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원문 성경강해

[누가복음 족보 히브리어 강해] 누가복음 예수님의 족보(눅 3:21-38)

기혼샘 2024. 5. 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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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3장 족보 히브리어 강해 설교 말씀은 누가복음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족보는 상향식 족보입니다. 밑에서부터 하나님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족보는 하향식 족보입니다.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서 예수님까지 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왕 족보이고 누가복음은 의인 족보입니다. 

 

누가복음 예수님의 족보(눅 3:21-38)

 

예수님이 세례 받으심(21-22)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왜 세례를 받았는가? 순종하기 위해 받으셨다. 세례의 제도는 하나님이 내셨으므로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이다(3:15). 세례 요한이 세례 주는 일은 하나님의 의(구원 운동)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므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구원 운동에 참여하는 일이요, 하나님 의의를 이루는 것이다.

모본을 보이시기 위해서이다. 예수께서는 성도에게 모본을 보이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였다(벧전2:21). 하늘이 열리며 신령한 하늘 문이 열린 것이다. 중대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이 열리게 하셨다(행7:56, 계4:1).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성령이 임했다(마3:16). 이는 예수께서 물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없는 데(육지)로 올라오셨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물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물 위로 올라온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이 물에서 땅으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말이 없다. 또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세례의 유례가 물을 뿌려서 정결케 하였으므로 물을 끼얹어서 세례 주는 것이 세례의 뜻에 맞는다.

세례 주다βαπτίζω(밥티조)라는 말은 잠그다”, “적시다”, “씻다”, “씻어서 정결케 하다는 뜻이 있다. 침례교파에서는 잠그다는 뜻에만 국한하여 침례를 주장한다.

세례 주다의 헬라원어가 βαπτίζω(밥티조)인데, 변형되어 βάπτω(밥토), βάπτισμα(밥티스마), βαπτιστής(밥티스테스)라는 말로 성경 여러 곳에 사용되었다. 누가복음11:38에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 하심을……손 씻지나 요한복음13:26의 “한 조각을 찍어다가찍는다βαπτίζω라는 말이 변형된 말이다.

침례교파에서는 잠그다는 뜻에만 국한하여 다른 뜻을 무시해 버리는 것은 원문을 바로 해석한 것이 못된다. “밥티조잠그다는 뜻도 있지만 씻다”, “적시다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단어의 뜻만 가지고는 잠그는 것인지, 씻는 것인지, 적시는 것인지 확실히 나타낼 수 없다. 침례교파에서는 일방적으로 잠그다로만 해석하여 침례만이 참된 세례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체를 무시하고 의식에 치우쳐 침례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줄 때에 사람들을 물에 담갔다가 꺼냈을까? 아니면 물을 떠서 머리에 끼얹었을까?

세례의 기원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전에 없던 세례를 세례 요한이 새로이 시행하였다고 하면 백성들이 당연히 세례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세례는 구약 시대부터 유래한 것이며 세례 요한이 특별히 많이 행한 것뿐이다. 그러면 세례가 구약 시대에 무엇에서부터 유래되었는가? 모세가 송아지의 피를 뿌려 성소를 정결케 하였다(출29:16 참조).

에스겔36: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라고 하였다. , 문둥병 걸렸다가 정결케 된 자는 살아 있는 새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한 마리는 죽여서 그 피를 제사장이 찍어 문둥병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라고 한다(레14:5-6 참조). 이와 같이 구약 시대의 모든 정결케 하는 예식이 모두 물이나 피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도 뿌려서 정결케 하는 예식의 일부였다.

베드로가 하루에 삼천 명이나 세례를 주었는데, 삼천 명을 모두 물에 담갔다가 꺼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는가!

물에 담갔다가 꺼낸다면 철야하여 24 시간 동안 세례를 베푼다고 하여도 삼천 명을 다 세례 주지 못한다. 바울이 다메섹에 가서 금식 기도하다가 아나니아에게 안수 기도를 받고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지 물에 나가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다. 방에서 기도하다가 일어나 세례를 받은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에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16:33 참조). 강에 가서 세례를 준 것도 아니요, 목욕통을 만들어서 세례를 준 것도 아니었다. 즉시 머리에 물을 끼얹어 세례를 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고전10:1-2 참조).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 물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왔는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고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그것을 곧 세례라고 하였다.

