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무엘하 16장 주석 강해설교 중에서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으로 선포하고 배반했습니다. 역모를 꾸며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 때문에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압살롬에 의해서 피신할 때 사울의 가문에 한 사람인 시므이가 나와서 다윗을 저주하게 됩니다. 다윗은 시므이에게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다윗은 시므이에게 당한 수치를 잊지 않고 다윗이 죽을 때 솔로몬에게 말합니다. 솔로몬이 시므이를 결국 죽이게 됩니다.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삼하 16:1-23)
=====16: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 여기서 '마루턱'(top of hill)이란 감람 산 마루턱 곧 감람 산 꼭대기를 의미한다.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 - 본래 사울의 종이었으나 다윗의 명에 의하여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자이다 (9:2, 9-11). 그는 성품이 간사하고 교활하였는데, 그의 그 같은 성품은 본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여름 실과 - 여름이 끝나갈 무렵 완전히 익은 열매를 가리킨다(암 8:1,2). 이 실과는 열매 야자수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70인 역(LXX)에서는 '대추야자'(포이닉스)로 번역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열대 지방이나 중동 지방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행 시에 종종 이것으로 갈증을 해소한다고 한다(Keil, Pulpit Commentary).
=====16:2
시바가 가로되...마시게 하려 함이니 이다 - 시바가 현재 압살롬의 반란(15:10-12)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 다윗 왕에게 이처럼 음식물을 공궤한 것은, 아마 압살롬의 반란이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다윗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이같이 많은 음식물을 날라 온 것으로 추정된다(The Interpreter's Bible).
=====16:3
저가 말하기를...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 이와 같은 시바의 말은 철저한 위증(僞證)이다(19:26, 27).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지금까지 왕위 찬탈을 위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데다, 그는 절뚝발이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결격 사유(缺格事由)를 지닌 자였기 때문이다(4 :4 주석 참조)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바가 마치 므비보셋에게 왕위 찬탈에 대한 야욕이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은 물욕(物慾)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즉 시바는 피난 중에 경황이 없는 다윗을 흥분시켜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사악한 목적 하에서 이 같은 모함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4절).
=====16:4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 이는 시바의 악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다윗 왕의 경솔한 결정이다. 그런데 평소 지혜로운 다윗 왕이 이처럼 경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윗은 현재 압살롬에게 쫓기는 입장(15:14)이므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2) 시바가 공궤한 음식(1, 2절)이 다윗을 감동시켜 공정성을 잃게 하였기 때문이다. (3) 다윗에게 다소나마 사울가의 부상(浮上)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Keil). 아무튼 다윗이 미처 사실 여부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이처럼 실언(失言)을 한 것은 크나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데, 실상 아무리 조심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곧 언행(言行)의 신중성이다.
=====16:5
바후림 - 바후림(Bahurim)은 예루살렘에서 감람 산을 넘어 요단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6km 지점이다. 이곳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과거 다윗이 옛 아내인 미갈을 당시의 남편 발디엘로부터 취하여 왔을 때 발디엘이 울며 따라오다가 되돌아간 역사적인 성읍이기도 하다(3 :16).
게라의 아들...시므이 - 사울의 친족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시므이(Shimei)는 자기 지파와 가문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유다 지파인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 됨을 시기하고, 이제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자 이를 반기면서 다윗을 저주하였던 것이다. 물론 시므이는 훗날 압살롬의 반란이 수습되자 다윗 왕을 찾아와 이와 같은 과거의 망령된 행실을 시인하고 다윗의 용서를 받긴 하였다(19:16-23). 하지만 그는 결국 솔로몬 왕 때에 왕명을 어겨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왕상 2:36-46). 우리는 여기서 극단적인 지파주의자 또는 혈통주의자(血統主義者)의 편협한 사상과 그의 비참한 말로를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오늘날 가문, 혈통, 지연(地緣) 등 소아(小我)에 사로잡혀 대아(大我)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표상으로 이 시므이를 들 수 있는 것이다.
