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설교 성경공부 중에서 사도적 설교와 그 개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목회자에게 설교는 중요합니다. 물론 성도들에게도 설교는 중요합니다. 복음적 설교를 들어야 성도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좋은 설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무던히 연구해야 합니다. 성경과 씨름하지 않으면 좋은 설교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시간은 이상훈 교수님이 사도적 설교와 개발에 대해서 작성하신 글을 통해서 목회자들이 어떤 설교를 만들어야 할 것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적 설교와 그 개발
이 상 훈 교수
(서울신대)
서 론
성실한 신앙과 교훈 신학을 수용하는 기독교의 지성은 신앙과 규범을 현대정신에 의해 홍수처럼 나오는 오늘의 수필 신학 위에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사도의 증언 위에 확실히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당초부터 기독교 신앙은 보편적 종교성이나 인간의 공통적 심성인 종교적 본능이나 그러한 인간의 갈구가 축적되어 창출한 종교적 자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연인의 심성을 압도하고 모든 자연인의 지성을 심판한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사건이 그 출발이었기 때문입니다.
본 론
현 세계의식의 거대한 흐름
소위 초대교회 이후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크리스천들은 오늘의 세속 철학과 현대 의식으로 재조명한 여러 형태의 세속 신학의 선전을 너무나 많이 접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의 세속적 지성이 경험론적 실증의 유일한 방법론이 되어 비평하고 분석한 합리주의의 종교는 하나님의 초월적 권위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구원과 영생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해방과 자유와 사회정의가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전대미문의 도전을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 앞에 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 의식이 매스컴을 주도하고 이런 자유로운 비평적 방법론을 현대 교육의 핵으로 시행하는 강의실에서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여 내일의 세대를 그들에게 위임하려고 하는 현대 교육의 거대한 흐름을 비평 신학자 존 나이스피트는 ‘메가트랜드’(Mega-trend)라고 했습니다. 메가톤의 메가(Mega), 흐름이라는 트랜드(trend)입니다.
현대인의 의식이 당당하게 대하처럼 흘러가고 있는 그 속에 우리 목회자는 가령 교회성장이 양이 양을 출산 학적으로 출산하는 성장 원리에 기대한다거나 교회성장이 관광학 개론의 이론에서 좋은 장소에 보기 좋은 건물을 호텔처럼 세워 자기 과시를 할 필요가 있다거나 큰 군중을 도식적으로 초 조직함으로 능률화하여 효율성이 증대되는 힘의 논리를 교회성장학에서 활용하여야 한다고 하는 등등의 세미나 교육은 나름대로 현장교육의 개선책은 되지만 작금의 도도한 세속 정신과 가치론에 의한 민중 의식화의 도전 앞에서는 너무나 임시적이고 잠정적이고 실적 신학의 방법론이 아니냐는 심각한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1980년대에 성서와 비교될만한 베스트셀러인 ‘메가트랜드’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한 존 나이스피트는 오늘 우리가 “제3의 자각 또는 제3의 혁명기에 직면하고 있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종교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에 이어 오늘의 의식혁명에서 오늘의 교회가 그 도전의 파도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위기에서 그러한 기회를 다시 한번 원천적 기독교의 에너지인 사도적 증언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적 증언의 원형적 이해가 절대적 요구이면서 동시적으로 초대교회 역사적 이해가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증언의 막중한 의미는 그들만이 예수의 공생애의 동참자요, 역사적 예수의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던 각별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들이 예수 지식과 증언의 내용과 그들의 신앙 규범의 성격에 관한 역사적 이해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지만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역사를 집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교회 역사의 중심적인 존재였던 12 사도에 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놀라운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적 이해가 용이하지 않은 이유
첫째로 사도들은 ‘순수한 역사’를 집필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과거 역사를 회상적으로 저술하려는 의사보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는 역할에 전심했습니다. 상술한 순수한 역사의 집필은 니케야 교부 들 시대에 와서야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의 집필 동기 역시 일반 역사의 문서 가 아닌 기독교 변증의 문서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어떻게 종교의 구조에서 벗어나 이방인 선교의 거시적 안목을 지닌 세계 교회가 어떻게 출현했는가에 대한 설명서입니다. 