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요한계시록 강해설교]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교회(계 2:12-3:6)

기혼샘 2021. 4. 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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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강해설교 중에서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이며 두아디라 교회는 부패한 교회이며 사데 교회는 죽어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성장하여 돈은 많아졌지만 세상과 타협함으로 복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육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결국 영적인 것을 놓쳤습니다. 거짓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육적인 부흥만 강조하다 보니 영적인 부흥은 사라지게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도 영적인 복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육체의 일에만 정신 팔려 있다가 책망을 받게 됩니다. 사데 교회는 살아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입니다. 이 세상 교회가 현재 사데 교회처럼 육신의 일만 도모하다가 영혼은 죽어있지 않은가?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나님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키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영적으로 죽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계 2:12-3:6)

 

그동안 2회에 걸쳐 '처음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와 '핍박받는 서머나 교회'에 주님이 보내신 편지들을 다루었다. 오늘은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에 보내진 편지들을 살피고자 한다. 교회가 속한 도시의 특성과 역사적 배경 등은 생략하고, 어떻게 타협하는 버가모 교회로, 부패한 두아디라 교회로, 그리고 죽은 사데 교회로 불리게 되었는지를 중심으로 나누고자 한다.

 

타협하는 교회(Compromising Church)

 

버가모 교회에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을 지나는 것을 두려워한 모압 왕 발락에게 고용되어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것은 거절했으나 그는 결국 모압 여인들의 유혹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성적 타락과 우상숭배에 참여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망하게 되는 방안을 알려준 인물이다.

 

민수기에 기록된 발락과 발람의 사건에서 얼른 발람의 잘못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은밀한 부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에 이르도록 허용한 사람이다. 여기에는 모압 왕 발락이 제안한 돈이 있었다. 오늘날 같으면 발람은 공개적으로는 의로우면서도 은밀한 부분에서는 자기 이익을 다 챙기고, 주변 사람들은 어떤 범죄에 빠지든 자신만 깨끗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언급되고 있는 니골라당의 교훈은 그 방향과 내용에 있어서는 발람의 교훈과 같은 것이나 그들의 가르침의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버가모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는 제사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그 부류에 참여하지 않는 표시가 되었기에 상당한 불이익을 받게 되어 있었다. 당시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문화를 주도해 가던 대부분의 동업조합은 신전(神殿) 의식을 중심으로 그 세를 과시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교회 안에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타락한 세상일지라도 그들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려면 영적으로 자유함을 얻어 우상 제물을 먹는 곳에 성적 유희를 즐기는 곳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상당한 매력이 있다.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실천적인 신앙을 갖자'라고 외치는 그들의 표어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의 가르침과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책망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들이 교회에 허용되고 징계되지 않는 것에 대해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 중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게 된 사람들은 처음부터 ',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워보자'라고 하면서 그런 행위를 따른 것은 아니었으리라. 오늘날의 표현을 쓰자면, 자신들이 이 세상 문화에서 격리되는 것 같고, 점점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따분하게 여겨지고, 성도들의 생활은 재미없는 진부한 것으로 여겨지고,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교회 성도들 중에는 교회 생활이 가져오는 현실적인 부담과 불이익으로 고심하면서 대안으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인정받지 못했고, 그들의 행위를 징계하지 못한 교회가 책망 듣게 된 것이다.

 

어떻게 버가모 교회가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을까? 이미 그릇된 가르침으로 판명된 두 교훈들이 어떻게 교회 성도들에게 그토록 큰 영향력을 미치면서 확산될 수 있었을까? 갖가지 질문이 가능하겠지만 그 어느 질문도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와 무관하지 않은 심각한 것들이다.

 

버가모 교회가 처한 문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도들 개인의 구원에는 적용되면서도,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으로는 활용되지도 가르쳐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 성도들이 실생활에서 세상의 가치와 방법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가 사회, 경제, 문화의 영향력 아래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도들의 삶이 복음의 능력을 따라 사회 속으로 스며들도록 가르치고 이끌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개인구원이라는 구명복을, 낙하산을, 탈출구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위로와 소망을 주는 수준에 멈춰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변혁을 꿈꾸던 일들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극단에서는 아예 영성이 흐려진다는 이유로 문화와 담을 쌓아 버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우리는 여기서 세상 문화가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도전하기보다는 너 자신에게 있는 것을 네 마음껏 드러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세상 문화 속으로 들어갈 때에 두배의 영성이 요구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 문화에 접근할 때 가장 근본적인 경건의 훈련과 경건한 삶을 배제하지 않는 성숙된 삶을 가지고 다가가도록 부단히 애써야 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무시되면서, 경건이 진부하게 느껴지면서까지 문화 변혁자로 나아가는 것은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심히 어리석은 짓이다.