=====16:6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 여기서 돌을 던진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이다(Wycliffe). 그런데 시므이가 이처럼 다윗과 그 신복들을 저주하며 돌을 던진 까닭은 다윗이 사울가의 피를 흘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8절). 물론 여기서 '사울가의 피'란 사울 왕의 비참한 죽음이 아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사울의 군장 아브넬의 죽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울 왕의 죽음은 블레셋과의 전투인 길보아 전투에서 생긴 죽음으로(삼상 31장) 다윗 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으나,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죽음은 어느 정도 다윗 왕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3:27;4:6). 즉, 시므이는 여기서 다윗 왕이 과거 이스보셋과 아브넬을 죽인 장본인이며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쇠퇴와 사울가의 몰락의 책임이 바로 다윗에게 있다고 믿으면서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Hertzberg). 그러나 이러한 시므이의 비방은 전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살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주었을 뿐이다(9: 9,10). 따라서 시므이의 이 같은 행위는 그릇된 자기 선입견(先入見)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는 바, 우리는 여기서 선입견의 무서운 실상을 보게 된다.
=====16:7
비루한 자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하벨리야알'을 직역하면 '벨리알의 사람아'란 뜻이다. 여기서 벨리알이란 말은 무익한 것, 무가치한 것, 또는 파괴, 파멸이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아', 또는 '파괴를 일삼는 자식아'란 뜻이다(Wycliffe). 이렇게 볼 때 시므이의 욕설은 보통 사람이면 도저히 참기 어려운 독설(毒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후일 신약 시대에 이르러 벨리알(Belial)이란 말은 사단을 지칭하는 말로 발전되었다(고후 6:15).
가거라 가거라 - 이는 약속의 땅에서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는 욕설이다. 이와 같은 욕은 약속의 땅 가나안(창 13:14-17))을 자신 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믿고 있었던 히브리인들 에게는 아주 악랄한 저주였다.
=====16: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압살롬의 난(15:10-12)이 이스보셋과 아브넬을 죽인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시므이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다윗을 정죄하고 있지만 실상 그의 정죄는 정하지 못하며, 지극히 감정적이며 무지에 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의 책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삼상 15:28).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압살롬의 난 역시 다윗의 사적(私的)인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벌이었기 때문이다(12:10, 11).
=====16:9
아비새 - 요압의 동생으로(2:18), 다윗 왕의 조카이자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다(3:30;10:10).
죽은 개 -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적 은어(隱語)이다(3:8;9:8 주석 참조).
=====16:10
스루아야의 아들들아 - 스루야(Zeruiah))는 아비새의 어미이다(2 :18). 그런데 여기서 '아들들'이란 복수(plural number)로 보아 아비새 곁에는 그의 형 요압도 함께 있었던 것에 분명하다. 요압은 아마도 시므이를 단칼에 목 베어 버리자는 아비새의 의견(9절)을 지지했을 것이다.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아비새의 제의(9절)를 일축해 버리는 말로서, '나의 생각과 너희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왕상 17:18; 수 22:24).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 시므이의 악독한 저주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는 다윗의 모습이다. 즉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은 물론 시므이의 저주까지 포함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사건들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그의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2:10-12)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고 철저히 근신(謹愼)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과거 실수한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 인간에게 당하는 억울함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저질렀던 자기의 추악한 죄를 먼저 생각하는 다윗의 새로운 신앙 자세가 아닐 수 없다.
=====16:11
내 몸에서 난 아들도...이 베냐민 사람이랴 - 이는 시므이의 저주 역시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윗의 역설(力說)이다. 즉 자신의 아들 압살롬도 자신에게 반기(反旗)를 들었는데(15:10-12), 하물며 다른 지파 출신인 시므이가 자신에게 저주한 마디 한 것쯤이야 하나님의 징계 치고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반문이다.
=====16:12
나의 원통함...그 저주 까닭에...갚아주시리라 -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고 있는 본 구절에는 '원통함'과 '저주'라는 용어가 서로 대조되고 있다. 이 중 '원통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인'은 죄, 사악한 행동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과거 다윗이 실제로 범했던 죄(11장)를 의미한다. 반면, '저주'는 시므이가 다윗에게 행한 저주를 의미하는 바, 곧 다윗이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가의 피를 흘린 자라는 저주(7, 8절)를 받은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자기가 이러한 수욕(受辱)을 묵묵히 감수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가해진 과다한 저주를 기억하셔서 자기를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현재 자기의 억울한 형편을 정확히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일정한 징계의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위기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13
저를 향하여...티끌을 날리더라 - 여기서 '티끌을 날리다'는 말은 '먼지를 일으키다'는 뜻이다(공동 번역). 즉 시므이는 다윗 앞서 행하면서 다윗을 모독하는 의미로 짐짓 그 앞길에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흙먼지는 다윗은 물론 시므이 그 자신의 머리 위에도 덮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 우리는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 역시 흙먼지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즉 그것은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가 합당치 아니한 것일 때 그 저주는 도리어 저주를 발했던 시므이에게로 되돌아갈 뿐이란 사실이다(12절).