만일 저자 누가에게 질문을 했다고 하면 그가 초대 교회의 막중한 역사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스승인 바울의 변호를 의도한 것이 결과적으로 초대교회의 유일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둘째로 초대교회 시대는 복음서 집필과 바울의 편지 등이 집필된 이후에 다시 침묵기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기독교의 활동이 터널을 통과하는 비유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한 현상은 복음서나 신약의 편지들이 복음이 전도된 초기의 요구에 응한 문서들이고, 예수의 재림이 매일매일 뜨겁게 대망되는 역동적인 초기의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예수의 재림이 가장 강력한 주제였기 때문에 매우 가까운 미래를 지향한 교류와 질서에 관한 이론의 체계가 아직은 요구되지 않았으며 그런 자각이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사정으로 보아 바울의 설교 주제는 긴박한 예수의 재림이었고 그 강조가 너무 강력하여 바울이 그것을 전한 후에는 일손을 놓고 하늘만 쳐다보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연로하여 죽은 연장자의 구원을 걱정하는 가정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코 역사의 기록이 필요하다고 아무도 언급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셋째로 초대교회 사도들의 기록이 희소한 까닭은 사도들이 전기문학의 제목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활동을 제보해 줄 역사적 기록은 아주 적습니다.
오늘의 안목에서 평가하면 사도들은 초대교회의 건립자요, 창립자입니다. 초기 신앙공동체의 맥락에서 사도들의 위치는 교리와 교회의 감독자이기보다는 성령이 충만한 예수의 증인이며, 아직 조직이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전도자의 유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 때 이방인이 구원의 권속 안에 수용되는 최초의 교리도 거기에 모인 전원의 동의에 의해서 성령과 우리가 결정한 사례일 뿐(15장 28절) 아직 고위층의 권위라는 교회론적 구상은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들은 아직 조직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전도자이고, 교회 정치가는 아니었습니다. 사도들 의 이야기는 전도자의 이야기일 뿐 아직 교회 역사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적으로 기원 69년 이전 예루살렘 안에 머문 유대인 교회의 활동은 거의 아는 바가 없고, 70년 예루살렘 몰락 이후에는 사도들이 뿔뿔이 흩어져 각처에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맛디아는 현대의 소비에트 흑해 동안의 아르메니안 지방에서 순교했고 도마는 인도에서, 요한은 소아시아에서 마가는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을 지낸 후에 구주의 오지의 고을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넷째로 당신의 로마제국이나 희랍 문화에서는 아직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취급이 되어야 할 사실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초기 당시 역사적 관심은 제왕과 정치가에 관한 일이며 갈릴리 어부들이 전한 갈리리 목수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요세푸스도 예수의 형제 야곱의 순교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기독교 자체 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젊은 사도의 기록을 빼놓고는 별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바 없고 사도 시대가 훨씬 지나가서야 눈을 돌렸습니다. 실제적으로 12 사도의 행적과 영향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언급은 헤게시프스나 유세피우스 같은 조직된 교회 지도자의 시대에 가서야 가능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몇 사람을 예외로 하고 평범한 존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누가 쓰겠습니까?
그럼에도 현대 지식은 초대교회가 있었던 그 시대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로마 역사에 관한 연구가 지금에 지극히 활발하여 새로운 고고학적 고증에 의한 많은 지식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런 활발한 로마제국의 역사적 연구 속에서 사도들이 생존했던 그 세계의 정황에 관한 지식이 마치 엊그저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런 활발한 역사탐구로도 사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방법론적으로 ‘무엇이 아니다’ 하는 만큼이나 ‘어떠했다’고 하는 상당히 정확한 유추를 해낼 수는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시대의 로마는 비교적 안정되어 시민들의 유동이 활발하였고 광범한 문화의 교류가 가능한 환경이었습니다. 한 예로 고린 도에서 바울이 써 보낸 로마서를 보면 아직 바울이 방문한 일이 없는 로마시 에는 이미 바울을 잘 아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그 편지 속에서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주전 60년에 나온 시세로의「여행기」에는 주전 50년에 시저 가 영국을 침공한 사실이 그 사회가 안으로는 광범위하게 안정되었고 또 열려있는 역동적 사회였음을 알게 합니다.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로마제국은 한 언어 한 통치자에 의한 질서, 구석구석 도로가 발달한 방대한 영역으로서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인도에서 서반아까지 도로망이 있어 불편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주전 44년에 시저가 이미 정복한 서반아의 선교를 소망한 적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결코 무리가 없는 생각입니다. 사도시대는 그들의 선교활동이 성공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문명, 통일된 판도, 활발한 교통수단, 하나의 언어, 이 네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활짝 열린 무대 위에서, 그리고 그 너머의 변경으로까지 힘차게 뛰는 사도들의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역사가는 기독교 자체를 거의 간과해 버렸습니다.
