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베드로전서 2장 주일설교말씀] 성도의 특권과 의무(벧전 2:1-25)

기혼샘 2022. 4. 2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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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성도들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함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것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나라에 충성해야 할 것도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특권과 의무(벧전 2:1-25)

 

1-3,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1-3]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 . . .

베드로는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모든 . . . 모든 . . . 모든 . . .’이라는 표현은 온갖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은 악한 생각과 뜻을 가리킨다. ‘궤휼은 거짓과 속임을 가리킨다. ‘외식은 겉으로 선하게 보이나 마음 속에는 악독한 것이요,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를 괜히 깎아내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비방은 다른 사람에 대해 정당하지 않고 악하게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은 성도들이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옛사람의 성질들이며 마귀적 성질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이러한 죄성들을 가지고 있고 이런 악들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런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이들은 엄마의 젖을 사모한다. 아기들은 엄마의 젖맛을 알기 때문에 배가 고플 때 그 젖을 못 빨면 마구 울어댄다. 아기들은 아프거나 몸이 안 좋으면 젖을 잘 안 먹으려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정상적이면 엄마의 젖을 사모할 것이다. 갓난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아기들은 이렇게 엄마의 젖을 잘 먹을 때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된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는 원어(토 로기콘 아돌론 갈라)거짓 없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말한 것은 이단사설들, 인본주의적 생각들이나 말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흥미만을 위주한 예화나 이야기들 등과 구별시킨 말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의 바른 교훈을 늘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는 자라기 위해서이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자라야 한다고 말했다(4:13-16). 히브리서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를 구별하였다(5:13-14). 우리는 주 안에서 순수한 성경말씀을 섭취함으로 자라야 한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딤후 3:16-17).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에는 있으나 전통사본들에는 없다.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혹시 원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구절의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는 세 단계가 있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과거적 단계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구원을 얻었다(2:8-9).

영화(榮化)는 미래적 단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일이다(벧전 1:5).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8:24).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다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화(聖化)는 현재적 단계이다. 이것은 법적으로 이미 얻은 의()를 실제로 우리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 2:12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미 받은 구원, 장차 영화롭게 완성될 구원을 현실 가운데서 드러내라는 것이다. 즉 온전한 경건 생활과 도덕 생활을 하라, 의와 선과 진실을 다 행하라는 뜻인 것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이것은 우리가 순수한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거룩한 인격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베드로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한다. ‘주의 인자하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과 은혜와 인자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자, 죄 없는 자,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옛사람에 속한 모든 악독과 모든 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는 것은 가장 귀한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신앙 인격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4-10,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

[4-5]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고 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배로운 산 돌이시다. ‘산 돌이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심을 뜻한다. 우리는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 ‘신령한 집이라는 단수명사(오이코스 프뉴마티코스)는 성도들이 모여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돌들로 지은 건물에 비유된다. ‘신령한집이라는 말은 교회가 단순히 물질적 건물이나 육체적 집합체가 아니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 곧 성령의 전인 것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했다.

신약교회는 성도들의 연합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에베소서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신약교회는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있다. 이것은 온 세계의 모든 성도를 포함하는 거대한 교회이다. 지금도 이 교회의 건축 소리가 온 세계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지고 있다. 한 명의 영혼 구원을 통해 벽돌 한 장이 쌓여 가는 이 건축은 예배당 건축보다 수천 배 더 큰 의미와 중요성이 있는 건축이다. 우리 모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유여하지 못해도, 이 영적 건축, 곧 전도와 성화의 일을 크게 여기고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이 영적인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제사장이라는 원어(히에라튜마)는 ‘제사장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들을 드려야 한다. 그 영적인 제사란 우리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과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속임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6-8]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 . . .