=====16:14
곤비하여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예핌'은 '피곤하다'는 뜻의 동사 '아이프'의 형용사형으로, '피곤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다(KJV). 그런데 혹자는 '아예핌'이 여기서는 지명(地名)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본절에서 '샴'이라고 하는 지시 부사가 사용되었음을 든다. 즉 이 '샴'이란 용어는 '거기에서'란 뜻으로, 다윗과 그 일행이 휴식을 취한 한 장소를 지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이 중 어느 견해가 보다 타당한지는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문맥에 큰 변동은 없다. 다만 '아예핌'을 고유 명사로 볼 경우, 17:18, 21에 의거할 때 '아예핌'은 바후림을 지나 요단 강 근처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6:15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 여기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란 압살롬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을 의미한다(19:9, 10). 한편 압살롬 반역 사건과 관련, 본서 저자는 압살롬을 지지하는 자들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다윗을 지지하는 자들을 '모든 백성'으로 표현하고 있다(15: 17, 23, 24;17:2, 3) 그런데 본 저자가 이와 같이 표현한 까닭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이 압살롬을 왕으로 받아들여 압살롬의 세력은 이스라엘 건국에 걸쳐 확장된 반면, 다윗의 경우에는 각 지파들로부터 소수의 지지자들만이 그를 따랐음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Pulpit Commentary).
예루살렘에 이르고 - 15:37에서 언급한 상황을 다시 한번 반복,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이는 다윗과 그 일행이 황급히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자(15:14) 압살롬이 반역의 도배(徒輩)들을 이끌고 헤브론(15:9-13)에서 예루살렘으로 무혈 입성(無血入城)한 것을 가리킨다.
아히도벨도 저와 함께 이른지라 - 이는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아히도벨로 말미암아 모종의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전조(前兆) 구절이다. 즉 이는 아히도벨의 사주로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겁탈하는 사건(20-23절)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도입 구절이다.
=====16:16
아렉 사람 후새 - 아히도벨에 버금가는 다윗의 모사(謀士)이다. 다윗의 명을 좇아 압살롬에게 거짓 투항한 그는(15:32-37) 아히도벨의 모략을 꾀하는 데 성공함으로써(17:1-23), 압살롬의 반역을 종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18장).
왕이여 만세 - '왕이여 만세수(萬世壽)를 하옵소서'란 뜻이다. 공동 번역은 이를 "임금님, 만수무강을 빕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압살롬에 대한 후새의 이와 같은 환영은 앞으로 압살롬의 조변에서 지내면서 다윗을 위해 활약할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일 뿐이다(Wycliffe).
=====16:17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 자기를 환영하는 후새에게 일단 의심을 품고 그의 진의(眞意)를 떠보기 위해 질문하는 압살롬의 조롱 섞인 말이다. 즉 이 말은 "네가 내 밑에 들어오는 것은 네 친구인 다윗을 배반하는 처사가 아니냐"는 의미이다.
=====16:18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 - 자기에 대한 압살롬의 의심을 불식(拂拭)시키기 위해 후새가 압살롬의 정권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후새가 이 같은 말을 했다고 해서 진심으로 압살롬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마치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처럼 이스라엘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당시 압살롬의 상황(15:6, 12) 만을 주관 없이 전달 함으로써 자기의 의중(意中)을 감추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후새에게 있어서 압살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인정받지 못한 단순한 반란자였을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표면적으로 압살롬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듯한 후새의 대답은 반란 주모자인 압살롬의 마음을 충분히 흐뭇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즉 압살롬은 후새의 아첨에 마음이 동하여 그를 측근에 두고 만 것이다(17:5).