다섯째로 사도 시대가 지난 후에는 하나의 기독교가 희랍과 로마로 분리되었습니다.
사태가 크게 변화되어 소위 로마제국 자체가 로마와 바잔틴으로 분리되면 서 동방기독교, 서방 기독교로 나뉜 교회는 서로 사도적 권위와 정통성을 시비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교회는 사도들의 유물, 유품 등의 수집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때 콘스탄틴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소위 12 사도의 교회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고 사도들의 거룩한 뼈들을 수집하여 한 곳에 묻은 공동묘지를 터로 정하여 그 위에 엄청나게 큰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콘스탄틴 대제의 유명한 12 사도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사도 안드레, 사도 아닌 사도적 권위의 지도자 누가, 디모데의 유골은 입수할 수 있었지만 바울과 베드로의 뼈는 특별히 안치될 방만 준비했을 뿐 그대로 로마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콘스탄틴의 꿈은 두 줄로 12 사도의 유골을 안치하고 그 중심에 자기의 무덤이 위치하도록 설계했었지 만 결국 자기 무덤 이외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고 유세피우스의「콘스탄 최후의 날」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그의 꿈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사도들의 유골을 찾기 시작한 노력의 출발점이 되어 소위 가톨릭 교회의 유품을 정중히 여기는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교회와 중세의 정치 권력자에게 더욱 극단화되어 고가를 지불하여 뼈를 얻고 유품을 얻는 미신의 요소가 불 필요 악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사도 연구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지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동․서 구교가 성유골에 대한 경쟁을 덜 할 뿐 아니라 교황 바오로 경우에는 그가 로마에 안치하여 온 안드레의 뼈를 도로 안드레의 순교지인 희랍에 반납하여 동․서교회의 화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여섯째로 사도들의 선교 동기의 이해가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사도 연구에 있어서 부동의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외 없이 전원이 마태복음 28장에 기록이 된 대로 예수님의 위대한 선교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찾아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이야기 다시 말해 사도들의 역사는 주로 초대교회 의전도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도들은 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전도는 서민이나 왕, 모두에게 차별 없는 전도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스스로 일을 하여 자급하는 사람들로, 유급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중 바울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할 수 있는 대로 더 멀리 찾아가 남이 이미 세운 터 위에 세우지 않았다고 하였거니와 대체적으로 모든 사도들이 그와 같이 거의 단독 개척의 전도를 했습니다.
