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고린도전서 9장 주일설교말씀] 사도는 복음으로 살리라(고전 9:1~27)

기혼샘 2021. 9. 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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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린도전서 9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사도는 복음으로 살리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목: “사도는 복음으로 살리라” (고전 9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고전 9:1~27

요절: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 것을 정하셨느니라...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고전 9:14, 16)

주제: 사도는 복음으로 살며 평생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 위해 일사각오!

 

레 23:34-44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35) 첫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 이레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37)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열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번제와 소제와 희생제물과 전제를 각각 그날에 드릴지니 (38)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제물 외에 또 너희의 모든 자원 제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39)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이 말씀대로 지금도 유대인들은 초막절 기간에는 집 마당이나 거실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 살면서 40년 광야교회 시절을 체험하며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추석기간에 우리는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감사의 제목을 나누며 한해 농작물을 주신 은총과 기쁨 가운데 교제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고린도전서 9장을 통해 사도의 복음에 대한 임무에 대해 묵상하겠습니다. 복음을 위해 사도는 모든 것을 올인(all in)하며,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고 매사 절제를 해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사도(사역자)의 자기 부인(고전 9:1-18)

 

1 내가 사도가 아니냐? 내가 자유로운 자가 아니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보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주님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분명히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너희는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의 봉인이니라. 3 나를 시험하는 자들에 대한 내 대답은 이것이니라. 4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느냐? 5 우리에게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게바와 같이 자매 곧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느냐? 6 나와 바나바만은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느냐? 7 어느 때고 누가 자기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가느냐?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의 열매를 먹지 아니하느냐? 누가 양 떼를 먹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아니하느냐? 8 내가 사람으로서 이것들을 말하느냐? 율법도 같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기록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해 염려하시느냐? 10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그것을 말씀하시느냐?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나니 밭을 가는 자는 소망 중에 갈며 소망 중에 타작하는 자는 자기의 소망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니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들을 거둔다 해도 그것이 큰일이냐? 12 다른 이들이 너희에 대한 이 권리에 참여하거든 하물며 우리는 더 그리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참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로막지 아니하려 함이라. 13 거룩한 것들에 관하여 섬기는 자들이 성전에 속한 것들로 사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제단과 함께 헌물에 참여하는 자들임을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 것을 정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런 것들을 하나도 사용하지 아니하였고 또 내게 이같이 해 달라고 이것들을 쓰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죽는 것이 누가 나의 자랑하는 것을 헛되게 만드는 것보다 나으리라. 16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17 내가 자원하여 이 일을 하면 보상을 얻으려니와 내 뜻에 반하여 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분배 사역을 내가 맡았노라. 18 그런즉 나의 보상이 무엇이냐? 진실로 내가 복음을 선포할 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없이 선포하고 이로써 복음 안에 있는 나의 권리를 남용하지 아니하는 것, 그것이로다.

 

1-2절. 바울은 사회적으로 종(노예)의 신분이 아니고 로마 시민권자며 자유자입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자유자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apostle)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보았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은 고린도교회에서 증거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세워 복음의 전파자로 사용하신 구체적 한 증거가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사역으로 맺혀진 열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직은 주님 안에서 그 교회와 교인들에 의하여 확증됩니다.

 

3-5절. “나를 시험하는 자들에 대한 내 대답은 이것이니라.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느냐? 우리에게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게바와 같이 자매 곧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느냐?”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을 트집잡는 자들에게 대답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난하려면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모든 음식이 다 깨끗하며 감사히 받으면 버릴 것이 없지만(딤전 4:4), 그는 다른 성도의 유익을 위해 먹고 마시는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였습니다. 결혼 문제도 그러합니다. 다른 사도들과 베드로(게바)는 결혼하였고,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주님의 형제들’이란 예수님의 육신적 동생들 즉 야고보(야고보서 저자), 요셉, 시몬, 유다(도마, 유다서 저자) 등을 말합니다(마 13:55). 결혼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독신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좀 더 복음 사역에 자유롭게 전심전력하기 위해서이었습니다. 가족이 있으면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는데 전념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포기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것입니다.

 

6-7절.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복음 사역에만 전념하고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에 자비(自費)로 군인이 되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의무적인 군 복무도 의식주와 용돈(월급)을 받습니다. 세상에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 열매를 먹지 못하거나 양떼를 기르고서 양떼의 젖을 마시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일꾼이 먹을 것 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다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히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필요한 돈을 벌어 자비량 선교(tent-making mission)를 하였습니다(행 18:1-3). 당시 천막 만드는 직업은 군용 텐트나 왕실 혹 고급 공무원들의 임시 숙소를 짓는 일로 수입이 좋았다고 합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같은 직업을 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 평생 복음의 동역자로 일했습니다(행 18:3).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다”고 간증했습니다(행 20:33-35).

