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사무엘상 4장 주석 성경말씀] 블레셋과의 싸움(삼상 4:1-9)

기혼샘 2022. 11. 2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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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4장에서는 블레셋과 이스라엘 백성이 싸우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민족에 패하자 다급해졌다.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져왔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를 의지한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의지했다. 본질을 무시한 채 형상만 보게 되었다. 성도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서 죽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빼앗겼다.

 

선지자로 세움 받은 사무엘(삼상 3:19-21)

 

이처럼 사무엘은 하나님의 이상을 잘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가 보다 더 성장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명예로운 기사가 여기에 실려 있다.

 

Ⅰ. 하나님은 사무엘의 명예를 높여 주셨다. 사무엘에게 은혜를 끼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당신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며 이를 빛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매 사무엘이 자랐다”(19절).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의 지혜와 은총이 성장한다. 우리의 성장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1. 하나님은 자신을 사무엘에게 더욱 많이 나타내심으로 그의 명예를 높여 주셨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말씀의 선포를 충실하게 전달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시 사무엘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셨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21절). 은혜롭게도 하나님은 자기를 바르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거듭거듭 자기를 나타내신다.

 

2.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신 당신 자신의 말씀들이 그대로 실현되게 하심으로써 사무엘의 명예를 높여 주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19절). 선지자로서 사무엘이 한 말은 진실한 것으로 나타났고, 제때에 실현되었다. 아마 몇 가지 사무엘의 예언이 확실히 진실한 것으로 증명된 바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났던 것 같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의 사명에 대해 인식을 바르게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말을 응하게 하시며 그의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신다”(사 44:26).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현시키신다.

Ⅱ. 이스라엘이 그의 명예를 높여 주었다. 그들은 모두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받은 것을” 알았으며 이를 시인했다(20절).

 

1. 그는 유명해졌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실로에 온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목하여 보았으며, 그를 존경했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에 관해 서로 말을 많이 주고받았다. 어렸을 때의 경건한 생활은 젊은이의 명예를 크게 높여 주며 그들의 소문을 매우 좋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를 하나님은 영화롭게 해 주신다.

 

2. 사무엘은 사람들을 위해 매우 소용 있는 인간이 되었으며, 그들을 잘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때를 맞추어 선한 사람이 된 그 사람은 곧이어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확고한 사명과, 백성들로부터 받은 그의 확고한 소문은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빛으로 빛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늙은 엘리가 사라지게 되자, 젊은 사무엘이 세우심을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위한 증인이 없이 홀로 계시거나, 그의 교회를 위한 인도자를 없애거나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블레셋과의 싸움(삼상 4:1-9)

 

사무엘과 관련된 이 부분의 첫마디 말씀은 “그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라는 것인데, 이는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와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그들이 블레셋과 싸우러 간 것은 사무엘의 어떤 지시에 의해서 간 것임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비록 그가 새롭게 등장한 선지자이긴 했어도, 그에게 의논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 놓은 것보다 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그를 무시했으며, 그를 통해서 신탁을 구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아직 공적인 일에 자신을 개입시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그로부터 몇 년 후에야 다시 들을 수 있으며(7:3), 여기서는 다만 “그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라고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온 땅에서 모여드는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들만이 그를 의지했으며, 그와 의논했던 것이다.

또는 그의 말이란 엘리의 집에 대한 그의 예언을 의미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예언을 알고 이야기했으며,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 예언과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비교해 보며,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Ⅰ. 블레셋과 싸움이 벌어졌다(1절). 이 싸움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멍에를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회개하고 자신들을 개혁했더라면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며, 바르게 시작했으면 좋은 결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싸움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40여 년 동안 다스리는 기간의(삿 13:1) 중간쯤에 일어난 것이며, 삼손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것이라고 패트릭(Patrick) 주교는 계산하고 있다. 그는 생각하기를 삼손이 죽으면서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살육 한 것이 크게 이스라엘을 고무하여 이런 싸움을 시도하게 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엘리가 오랫동안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을 보아서(18절), 이 싸움은 삼손이 죽은 지 40년 후에 일어난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Ⅱ.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패배했다(2절). 공격해 들어가던 이스라엘이 오히려 크게 살육 당했고, 그 싸움에서 4천 명 가량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한 사람이 천 명을 상대하여 무찌를 수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였다.”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는 가증히 여길 죄악이 편만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이 바라던 승리가 그들의 원수에게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Ⅲ. 그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작전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들의 생활을 고치지는 않고 다른 짓들만 했다. (그런 선생들 밑에서 배웠으니만큼) 그들은 잘못 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그들은 싸움에 진 것을 두고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했다(3절).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패하게 하셨는가?”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게 된 그 까닭을 참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이 비록 이를 시인하고자 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분명히 죄를 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뻔뻔스럽게 충고하고자 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항쟁하고자 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항쟁하고자 하는 것같이 보였다.

그들은 그들의 괴로움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이것만은 그들도 바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를 패하게 하신 이는여호와시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 하는 대신 이에 대해 항의하였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노여움을 표시했고, 그들이 하나님을 노엽게 한 진실한 까닭을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우리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였는가?”라는 말은 진정한 까닭을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 대해 그 처사가 온당치 못하다고 불평을 토로하는 것에 불과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도 마음으로는 여호와를 원망한다”(잠 19:3). 그리고 잘못이 하나님께 있다고 불평한다.