일곱 번째로 그들에게는 뚜렷한 사도적 선교전략이 있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경우 더욱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모든 사도들에게는 비상하고도 지극히 현명한 선교전략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언제나 우선적으로 상역로상에 위치한 큰 도시를 찾아갔습니다. 그런 후에 그 중심에서 다시 사도의 제자들이나 결신자들을 도시의 외곽으로, 그들의 거주지로 보내어 그 자리에 교회를 설립하게 하였고 그렇게 설립된 교회들은 다른 교회를 설립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이 활용한 방법은 전략적으로 ‘중심’과 ‘분산’이라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교의 근거와 복귀라는 방법만을 일삼는 현대의 선교행위, 선교기구, 선교회와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당시의 사도들은 ‘교회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도들이 세운 것은 교회 회중 또는 교회 신자였습니다. 많은 현대의 선교활동은 교회와 분리되어서 교회로 하여금 선교하도록 다시 움직이는 데 힘이 듭니다. 아니면 밖에 있는 선교기구를 교회 안에 끌어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결신자들로 하여금 즉각 교회가 되게 했다는 그 점을 현대의 전도학이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근래의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가운데 태국으로 진출한 모든 선교사는 지금 전부 LA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출국한 선교사는 전부 미국 가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이민의 변형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규범적인 가치를 거기에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5절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이 말씀은 그의 신학적 요약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했다는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성’ 소위 세인트(saint)라고 하는 머리글 칭호를 로마교회와 희랍 교회가 사용하기 시작한 후에 많은 종교 위인들에게 이 관례를 적용함으로써 사도들의 실상보다 지나치게 위대하게 숭앙하는 점도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신약의 정전으로 매듭이 끝나기 전에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 새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계 21:14)고 말한 본문이 있습니다. 이미 기원 1세기 후반에 가롯 유다가 떠난 자리에서 맛디아가 초대교회 전체의 인정 속에서 사도로 있었다는 증언으로 중시되는 이 본문으로 미루어 볼 때 서서히 12 사도의 행적과 그 의미성이 새 예루살렘의 기초로서 평가되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12 사도의 요건
전통적 이해대로 예수가 12 사도를 택한 것이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상징적 의미 때문일까요? 예수 자신이 새로운 영혼의 대제사장으로서 직분을 회복시키기 위한 열세 번째의 지파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보면 베드로의 사도적 모습을 예수의 구속적 공생애에 관한 동반자적 지식과 함께 예수의 부활에 관해 우리로 더불어 증거 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규범에서 맛디아가 피선되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그의 회심 이후에 예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사도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지만 그 많은 수고와 또한 표적과 크신 능력에도 불구하고 12 사도로 용납이 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는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경고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12 사도의 관계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유대주의 속에 한 갈래의 운동이었던 것이 바울의 부신 활동으로 설명되는 바와 같이 어떻게 지중해 연안 도시의 기독교가 되었으며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50년이 못되어 로마제국의 전 판도를 굴복시키는 세계의 종교가 되었는가의 이해를 위한 단서가 될 유일한 초대교회의 역사문서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어떻게 유대적 기독교의 핵심에서 성장하여 배타적인 유대주의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고 이방인 기독교가 되었는가의 변증인 것입니다. 결국 사도행전은 어떻게 베드로 중심의 유대인 기독교에서 바울 중심인 세계의 기독교로 발전했는가의 해명입니다.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베드로도 바울과 동시대적 상황에서 로마에서 선교했습니다. 그 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이 큰 이유도 되지만 제1세기 이후에 실제적으로 유대인 사회 안에서는 기독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이 명백히 하는 바는 기독교가 유대인 사회의 구조와 맥락 안에 서, 한 갈릴리 목수에서 시작된 메시아 운동이었지만 다른 우수한 종교적 에너지인 바리새나 사두개나 에세네파 같이 유대주의와 유대인 배타적 감정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로 한 신앙 운동이 왜 아니었는가의 변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도행전으로 완벽한 초대교회 역사를 찾아내려는 기대는 실망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신앙의 뜨거운 정열로 귀국한 당시 14개 지역의 모든 교회와 그들의 성장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친구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의 처형 시에 북부로 도주하여 짐작컨대 흑해 연안인 남부 코카서스에 정착했다는 추측은 있지만 그 후 그들의 소식과 함께 당시 흑해 연안의 기독교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또한 제자 도마가 선교한 인도의 기독교는 1950년대에 피어스 집회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에 데오빌로 성 도마 교회의 감독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바로 예수의 제자 도마가 자기 교회 뒷동산에서 순교했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도마가 인도에 세운 교회에 대해서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마가가 훗날에 돌에 맞아 순교했다는 구주 대륙 내부의 기독교나, 베드로가 로마로 돌아와 순교하기 전에 바울이 서반아로 가기를 열망했으며, 베드로가 영국의 도버해협을 건너가 지금의 런던 남쪽 지방까지 찾아와서 로마 군단의 군종 장교가 되어(믿거나 말거나) 전도하다가 돌아갔다는 전설은 있지만 기록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너무나 한정적이며 초대교회 전체의 역사 기록이 아니라 구체적인 특정 목적의 변증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사용하셨지만 그다음 바울을 주로 사용하였고 베드로만이 아니라 바울의 역사 안에 소개된 바나바도 다시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수리아의 안디옥 모범교회 소식도 뒤로 탈락하여 언급이 없고 바울 자신은 죄수의 모습으로 58년에 로마에 도착하였으나 처절한 네로 박해에 대한 언급도 없이 사도행전 28장 30,31절을 끝내고 있습니다.