 

8-10절. 9절에 인용한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는 신명기 25:4입니다. 소를 먹이면서 일을 시켜야 하듯이,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야 합니다. 교회가 전임 사역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하고 생활비를 드리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회로부터 사례비(compensation)를 지급 받아야 합니다. 주급(weekly salary)이나 월급(monthly salary)이란 일을 다 마친 후 주말이나 월말에 지급하지만, 목회자 사례비는 당회나 제직회의 재정 담당자가 매월 첫날 목회자에게 한 달 목회를 잘해 달라고 사례비를 드리면, 목회자는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목회자가 생활비가 없어 걱정하면 목회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처럼 결혼도 하지 않고 정기적인 사례비도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전적으로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도는 목회자들에게 사례비와 거주에 대한 재정을 책정하여 지급하라고 권면합니다. 10절에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나니 밭을 가는 자는 소망 중에 갈며, 소망 중에 타작하는 자는 자기의 소망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니라.”고 예를 듭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사례비를 전적으로 목회 사역과 복음을 전하는데만 사용해야 합니다.

 

11-12절.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들을 거둔다 해도 그것이 큰일이냐?” ‘영적인 것’은 복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육신의 것’은 의식주에 관한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지만, 육신의 것은 일시적인 동안만 유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물질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영원한 진리를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가치를 안다면 그 진리를 연구하고 전하는 주님의 종들에게 하는 물질적 필요의 공급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2절에서 그는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 자유와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보화입니다. 인생의 참 가치, 참 기쁨, 참 행복, 참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이 복음과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그 복음이 장애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현세적인 것을 양보하고 그것을 사용할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제한한 것입니다.

13-14절.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제물의 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부분은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레 2:3; 7:14, 31, 32).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10:9-10). 주의 일꾼들이 일터에서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1960년대 용문산 출신의 전도대원들이 전국을 다니며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그중 한 청년(전도인)이 저희 가정에 오셔서 한 달 머물면서 열심히 어린이 전도를 하였습니다. (전도)북을 치고 사탕을 나눠주고 아이들에게 동화, 성경이야기를 들려주고, 이 아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1-14) 손님 대접을 극진히 하신 어머니께서 이 청년을 한달 동안 섬기시며 숙식을 제공한 일을 보고 자랐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분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선교사님들, 전도사님들, 목회자들, 신학생들을 돕고 응원하고 후원하면 나도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사역에 동역하는 것입니다. 14절에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 것을 정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15절. “그러나 내가 이런 것들을 하나도 사용하지 아니하였고 또 내게 이같이 해 달라고 이것들을 쓰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죽는 것이 누가 나의 자랑하는 것을 헛되게 만드는 것보다 나으리라.” 바울은 이런 당연한 권리들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식주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의식주 문제나 결혼에 있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절제하고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16절.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복음은 영과 혼과 몸 즉 전인적인 구원의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천국복음을 전하셨고 많은 기적과 말씀으로 자신을 증거 하셨고, 결국 우리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죄인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가장 귀한 소식이며 전도와 선교 및 목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일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부득불 할 일, 즉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시고 명하신 일이었습니다. 나도 복음 때문에 사망에서 생명을 얻고, 지옥 갈 운명이 천국에 갈 축복을 받았기에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가 마땅히 해야만 할 의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여호와의 성전 총감독인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장차 멸망하리라는 예언을 듣고 그를 때려 목에 나무 고랑을 채워 가둡니다. 바스훌과 그의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권유하시는 대로 파멸과 멸망을 선포함으로 인해 조롱당하며 비방받고 모욕거리가 되는 것이 괴롭고, 여호와를 선포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붙는 것같이 답답해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절).

 

17-18절. 모든 성도가 다 의무적으로 전임 전도자나 풀타임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의 일반적 의무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경건하게 살고 성경 말씀대로 죄짓지 않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또 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성도 중 누가 육신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원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전임 전도자가 된다면, 그것은 상을 얻을 일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성도의 의무 이상으로 자신을 주님께 드릴 때 분명히 천국의 상을 주실 것입니다. 단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바울은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직분’이라는 원어(오이코노미아 οἰκονομία)는 ‘임무’라는 뜻인데 그는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복음 전도의 의무 아래 있고, 그 직분과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님께로부터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등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목사와 장로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보살피는 임무를, 권사는 교인들을 격려, 권면하는 임무를, 집사는 교회의 재정 봉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18절에서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마땅한 의무이므로 거기에서 상을 기대할 것은 없습니다. 단지, 그의 상은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했고 그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데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의무를 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상을 기대할 것이 없겠지만, 의무 이상을 행했을 때, 즉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행했을 때 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정당하지만,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자신을 절제하였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는 스스로 생활비와 선교비를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직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성도들에게 자기 절제의 본이 됩니다.

