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한 것을 말씀합니다. 거짓 이단에 빠지지 말고 오직 복음을 따라서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 충족하심(골 2:1-23)
1-5절, 그리스도를 깨달으라
[1절]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바쳐진 일꾼으로서 자기의 얼굴을 아는 자들이든지 모르는 자들이든지 간에 그들을 위해 충성되이 일하고자 애썼다. 교회의 봉사자들과 복음의 일꾼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열심을 다해 힘써야 할 것이다.
[2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비밀을](전통본문) 깨닫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힘쓴 목표는 우선 성도들로 말미암아 마음에 위안을 얻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비밀을 원만하게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참 사랑의 연합은 참된 교회의 표지임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그런데 그 사랑의 연합은 참 지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원만한 이해’라는 원어(테스 플레로포리아스 테스 쉬네세오스)는 직역하면 ‘이해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말로서 ‘충만한 확신을 가진 이해’라는 뜻이라고 본다. 본문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충만한 확신을 가진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그리스도를 깨닫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해 조금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충만한 이해와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표현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부터가 신비 중의 신비이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사실도 신비한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이 세상에서 처음 이루어진 신비한 사건이었다. 그의 신비한 부활체는 장차 모든 성도들이 입게 될 부활체와 같았다. 또 그의 몸된 교회도 신비한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사실은 비밀스런 사실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사실도 비밀스러운 일이다. 참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비밀이었다.
[3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누가복음 2:40의 증거대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릴 때에도 지혜가 충족하셨다. 이사야 11:2는 메시아에게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의 영이 머물러 계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 온 세계는 그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장차 그로 말미암아 새롭게 회복될 것이다.
[4절]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당시에 교묘한 말로 성도들을 속이려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족함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그것에 더하여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려는 합리주의자나 신비 체험을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는 속이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충족한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확신함으로 우리를 흔들어 넘어지게 하려는 자들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5절]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규모’라는 원어(탁시스)는 ‘질서 또는 질서 있는 행위’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질서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교인들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신앙 훈련이 잘 된 것을 뜻한다. 또 ‘믿음의 굳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치 않고 그를 확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확신은 신구약성경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잘 훈련된 신앙생활을 하고 그들의 믿음이 견고한 것을 보며 기뻐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들을 깨닫자. 그 비밀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그의 신성(神性), 그의 속죄사역과 부활, 그리고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온 세상의 회복과 영원한 천국의 영광 등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참으로 놀랍고 복된 진리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며 내용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고 그 분 한 분으로 우리의 구원이 충족함을 깨닫고 또 모든 속이는 말들을 조심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속죄사역에 무엇을 더하려는 시도들은 다 잘못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완전한 구주이시다. 우리는 그 진리 안에 거하며 또 모든 잘못된 말들을 분별하고 경계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질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견고한 믿음을 가지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 또 잘 훈련된 인격과 삶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다. 우리는 그것을 저버리는 온갖 오류를 조심하고 바른 믿음에 굳게 서서 순종하자.
6-7절,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6-7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본문의 교훈의 요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는 것이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라는 원어(파렐라베테 톤 크리스톤 예순 톤 퀴리온)는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였으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주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참 선지자와 참 제사장과 참 왕으로 인정하고 영접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베드로의 대답과 같다(마 16:16). 로마서 10:9-10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구원이다. 요한복음 1:12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여기에 교회의 기초가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지식과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교회는 세상적 교제의 단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의 단체이다.
본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세 가지 내용을 권면하고 있다. 첫째로, 믿음에 굳게 서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예수께서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환난이 닥칠 때 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뿌리를 내려 믿음에 굳게 서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마 13:21).
우리는 어떻게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는가? 그것은 ‘교훈을 받은 대로’ 즉 성경 말씀을 통해 될 수 있다. 시편 19:7-8은 말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누가가 누복음 1:1에서 말한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는 원문(페리 톤 페플레로포레메논)은 “우리에게 충분히 확정된(fully established), 지극히 확신하는(most surely believed) 사실에 대하여”라는 뜻이다. 또 누가는 그가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는 [데오빌로]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certainty)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고 말하였다(눅 1:4).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하여 주신 것이 성경이므로,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연구함으로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해야 한다.