저자의 집필 동기
누가는 동쪽 변경에서 시작한 무명의 예수 종교가 어떻게 세계의 기독교 즉 이방인의 기독교로 출현했는가의 변증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므로 12 사도의 사역은 거의 베드로의 활동으로 대표되며 사도행전 안에서 사도 요한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밖에 사도는 언급이 없고 바울과 바울의 일행인 디모데, 누가, 바나바, 실라 등으로 연결되는 활동에 초점을 맞추다가 바울의 로마 도착으로 기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갑자기 기록을 끝내는 것은 저자인 누가 자신이 누가복음의 동일 저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또 하나의 저서인 누가복음의 테크닉과 패턴대로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 기록을 드라마틱하게 상세히 기록했다가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절정으로 제시한 그가 사도행전에서 276명의 2주간의 극적인 난파를 극적으로 전개하면서 독자의 숨결이 가장 높아졌을 때 가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클라이맥스가 없이 막을 내리는 아쉬움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저자 누가가 특정적으로 전지한 의도는 초대교회 역사에 이미 이방 기독교가 유대적 기독교를 극복하고 주도를 잡았다는 변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방 기독교의 우위는 역사적 변증법의 이유에서 온 발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도들이 그와 같이 순종한 사실임을 저자 누가는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의 증언과 변증 신학에 의하면 근래에 한국의 어느 부흥사가 갑자기 그리스도 예수 대신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유대주의적 기독교의 표현으로 돌아가는 것이 원초적 기독론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은 성서신학을 역으로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최근에 이르러 사도행전의 집필 목적이 저자 누가의 변증 신학적 동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동기 중에는 뜻밖에도 예루살렘을 고수하고 유대주의적 기독교로 머물러 있으려고 한 원사도들의 이방 선교에 대한 소극 주의를 누가가 사도 바울의 성공적인 이방 선교를 통해 계몽하고 시정하려 한 의도가 있었다는 이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내용
이 책은 누가가 누가복음과 함께 데오빌로에게 헌서했습니다. 그 헌서의 이유가 이미 기독교에 관한 지식이 있는 데오빌로에게 보완적 지식을 알도록 하려 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확한 번역을 위해 성실한 헬라어 번역의 R.S.V. 를 인용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That you may know the truth~”이미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 내가 더 알게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오빌로는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누가는 무엇을 더 추가적으로 그에게 제시하려고 했을까요? 데오빌로는 유대적 기독교에 대하여 알고 있지만 누가는 자기 선생인 바울을 모델로 한 이방적 기독교에 대해서 추가하려고 한 것입니다. 보완적으로 알아야 할 진상에 대하여 누가복음보다는 사도행전에 더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내용이 초기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주의적 기독교의 소극적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강력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어떻게 이방인 선교에까지 확대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변증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땅끝까지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후에도 25년간을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던 사도들의 소극 주의가 변화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큰 핍박을 받아, 사마리아 너머로 흩어질 때에도 누가는 8장 1절에 사도가 아닌 평신도의 움직임이라고 규정짓고 있고, 베드로가 성령으로 고넬료의 집으로 인도되어 예수를 증거 했을 때만 하여도 소심적으로 행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후에 사도행전 11장 2, 3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것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에 할례 주의 기독교 지도자로부터 심하게 비판을 받았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최초로 예수를 믿는 공동체를 ‘크리스천’이라고 붙인 교회는 수리아의 안디옥 이방인 교회였음을 누가는 기억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최초의 종교회의에서 이방 형제를 교회 공동체 안에 수용하는 결의 때문에 유대주의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가 교회 일치론의 차원에서 또 하나의 난제가 되어 사도 바울이 말년에까지 고심하는 이유가 되었고 심지어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찾아가면서도 안심이 안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난제(교회 일치론)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의 다원화와 함께 여전히 잘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의 교파가 200여 개라고 합니다. 어렵습니다.