=====16:19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 자신이 전왕(前王) 다윗에 이어 압살롬을 새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왕위 계승법상(繼承法上) 아주 당연한 것이라는 후새의 그럴듯한 주장이나. 즉, 압살롬은 당시 다윗의 장자였기 때문에 다윗을 이어 왕이 된다는 것은 당시 주변 국가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은 아직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엄연히 생존해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릇된 주장이다. 그러나 후새의 말에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 행세를 할 수 있는 그럴듯한 정당성을 발견한 압살롬은 더 이상 후새를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16:20
모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 여기서 '가르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하부'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너희 들은...가르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압살롬은 아히도벨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여러 모사들에게도 모략을 베풀라고 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12-23절). 그렇지만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략 중 압살롬에 의해 최종적으로 채택된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이었음이 분명하다(21-23절). 한편, 여기서 압살롬이 신하들에게 모략을 베풀라고 한 것은 곧, 자신이 탈취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략을 일러달라는 의미이다.
=====16:21
왕의 아버지가...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 -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갈 때 궁을 관리하고 지키게 할 목적으로 남겨 두었던 열 명의 후궁들을 가리킨다(15:16).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 아히도벨의 이러한 모략은 다윗의 폐위(廢位)를 명확히 함과 동시에 압살롬의 왕권을 완전히 굳히기 위한 작전이었다. 즉, 왕위 찬탈자들이 자신의 왕권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전왕(前王)의 후궁들을 취해 동침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보편적 관례였다. 따라서 아히도벨은 이러한 당시 근동 지방의 관례에 따라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케 함으로써 그의 왕권을 가시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강하여 지리이다 - 이와 같은 아히도벨의 말은 그의 모략 속에 압살롬의 왕권의 가시화 외에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음흉한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1) 아히도벨의 모략은 압살롬의 왕권의 가시화뿐만 아니라 다윗과 압살롬 간의 부자지정(父子之情)을 완전히 끊어놓기 위함이었다. 즉 만일 압살롬이 부친의 첩들을 취한다면, 이것이 야말로 부자지간의 상봉(相逢)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는 확실한 계략이 되는 것이었다(창 35:22;49:4). (2) 그리하여 압살롬과 함께 반역에 동참한 모든 자들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려란, 다름 아니라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라도 하는 날에는 자기들이 모조리 반역자로 몰리어 처벌되고 말 것이라는 염려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히도벨은 압살롬 추종자들이 안심하고 새 왕을 좇을 수 있도록 새 왕권의 완전한 독립성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3) 그 밖에도 아히도벨의 이러한 모략은 다윗 왕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즉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조부라는 사실이 거의 분명하므로, 우리는 아히도벨이 밧세바를 강탈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까지 모살한 다윗 왕(11장)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기회가 오자 다윗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아히도벨의 이와 같은 모략은 세상 사람들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할 때 분명 사악한 궤계가 아널 수 없다. (1) 근친상간(近親相姦)을 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했다는 점이다(레 18:7, 8) (2)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삼상 16:1-13)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점이다.
=====16:22
지붕에 - 이 지붕은 다윗이 목욕하던 밧세바를 바라보고 음욕을 불태웠던 곳인 다윗 성의 왕궁 지붕(11:2), 바로 그곳일 것이다.
장막을 치니 - 따가운 햇볕을 괴하면서 시원한 바람을 즐기기 위해 평평한 지붕 위에 텐트(tent)를 친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와 관련 당시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에 대하여서는 대하 33:1-11강해.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를 참조하라.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더불어 동침하니라 - 나단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는 순간이다(12:11).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죄에 대한 징계로서 장차 그의 처들이 백주(白晝)에 겁탈당할 것이라고 선고하셨는데, 이제 아히도벨의 불의한 모략에 의하여 그 같은 심판이 그대로 성취되고 만 것이다.
=====16:23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이와 같더라 - 여기서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이란 대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알아낸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5 :19, 23;삿1:1;18:5;20:18, 23, 27). 따라서 아히도벨의 모략이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는 말은, 그의 모략이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통해 받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처럼 다윗과 압살롬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같은 아히도벨의 모략은 비록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는지 모르나, 압살롬에게는 악정(惡政)을 일삼도록 만든 촉진제 구실을 하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이 현명한 머리는 지니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선한 양심은 지니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아히도벨의 지혜는 병든 양심에 사로잡힌 것이었으므로 그가 베푼 지혜는 필연적으로 파괴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언 5장 주일 성경말씀] 음녀와 음행을 피하라(잠 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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