둘째로, 본문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감사함을 넘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의 많은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백성의 특권을 단번에 은혜로 주셨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깨닫고 놀라며 감격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이미 골로새서 1:3-5에서 그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인하여 즉 그들의 구원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증거하였고, 또 1:12에서는 그들이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에베소서 1장에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우리의 찬송의 제목, 찬송의 이유, 우리의 헌신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 지옥에 가야 마땅했던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여 그의 존귀한 자녀로 삼으신 이 놀라운 구원, 그의 크신 은혜와 긍휼 때문에 우리는 찬송과 감사를 넘치게 그에게 돌리며 우리의 모든 삶을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본문의 강조점이다. 믿음은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형식적 예배보다 실제적 삶을 원하신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우리의 주일 예배가 귀하고 중요하지만, 그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헌신이란 정상적 신앙생활, 즉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6절, 7절의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그것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가능하다. 둘째로, 우리는 구주 하나님께 넘치게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구원의 당연한 결과이다. 셋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 그것은 순종의 삶이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는 본문의 교훈대로 이 세 가지를 힘쓰는 자들이 되자.
8-15절, 세상의 철학을 주의하라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의 교훈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구주이시며 그의 구속(救贖) 사역은 완전하므로 우리가 그 분만 따르고 오직 그의 진리와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인 철학들을 따르는 이단들이 있었다. ‘초등학문’이라는 원어(스토이케이아)는 ‘초보적 원리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세상의 철학들이나 종교들의 초보적 원리들을 가리킨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는 말은 세상의 철학들이 결국 헛된 속임수임을 암시한다. 인간의 철학들이 참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결국 헛된 속임수이다. ‘노략할까’라는 말은 세상의 철학들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보다 오히려 빼앗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보다 오히려 해를 입힌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는 철학들, 사상들, 종교들이 많지만, 그것들은 결국 모두 헛된 속임수들이요 실상 우리를 노략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항상 굳게 서야 한다.
[9절]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바울은 또 말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세상의 철학들과 대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무엇인가? 우선,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일부분이 거하시는 것이 아니고 신성의 모든 충만, 곧 충만하신 신성이 거하신다.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은 분은 인류 역사상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같은 것도 인류 역사상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세상에 유일한 진리이다.
[10절]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충만하여졌으니’라는 원어(페플레로메노이 완료분사)는 ‘완전하여졌으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존재적으로, 실질적으로 완전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완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뜻에서, 히브리서에는 예수님 믿는 성도들이 ‘거룩함을 얻었고’(히 10:10)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히 10:14)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의 머리이시다. ‘정사와 권세’는 세상 정치가들의 배후에서 활동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 . . .
바울은 말한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육신의 죄의 몸](전통사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죄의 몸을 벗는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악된 옛 자아 곧 옛사람을 벗어버린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 믿을 때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이것이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법적 구원이었다. 구약의 할례는 성결을 상징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성결을 얻은 것이다. 본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표현하였다.
[12-13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죄사함의 은혜 곧 참된 성결은 세례 의식으로 상징되었다. 세례는 죄씻음의 뜻을 가지는 의식이다. 이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확증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법적 완전은 결국 사죄와 칭의와 부활을 가리킨다. 사죄 곧 죄사함을 받은 무죄(無罪) 상태는 의(義)의 상태이며, 그 결과는 영원한 새 생명인 것이다.
[14-15절] 우리를 거스리고[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율법 조문들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사실, 하나님의 율법이 폐지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율법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는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의(義)를 입혀 주셨으므로,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폐지된 것과 같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다’(6:14), 또는 ‘율법에서 벗어났다’(7:6)고 말했고, 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였다(8: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율법을 폐하시는 법적 조치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통해 죄인들에게 권세를 부렸던 악령들의 세력들도 폐하셨다. ‘정사와 권세’는 악령들을 가리키며, ‘벗어버렸다’는 말은 악령들의 세력을 폐하셨다는 뜻이다.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신 사죄의 사실을 악령들 앞에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벌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실패처럼 보였던 십자가가 오히려 죄와 악령들을 이기는 사건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죽음으로 승리하셨다.