사도행전의 깊은 동기를 추구하는 물음에 관한 해결의 단서로서 초반부에는 베드로가 중심적인 사도였으나 후반부에서 대단원까지는 바울의 행적으로 전개하고 있어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이방인 선교과 세계교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새로운 이해를, 이 문서를 통하여 데오빌로와 유대적 기독교도를 계몽시키려는 목적과 동기가 있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행전의 집필 목적과 동기는 저자 누가의 바울 신학에 근거한 변증론이었다는 해석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증 동기와 함께 누가는 바울의 이방인 전도의 실제적인 성공사례를 소상히 설명함으로써 성령의 길잡이가 지금에 와서는 이방인 사회로 전진하여야 할 구속사를 예견한 것이 확실함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시한 바 이야기를 몇 가지로 결론을 내려보면 첫째 초대교회의 사도적 증언으로 되돌아가야 할 원초적 규범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초대교회가 구체적이고 충족적인 역사 자료를 남겨놓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셋째로 초대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전략과 적극적인 강력성의 이유입니다.
넷째로 사도행전의 문서로서의 성경에 관한 집필 동기와 연관이 있는 포괄적 구조의 이해입니다.
사도행전의 증언
이와 같이 전술한 이해를 놓고 우리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수록한 사도적 설교에서 독자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변증 하려고 했으며 증언하려고 했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 갈릴리의 한 목수로부터 시작된 공동체가 팔레스틴 남해뿐 아니라 로마의 여러 중요 거점 도시를 징검다리로 하여 세상 끝까지 전파될 수 있었는가. 누가는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선교 대명령을 성취한 내용을 그 방대하고 산적한 자료 가운데 의도적으로 선정했고, 그 안에 사도적 설교를 언급할 필요에 의하여 이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 사도적 설교는 결코 오늘의 교회 신학의 요구 때문에 교리 유형을 제시하거나 오늘의 실천 신학의 요구 때문에 설교 기술의 유형을 본으로 보여주거나 심지어는 교본적으로 ‘설교는 이렇게 하라’는 모범을 보여줄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현대 기도의 성자 앤드루 머레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의 신학대학의 교과목처럼 설교학이나 설교 술의 강의를 하시거나 그것에 상관한 교훈을 말씀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와서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할 때는 “이와 같이 기도하라”하신 후에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다는 본문을 주목해야 됩니다.
사도적 설교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하는 성실한 질문자는 바로 그 성격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정밀적인 분석도 중요한 소득을 약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날드 커프리 교수가 베드로의 가장 대표적 설교인 오순절 설교를 설명할 때에 그와 같이 중요한 성령, 예수의 부활, 삼위일체 신론에 관한 변증 설교는 예루살렘 당국이 고의로 사람들이 낮에 술 취한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중상으로 군중을 오도하며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려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를 변증 할 필요 때문에 즉흥 설교로 까지 한 것이라고 배경 설명한 내용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가장 대표적인 사도행전 2장의 설교는 ‘즉흥 설교’입니다. 이 베드로의 즉흥 설교에서 방금 말씀드린 삼위일체론, 예수 부활의 변증, 성령강림에 대한 증언이 균형 있게 포괄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베드로의 인격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의 설교는 규범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소중합니까?