 

2. 그들은 하나님께 궤를 그들의 진영으로 가져오면 다음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그런 제안을 했고(3절), 백성들은 재빨리 그렇게 했다(4절).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도록 실로에 사람을 보냈다. 엘리는 감히 이를 반대하지 못하고 그의 불경스러운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함께 보내 주었다. 아마 엘리는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을 따라 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를 존중히 여기고 있었다. “오! 이를 가져오게 하라.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하나님의 궤란, 제도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인 상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룹들 사이에 계시겠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궤 위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궤와 함께 어디로든지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이 신성한 궤에 대해 그들의 존경심을 최대로 표시하면,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임을 확실히 나타낼 수 있으며 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종교의 진수에서 떠난 자들은 흔히 외적인 종교의 형식만을 좋다 하고 이에 집착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자도 그 형식만을 취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전을 찬양하며, 여호와의 궤를 열심히 붙들고 있지만 그 전의 주인이신 여호와와 그 궤의 임자이신 하나님은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기독교라는 그 이름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표시하면 그 기독교 자체를 무시해도 상관없는 듯이 행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우상화했으며, 그것을 바라보기를 마치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의 형상을 바라보고 예배하듯 한갓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은 그를 전혀 예배하지 않는 것과 같다.

 

(2) 그들은 하나님의 궤에 대해 엄청나게 잘못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그들의 진영에 가져오기만 하면, 그 궤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며”,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① 궤가 행진을 시작하여 떠날 때에 모세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한 바가 있다(민 10:35). 그들은 그 궤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사 그들을 성공시켜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사 그들을 돕게 하는 데는 달리 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껍질만의 궤가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②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움직여도 좋다는 허락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주할 때 그의 궤를 그가 지시하는 곳에 두라고 그의 율법에서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시했다(신 12:5, 11).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으로 와야지, 하나님의 궤를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져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이 그것을 소유해도 좋다는 정당한 법적 근거가 없으며 또 그것을 있는 곳으로부터 옮겨도 좋다는 허락이 없는데 이를 마음대로 옮긴다고 해서 어떤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할 뿐이다.

③ 가령 그들이 하나님의 궤로부터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자. 하지만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은 사람들로 이를 가져오게 할 때 그들은 어떤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하나님의 궤가 그처럼 배은망덕한 제사장들의 손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에 대해 어떤 도움을 준다면, 이는 그들의 잘못을 인정해 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Ⅳ. 하나님의 궤가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진영에는 큰 기쁨이 터져 나왔다(5절).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렸다.” 그들은 이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도 치르기 전에 승전가를 높이 불렀다. 그들은 이처럼 함성을 지름으로써 그들 자신들에게는 생기를 북돋아 주고, 대적들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승리는 확실한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육체적인 인간들은 종교의 형식적인 특전과 실행에 대해 개가를 올리며, 이것들을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들은 마치 이것들이 그들을 틀림없이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으며, 그들의 진영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보좌이신, 하나님의 궤가 그들을 하늘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Ⅴ. 이스라엘 진영에 여호와의 궤가 오게 되자 블레셋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군사들은 매우 가까이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진영에서는 이스라엘이 함성을 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곧 이스라엘이 어찌해서 의기가 양양해졌는지 알 수가 있었다(6절). 그리고 그 때문에 오게 될 결과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1. 왜냐하면 전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신이 그들의 진에 이르렀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화로다.”라고 말했으며(7절), 또다시 “우리에게 화로다.”(8절)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도 두려워 떠는 이름이었으며, 이스라엘과 싸우는 이방인들에게도 두려움이 되었다. 인간의 본능적인 인식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대항하시면 그들은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블레셋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보자. 그들은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궤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진영 중에 전혀 계시지 않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건전한 생각을 가지지 못했던 것인 만큼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오! 이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취했던 어떤 전술보다도 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새로운 시도로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분명히 이는 우리 군사의 간담을 녹게 하고, 그들의 손목에 맥이 풀리게 하겠구나.”

 

2. 예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매우 큰 놀라움을 가져다주었던 일을 기억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8절).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재앙들은 하나님의 궤가 작성되기 이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로 나오기 전에 내려진 것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이야기를 잘못 알고 있었으며, 또 그 놀라움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궤 자체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그 궤를 우상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블레셋 사람들은 그 궤를 하나님 자신이라고 잘못 알고,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능한 신들”이라고 말하기는 하면서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농담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았다면 마땅히 후퇴하거나 아니면 강화조약을 맺을 차비를 차렸을 터인데, 그렇지 아니하였으며, 오히려 서로를 고무하여 더 큰 함성을 지른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이 어려운 처지가 오히려 그들에게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니라”(9절)라고 서로를 고무하게 되었다. 블레셋 군대의 사령관들은 그들의 병사들에게 그들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으로 삼았던 것을 기억하게 하며, 만일 여기서 그들이 위축되어서 이스라엘의 종이 되면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인가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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