침례파에서는 세례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즉 다시 말하면 물속에 들어간 것은 옛사람이 죽어서 장사 지낸 것을 상징하고, 물속에서 올라오는 것은 새 사람이 살아 올라왔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세례의 참 뜻은 씻어서 정결케 한다고 해야 성경 전체의 사상에 맞는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을 때에 꼭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적수 세례가 옳다고 본다. 침례교파에서 적수 세례를 무시하고,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삼위의 이름으로 건전하게 세례 받은 것은 피차간 인정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삼위와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을 취소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의식주의이고 독선적이다.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성령의 모양이 비둘기 같이 생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충만한 분이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한 것은 상징적인 뜻이 있다. 비둘기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새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다. 그러므로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시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게 될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제물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예수님이 아들로서 다 받았다는 뜻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린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계시를 다 받아 은혜와 진리를 우리에게 전부 전달해 주신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완전히 다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구원 운동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족보(23-38)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예수님이 성역을 시작한 연령에 대하여 본 절에서 증명하였다. 30세는 레위인이 성전 봉사를 시작하는 나이이다(민4:3). 30세는 모든 성 역자들이 성역을 맡을 적당한 시기이다. 본 절에서 38절까지는 마태복음 1장과 같이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기록이다.

마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했으므로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기록했으나, 누가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기록했으므로 예수님께로부터 거꾸로 인류의 조상 아담까지 기록하고, 창조자 하나님까지 기록했다. , 누가는 예수님에서부터 인류의 시조 아담까지와 창조주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족보를 기록했다. 마태가 기록한 족보와 누가가 기록한 족보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같으나 그 외 부분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두 사람 외에는 모든 이름이 다르다.

두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마태는 요셉의 족보를 기록하였고, 누가는 마리아의 족보를 기록한 까닭이요, 마태는 이스라엘의 양자 계승 제도, 혹은 계대 혼인제도(25:5-6)대로 기록했고, 누가는 실조(實祖)를 기록한 까닭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실지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고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은 마리아의 아들이다.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마태복음 1장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했다.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인데 요셉이 헬리에게 양자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셉의 실부(實父)는 야곱이므로 마태는 실부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아담, , 에노스, 가이난과 같은 조상을 열거한 것을 보아 믿음의 계통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 분명하다. 믿음에서 서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계통이다. 이것은 누구나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계통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준다.

3:24-27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뿐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이들은 포로 이후의 조상들인데 이 중에 마태와 누가의 족보에 일치되는 것은 스룹바벨과 스알디엘 두 사람뿐이고(27), 그 외는 모두 다르다. 이것은 마태는 요셉의 조상들을 기록했고, 누가는 마리아의 조상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스룹바벨 다음부터 요셉의 조상과 마리아의 조상이 갈라졌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네리가 여고냐의 아들 스알디엘(대상3:17)을 양자로 삼은 경우에 있어서 마태는 스알디엘의 실조를 기록했고, 누가는 스알디엘의 양부(養父)의 조상을 기록한 경우에 두 족보가 달라졌다고 한다(박윤선).

3:28-31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포로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다윗까지 기록되었는데, 마태복음의 족보와 비교할 때에 다윗 외에는 전부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3:32-34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이 부분은 다윗에서 아브라함까지로 마태복음의 족보와 일치한 이름들이다.

3:35-38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이 부분은 아브라함부터 하나님까지의 족보이며 마태복음에는 없는 부분이다. 마태는 유대인을 위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까지만 기록했고, 누가는 전 인류를 위해 기록했기 때문에 인류의 시조 아담까지 소급해서 기록을 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류의 창조자 하나님까지 기록했다. 또한 아담의 아들 가인의 계통은 제외하고 셋의 계통을 기록했는데, 그 이유는 신앙의 계통을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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