사도들의 설교 유형
누가가 수록한 모든 사도들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오늘의 목회학적 요구에 의한 설교처럼 사전에 잘 준비한 강해 원고 설교의 유형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첫째로 충분히 발전시킨 전문 원고를 설정해서 하는 연구 접근보다는 비록 요점만 담은 간결한 맥락이면서도 둘째로 지극히 그 상황적 요구에 적절하게 밀착되어 있다는 유연한 자연성과 셋째로 어떤 설교의 경우에서도 예외 없이 적극적이고 긴박감이 충일해 있는 사도적 권위의 선포라고 하는 이 세 가지 기본 조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이 기본 조건을 전제하고 다만 하나의 신학 요목인 ‘죄론’ 만을 가지고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요목으로도 충분히 사도 설교의 다이내믹함과 위대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도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해명해야 할 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틴 디벨리우스로 대표되는 비평으로써 사도행전 안에 수록된 사도의 설교는 객관성이 없는 누가의 문학 작품이며 역사의 진행에 따라 중요한 전환이 발생할 때마다 극적 효과를 높이려고 누가가 그러한 사도의 설교의 스케치를 창작으로 넣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마틴 디벨리우스의 현대적 비평은 다음과 같은 증명에 의하여 반박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설교가 누가의 창작이라면 누가의 문학성은 가장 세련되고 뛰어나야 할 터인데 반대로 누가의 문학성은 이 설교에서 그 헬라 어 구문이 아람어의 히브리 어법대로 깨지고 맙니다.
둘째로 이미 시간적으로 원사도에서 바울, 그리고 바울의 제자 격인 누가는(누가는 바울의 제자이며 안디옥교회에서 예수 믿은 지 10년 만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3세대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 이방인 지도자이며 헬라 교회 사도인 바울 두 인물의 차이를 설교 구성에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그런 비교가 단순히 직선적인 베드로의 설교에서 바울의 변증법적인 사색적 설교도 어떻게 적절히 창작하여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입니다.
셋째로 그런 차이가 현물을 놓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리면서 자연스럽게 무리가 없는 발전을 보이도록 서서히 변화하는 창작이 어떻게 가능한가?
넷째로 그가 순수한 헬라 사람이며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알게 된 후, 아직 10년도 안된 약관이, 전혀 랍비 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그가 사도적 설교에 담겨 있는 히브리 사람의 전문 지식인 구약의 인용과 예언과 성취의 관계를 어떻게 창작해 낼 수 있을까? 끝으로 위에서 지적한 모든 요인들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직설적 설교 형태로 거리에서 장터에서 군중에게 총독, 왕에게 그리고 회당에서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알맞은 창작을 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대략적 내증만 해도 마틴 디벨리우스의 비평적 자유주의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F.F. 로스의 이론입니다. 저자 누가가 복음서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의 맥락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는 죄의 심각한 문제는 특히 사도적 설교에서 오늘의 교회와 오늘의 설교자가 반드시 배워야 할 강력한 초대교회의 의지인 것입니다.
사도적 설교에 나타난 죄에 대한 문제
첫째, 회개와 회심의 요청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의 설교는 성령강림 직후에 행한 최초의 베드로의 설교부터 ‘죄’를 버리라는 강력한 호소가 나옵니다. 2장 38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라고 예루살렘의 군중을 향하여 행한 설교가 나옵니다. 군중 앞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3:6)고 말하며 그의 병을 고친 후에 많은 백성들이 호기심에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들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시작한 그의 즉흥 설교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다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3:19)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엠 비 스톤 마우스는 베드로의 기본적 요구는 언제나 ‘회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죄의 심각한 해결의 요구는 바울에게도 동일한 것입니다. 아덴 시민에게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17:30)라고 설교하면서 구원 밖의 인간에게 회개를 요청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20장 21절에 보면 교회 장로들을 향하여 그들과 함께 그들 속에 사역할 때에 바울이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 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어전에서 연설할 때에도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서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회당장, 이방인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의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19~20) 선전하므로 그의 전도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하나님께 돌아갈 회개와 합당한 일의 선포 행위였음을 당당하게 천명하였습니다. 이 회개는 모든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구체적 상황이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기독교회를 스스로 정의 내릴 때에 당초에는 ‘길’(the way)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절, 19장 9절, 22장 4절, 24장 14절, 22절의 구절은 기독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the wayto God), 주님의 길(the way of the Lord), 다시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길임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의 설교 요체는 구체적인 저들의 ‘회개’였습니다. 그러기에 빈센트 테일러의 설명과 같이 사도들의 죄의 회개 요구는 단순히 주님의 교훈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예수를 믿음으로만 회개의 성취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레안 모리스는 예수의 공생애 때에 보다 오순절 이후에 사도들의 설교에서 이 죄의 회개의 요구는 더욱 맹렬한 요구가 되고 있음은 당연하다고 고증했습니다.