 

세상 문화의 특성을 간파하고 세상 문화에 취하려 하기보다는 그들을 사랑으로 껴안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전하고 행하기 위해 그들 속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두배의 영성이 강조되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될 때, 갖가지 대상에 취한 사람들에게 말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분명히 다른 무엇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 속에 사용되는 언어 사용이 가히 폭력에 가까운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그들에게 진실이 주는 아름다움을 향하도록 동기 부여할 것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웃음의 소재를 진실에서 찾기를 거부한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남을 비하시키고 바보 취급하면서 말 끊기를 예사로 삼고 웃어대는 그들의 빈약함을 그리스도인들은 슬퍼하며, 그들에게 새 언어(New Dialogue)가 주는 신선함과 진정한 웃음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패한 교회(Corrupt Church)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의 지도자가 자칭 선지자라 일컬으며 성도들을 성적으로 타락케 하는 음녀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을 용납한다. 이에 대해 주님은 단호하게 '부패한 교회'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되묻고 싶을 것이다. 교회의 선한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주님이 아신다고 하면서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인정해 주신 교회인데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이세벨이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며 성도를 유인하고, 교회를 혼란케 했을 것인지 자세히 모른다. 다만 자칭 여선지자라고 하면서 활동했던 것을 보면 사람들을 이끌 만한 특별한 영적 경험과 예언 등의 (소위) 은사들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가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 했을 것이고, 이런 유의 영적 경험과 그 깊이를 알지 못하는 교회 지도자는 혼란하면서도 성도들의 반응 때문에 그런 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에 처했으리라.

 

주님은 이러한 형편의 교회에 편지하면서 먼저 교회 지도자가 이세벨을 용납한 것을 책망하신다. 그리고 이세벨을 주님이 세우지 아니한 거짓 선지자라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이세벨을 음녀라고 지적하신다. 주님은 교회 지도자의 혼란을 책망하시면서도, 모든 교회가 주님이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게 하심으로 교회를 혼란함에서, 부패에서, 타락에서 건져 내시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에 대한 책망은 정죄로 나타나기보다는 이세벨의 영향력이 어떠함을 보이시고,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자들의 결국이 어떠할 것을 보이심으로 혼란에 더 이상 빠지지 말고 처음 받은 그 믿음을 주님 오실 때까지 굳게 붙잡도록 하고 계신다.

 

오늘 한국교회는 여러 부분에서 소위 영적 은사를 잘못 활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혼란에 빠져 있다. 작금의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현실 가운데 역학과 역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와 함께 교회 안에서도 점쟁이를 방불케 하는 그릇된 행위들이 여러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혼란한 세력에 매이도록 묶어 버리는 것을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두아디라에 보낸 편지에서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활동을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고, 더 이상 혼란한 활동을 못하도록 막지 못하는 것일까? 그냥 놔두면 해결될 것처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일까? 형제의 신음하는 아픔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릇된 교회 부흥 신드롬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사도적 가르침에 굳게 선 건전한 신학 없이 건강하지 못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은 여전히 풍성한데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뭔가 색다른 교회 부흥의 길이 있을지 모른다고 여기며 확신 없는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면 교회 지도자들의 자기 한계 극복은 어디서 가능한가?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처럼(계2:25), 사도들에게서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욱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시대 속에서 더욱 확연히 알아가는 일에 헌신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말씀 연구와 기도가 부족하다는 말은 과거 여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죽은 교회(Dead Church)

 

어떻게 교회가 죽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로는 죽은 자라니. 그동안 갖가지 교회 행사들이 있었다. 사람들도 여럿 모였다. 그러나 주님은 죽게 된 교회라고 말씀하시면서 교회의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행위에는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순전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내세운 목표들은 교회를 위한 것 같고, 치러지는 행사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데, 이 과정 중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온데간데없고, 주님의 주님 되심을 드러내려는 헌신된 모습도 온데간데없고, 분주히 그 일을 되게 하기 위해 뛰는 가운데 세상의 가치와 방식을 사용하면서 옷을 더럽힌 그들을 주님은 죽게 된 교회라고 말씀하고 계신 듯하다.

 

목표를 이렇게 이루었다고 돈 씀씀이를 자랑하고, 수고한 사람들은 칭찬하지만, 그 일을 준비하고 이루어 가면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변화되어가는 모습에는 별 관심이 없다. 교회에서 나누어진 교제와 광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하심이 순전히 드러나는 데에 관심 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모든 일에 그 가치와 동기가 바르지 못하면 그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일의 진행은 될지 모르나 죽게 된 교회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 행사가 소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일을 준비하고 이루어가는 중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과 그 관심을 드러내려고 수고하느냐에 있다. 아직도 우리가 교회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생소한 말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교회를 건강케 하시는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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