨을 쳤고, 아합 왕은 그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하였다(왕상 22:24, 27). 유다 왕 요아스는 자기를 왕위에 오르게 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무리와 함께 꾀하고 그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다(대하 24:21). 므낫세 왕은 무죄한 자들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가에서부터 저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다(왕하 21:16). 악한 유다 방백들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토굴옥 어두캄캄한 방에 가두었다(렘 37:15-16).
신약시대에도, 악한 유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사도 바울에게 해를 많이 끼쳤다(딤후 4:14). 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을 영접하지 않았고 악한 말로 그를 부당하게 비난하였고 또 그것도 부족하여 형제들을 영접하지도 않고 영접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요삼 9-10). 이런 일들은 다 악한 일이다. 악인을 의로운 자처럼 용납하며 의인을 악한 자처럼 징벌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악한 일이다(잠 17:15).
[27절]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 . . .
본문은,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고 말한다. ‘성품이 안존하다’는 원어(카르 루아크)는 ‘심령의 냉철함, 침착함’을 의미한다. 원문은 “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끼고 명철한 자는 심령이 침착하니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끼고 그래서 말의 실수를 피하거나 줄인다. 말이 많으면 말의 실수도 많게 된다. 그러므로 잠언 10:19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20:19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며(약 3:2), 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훈한다(약 3:2).
명철한 자는 심령이 침착하다. 그는 심령이 조급하지 않고 경솔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는 침착한 말, 바른 말, 덕스러운 말을 한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언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또 지혜자는 유익한 말만 한다. 그러므로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말하며, 또 사도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9).
[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 . . .
본문은,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인 선과 사랑을 행치 않는 자이다. 미련한 자는 그의 말로 그의 미련이 드러나므로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잠잠한 것이 낫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울 것이다.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주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영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사람은 말에 온전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약 3:2).
지혜자는 덕스러운 말을 한다. 성도는 사람 앞에서 그를 충고하고 뒤에서 그를 위해 기도한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한다(엡 4:29).
그러나 미련한 자는 악한 말을 한다. 그는 남을 비난하는 말을 잘 한다. 성도가 사람 앞에서 그를 충고하고 뒤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반면, 미련한 악인은 사람 앞에서 친절히 인사하고 뒤에서 그를 비난한다. 그는 덕스럽지 못하고 남의 인격과 명예에 파괴적인 말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자. 또 우리의 자녀들을 지혜로운 자녀로 키우자.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말씀을 힘써 가르치자.
우리는 의인을 칭찬하고 본받고, 악인을 책망하고 경계하자. 구원받은 성도들은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요삼 11).
우리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가 되지 말고 말을 아끼는 자가 되자. 또 우리는 심령의 조급함과 경솔함을 버리고 침착함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덕을 세우는 지혜로운 자가 되고, 또 지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차라리 잠잠해야 한다.
[열왕기상 19장 은혜로운 설교말씀] 엘리야의 도망(왕상 1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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