둘째는 죄에 대한 형벌(즉각적인)입니다.
저자 누가는 결정적인 사례로 죄인에게 내려진 즉각적인 형벌을 기록함으로써 죄의 심각성을 제시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1절부터 11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에게 내려진 형벌이기 때문에 11절에 보면 ‘온 교회와 이를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3장 10절 이하의 경우 바울이 서기오 바울 총독을 전도할 때에 방해하는 마술사 엘루마는 바울의 책망에 즉각 눈이 멀었고, 8장 20절 이하의 경우 성령의 능력을 금전으로 매입하려는 시몬은 베드로의 책망으로 “돈과 더불어 망하리라”라는 경고에 용서를 빌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13장 40절에 보면 바울의 최초의 설교로 나오는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행한 설교에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죄인의 멸망을 상기시키며 경고했습니다. 죄를 한 번도 미워한 일이 없습니다. 죄를 소상히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성직자가 되기 전에는 세상에서 모든 방탕한 죄를 다 지어본 일이 있다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죄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는 설교자로서 피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 죄와 최후의 심판입니다.
사도들의 설교가 언급한 심각한 죄의 문제와 관련하여 제3의 변증은 역사 말에 하나님이 정하신 최후 심판의 가능성입니다. 사도의 설교 신학에서 죄 문제의 심각성은 죄가 주님의 십자가를 낳게 하였으므로 누구든지 회개해야 할 보편적 요청이고 죄가 몇 번의 구체적 사례에서와 같이 형벌이 즉각 임하는 사실에서 변증이 되었으나 죄의 심각성은 여기에서 해결되는 끝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설교 신학에서 죄는 역사 말에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역사적 지속성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신학 기조는 최후 심판주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충격인 확신에 찬 약속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2절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 문중에게 그가 최초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설교에서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 하게 하셨다”는 확신을 주저 없이 전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덴에 찾아가 이 세상 철인과 석학을 대상으로 공개토론 형식의 증언 설교를 한 바울은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17:31)고 함으로써 당시에 헬라 지성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는 복음을 선포한 최초의 접촉에서 결코 이 점을 유보하지 않았습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그리고 그의 아내 드루실라 앞에서 예수의 ‘길’에 관하여 강론할 때, “바울이 이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고 했다고 저자 누가는 증언합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주님의 심판은 성도에게는 가장 큰 위로이지만 죄의 문제에 빠진 온 세상은 나라와 백성이나 왕들이나 민중이 경청해야 할 시한폭탄의 성명인 것입니다.
결 론
저는 여기에서 초대교회 사도적 설교가 주는 교훈에 관하여 말하고 이제 끝을 내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사도의 설교는 역사적 자료에 의한 중요한 스케치입니다. 누가의 창작이 아닙니다.
둘째로 바로 이 사도의 설교가 어떤 출판이나 신학 수립의 논문이 아니라 기원 1세기 중반부에서 이미 기독교로 하여금 범 세계의 운명을 책임질 교회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 설교가 실제로 초대교회 희귀한 문서 자료의 어디를 보아도 그 장소와 상황이 요구한 절실한 요구와 자신의 확신이 촉발시킨 직설적 설교였습니다. 즉흥 설교입니다.
셋째로 사도의 설교는 전부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중보자로 계시며 재림하실 그러한 총체적인 기독론이 담겨있는 설교였습니다.
적극적 사고를 통하여 성공을 약속하는 그런 설교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입니다.
넷째로 그런 기독론으로 새로운 복음을 정립하는 데서 하나님론, 예언과 성취, 회개와 구원, 성령의 능력과 축복,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헌신할 성도의 생활을 권면했습니다.
다섯째로 어떤 상황에서도 위의 대원칙에서 벗어난 시사의 소리나, 문화와 창작을 창달하고 계몽하기 위한 수필 설교는 사도적 설교 중 한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기본 원리에서 오늘의 교회와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종인 설교자는 사도적 설교가 원초적 규범임을 알고 항시 반복적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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