베드로는 말한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시다.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버린 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셨다. 많은 이들이 그 돌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열심히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고 믿지 않는 자가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중적이다. 그가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은 영생으로 선택하셨으나, 다른 이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정하셨다. 죄 가운데서 멸망받을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9-10]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에게는 왠 은혜요 왠 사랑인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인생에게 가장 큰 복이다.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권들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다. 선택받은 증거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회개와 순종이다. 둘째로,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왕 같은이라는 원어(바실레이오스)높은 특권을 가진이라는 뜻이다. 성도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는 특권이 있다(10:19). 셋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 세상 나라들은 부정과 불법으로 가득하며 음란하고 부도덕한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진리와 사랑과 평강의 나라이다. 성도들이 그 나라이다. 넷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우리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우리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귀한 보배들이다. 또 하나님의 것은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이 안전한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귀한 특권을 동반한 구원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기이한 빛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의와 행복을 가리킨다.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했던 우리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죄악들 가운데 살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값없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허무와 불행과 영원한 죽음 아래 살았던 우리가 기쁨과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 지식과 의와 행복은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빛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기이한 은혜와 사랑, 이 지식과 의와 행복을 마땅히 찬송하며 증거하고 전파해야 한다.

베드로는 또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말한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4절부터 10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산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립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 우리는 영적 성전 건축 곧 전도와 우리 자신의 성화를 힘쓰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들을 드릴 거룩한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삶과 하나님을 위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특권을 깨닫고 보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특별한 소유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와 특권인지!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와 특권, 곧 지식과 의와 영생과 행복을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순종하고 그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자.

11-12, 육신적 욕망을 제어하라

[11-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 . . .

베드로는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같은 존재이다. 죽을 때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에 판단을 받아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며 죽은 후에 돌아갈 영원한 처소가 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내세를 준비한다. 내세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가운데 정신 없이 살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중생한 영혼의 새 성향을 거스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음란과 방탕 등 육신의 욕망들을 제어하고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성도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선하게 삶으로써 그들에게 바른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그릇되이 비방하는 일이 많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바사 왕 아닥사스다를 모반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었다(6:6). 바울은 교인들을 교묘하게 궤계로 자기 사람을 삼는다는 비난을 받았었다(고후 12:16). 그러나 느헤미야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종들이었다. 성도들이 악한 세상에서 선을 행하면 그것이 세상에 빛이 되어 하나님의 긍휼의 날에 사람들이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들이 될 수 있다.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5:16).

13-17, 인간의 제도에 순복하라

[13-15]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 . . .

베드로는 말한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디아 톤 퀴리온)[주님 때문에]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이는 너희가]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것이 하나님의 뜻임이니라].”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선한 삶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종하는 데서, 예를 들어, 왕과 그의 보낸 관리들에게 순종하는 데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또 세속 사회의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로마서 13:1-2, 4, 6,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거스름]이니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잘못된 말들로 성도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하지만, 성도가 범사에 선하게 처신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에게 아무런 비난할 말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도는 오직 선해야 한다.

[16-17]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그러나 우리는 그 귀한 자유를 악을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3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했다.

성도들의 선한 삶은 인간 관계에서 나타난다.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이며, 또 주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만일 주께서 그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다면, 우리는 그를 존중해야 한다. 또 베드로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라고 말한다. 왕을 공경하는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에는 이웃의 노인들, 교회 장로들, 학교 선생들, 직장 상사들, 나라의 대통령이나 관리들에 대한 존경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다.

18-25, 종들은 주인에게 순복하라

[18-20]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 . . .

베드로는 말한다. “사환들아, 범사에[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원문, KJV, NASB)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사환들이라는 원어(오이케타이)는 ‘집안의 종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종들에게도 선한 삶을 교훈한다. 그것은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종들은 주인들을 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한다. 또 종들은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만 순종할 것이 아니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

종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 주인에게 매를 맞으면 칭찬받을 것이 없지만, 그가 선하게 행하는데도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고난과 슬픔을 잘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라는 말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선한 생각 때문에라는 뜻이라고 본다. 종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는 것은 미덕(美德)이다.

[21-25]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길 잃은 양들과 같았으나](전통사본)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성도들은 이런 고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그것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다.

구주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그는 마침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죄의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과거에 길 잃은 양들과 같았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황했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찾아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인도, 그의 간섭, 그의 보호, 그의 돌보심을 받게 되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11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은 어떤 교훈들을 주는가? 첫째로, 우리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우리의 선한 행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님 때문에 순복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과 관리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의와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한 자유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의와 선을 행하자.

넷째로, 아랫사람은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윗사람에게 순복해야 한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에게 뿐 아니라, 까다로운 자에게도 그러해야 한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다가 고난받는 자들의 본이 되셨다.

[이사야 20장 성경 좋은 말씀] 애굽과 구스가 사로 잡힐 것(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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