8절부터 15절까지 내용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인간의 철학들을 주의하자. 인간이 고안해낸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진리가 아니고 구원 문제에 관한 한 속임수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神性)의 충만함이 있으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거기에 또한 구주의 유일하심이 있고 그의 구원사역의 완전함이 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완전한 구주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죄사함의 구원이다. 또 거기에 의롭다 하심 곧 법적인 완전이 있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도 있고, 또 영육의 죽음을 극복하는 영원한 새 생명이 있다.
16-23절, 의식법에 얽매이지 말라
[16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먹고 마시는 것은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에 대한 법이나 피에 대한 법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레 11장; 17장). 월삭은 초하룻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원어(삽바톤 복수명사)[안식일들]는 ‘제7일 안식일’도 가리킬 수 있고(BDAG; 눅 4:16; 행 13:14; 16:13 등), 또 연중 절기들의 안식일들(무교절에 2번, 맥추절 1번, 나팔절 1번, 속죄일 1번, 초막절에 2번 등 모두 7번)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본다. 본문은 의식법 문제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어떤 연약한 자들이 고기 먹는 것을 거리끼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음식 자체가 깨끗하지 않은 것은 없으며 단지 거리낌으로 먹는 자에게는 깨끗지 않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지 말고 사랑으로 용납하라고 말했다. 또 히브리서는 “이런 것[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고 말하며(9:10) 신약 아래서 다 폐지된다고 말했다(10:9).
[17절]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바울은 말한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구약의 의식법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었고 그 실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이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루어졌다. 물론 인류의 구원과 세상의 회복은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의 결과로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의식법의 내용이 그러하므로 신약 성도들은 이 법들을 지킬 의무 아래 있지 않다. 구약의 의식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 우리는 이제 단지 주께서 약속하신 재림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8절]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본문은 거짓 교사들의 교훈에 대해 말한다. 거짓 교사들은 의식법의 강조에서 더 나아가 금욕주의와 천사 숭배를 가르쳤다. ‘일부러 겸손함’이라는 말은 문맥상 자기 몸의 학대 곧 금욕(禁慾)과 고행(苦行)을 가리킨다. ‘그 본 것을 의지하여’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그 보지 못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이 구절의 뜻은, 거짓 교사들이 그 보지도 못한 것들을 헛되이 자랑하고 과장하며 금욕과 고행과 천사 숭배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상을 빼앗기는 것’ 곧 구원의 상실과 신앙생활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멀리해야 한다.
[19절]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금욕주의와 천사 숭배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 일이다. 성도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온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자란다. 에베소서 4:15-16,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참된 영적 성장과 성화, 성결 생활과 도덕생활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우리가 그 안에 계속적으로 거함으로써 많은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요 15:5).
또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는 말씀은 성도와 교회의 영적 성장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성화는 단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3:6-7에서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하였다.
[20-22절]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 . . .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신약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세상의 초보적 원리들이나 의식법들로부터 자유케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의식법들을 강조하여 이런 저런 것은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였다. ‘의문(儀文)에 순종한다’는 말(도그마티제스데)은 ‘의식법의 규례들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교회에서 구약의 의식법을 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 교훈은 다 멸망할 것이며, 그것들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불과하다.
[23절]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의식법의 강조나 금욕주의는 참된 경건과 성결의 삶에는 아무 유익이 없다. ‘자의적(自意的, self-imposed) 숭배’라는 말은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부과한 경배의 행위를 가리킨다.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함’은 금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 그런 것들은 그럴 듯한 모양과 말일 뿐이지, ‘육체’(사르크스)[육신, 죄성을 가진 몸]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참된 성결 생활과 도덕생활에 아무런 유익과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과 성화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16절부터 23절까지 내용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의식법들이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음을 알자. 구약의 성막 제도, 제사 제도, 정결 부정결의 음식법, 절기들에 대한 규례 등 소위 의식법들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며, 비록 그것들에 담긴 도덕적 교훈은 유효하지만, 의식법 자체로서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둘째로, 우리는 금욕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금욕주의는 무엇을 먹고 안 먹는 것, 무엇을 만지고 안 만지는 것 등의 외적인 규례들을 강조한다. 그러나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1-5에서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아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것을 경계하였다. 우리는 오직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금욕주의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신약 히브리어 성경 로마서] 믿음으로 의인 된 아브라함(롬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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