 

2.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고전 9:19-23)

 

19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21 율법 없는 자들에게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찌하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것을 행함은 너희와 함께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자 함이라.

 

19-21절. 사도바울은 종이 아니고 자유인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종처럼 처신하였습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는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 처신하였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마치 자신도 율법 아래 있어서 율법의 의무를 지키는 자인 것처럼 처신하였습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때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들을 인해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는데, 그 까닭은 사람들이 그의 부친이 헬라인인 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행 16:3). 그러나 바울은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에게는 비록 그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지만, 율법 없는 자같이 처신하였습니다. 디도는 할례를 강요하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22-23절. 그는 약한 자들을 대할 때 자신도 약한 자인 것처럼 처신하여 그들을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진리와 의안에서의 처신이어야 하며 비진리와 악을 포용하는 처신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의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악을 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리와 의 안에서, 즉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형제자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비웠고 현실의 환경에 최대한으로 자신을 적응시키려 하였습니다. 바울의 전도 원리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이었습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것은 구원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심지어 포기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최대의 소원인 복음의 일, 곧 전도하고 선교하며 구원의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립시다.

 

3. 우승하려고 분투함(고전 9:24-27)

 

2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26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4절. 알렉산더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유대인들에게 스포츠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달리기 경주에서 많은 사람이 출발점에서 출발 신호를 받고 달리기 시작하지만, 1등의 상은 한 명에게만 돌아갑니다. 바울은 이런 스포츠를 천국을 향하는 경기로 비유하며 권면합니다. 메달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이 달린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치 달리기 경주와 같습니다. 물론 신앙의 경주에서 상 받는 자가 한 명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상을 얻기 위해 달리는 경주자들처럼 우리도 상급을 기대하며 힘써 달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든 성도는 경주자처럼 열심히,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이나 금메달을 목에 거는 운동선수들의 삶이 그러합니다. 시간을 아끼고 육신적 즐거움을 절제하는 자만이 그런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 생활도 같습니다. 사실 영적 생활은 더 고상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경쟁은 썩어질 면류관을 얻으려는 경쟁이나, 영적 경쟁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는 경쟁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혼의 구원(Receiving the end of your faith, even the salvation of your souls. 벧전 1:9)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롬 6:22). 하나님께서 주시는 존귀와 영광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썩는 것이지만, 영생은 영원히 썩지 않을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면 시간 절제, 돈 절제, 힘 절제, 의식주 절제, 음식 절제, 잠 절제 등 절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26-27절. 스포츠에는 법이 있습니다. 법대로 경기를 해야 상급을 받습니다. 달릴 때는 자기 트랙 내에서 달려야 하고, 권투 할 때는 정확히 펀치 해서 상대방을 맞혀야 하고, 축구나 농구에서 골을 골대에 넣어야 하며, 야구나 골프도 공을 정확히 맞춰야 합니다. 사람은 열심히 사는 것이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대로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자는 단순히 열심히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태권도나 유도에서 싸우는 자가 상대를 치지 않고 허공만 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전심전력합니다. 성도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의 욕망대로 따라가면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자라 할지라도 죄 가운데 빠져 산다면 그는 남은 구원해놓고 자신은 버림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상적 경고입니다. 참으로 중생한 자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고는 성경에 종종 나오고 또 필요한 경고입니다(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러므로 바울은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임무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범사에 절제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편안하고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며 몸의 욕구대로 살면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앞에 놓고 자신을 절제하고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전서 9장은 바울이 자신의 독신 생활과 손으로 일한 생활을 들어 우리의 절제 생활을 권면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독신(獨身)의 길을 택했고 또 손으로 일하면서 전도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제한하였고 심지어 포기했습니다. 또 그는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비웠고, 자신을 현실의 여러 환경에 최대한 적응시켰다. 물론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그러하였습니다. 스포츠 선수가 이기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며 힘써 달리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돈을 주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드리며 모든 일에 절제하며 영생과 천국을 향해 힘써 달립시다. 아멘.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분을 주셨고 성도로 불러 주셨으니 저희들로 하여금 복음으로 살게 하시고 죽는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매일 복음에 합당하게 살게 하시며 절제하고 법대로 경주하며 끝까지 인내하여 열매를 맺게 도와주옵소서. 이번 추석(초막절, 장막절)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복음 전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사기 2장 히브리어 강해] 사사에게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삿 2:14-23)

 

[사사기 2장 히브리어 강해] 사사에게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삿 2:14-23)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사기 2장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사사에게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패역하자 하나님은 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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