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마음의 문을 열자라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교회입니다. 미지근한 교회로서 주님의 입에서 토해 버린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신앙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교회입니다. 영적으로는 잠을 자고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돈이 많아지고 나니 영적으로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영적으로는 잠을 자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잠에서 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했습니다.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니 주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영안이 열려서 영적 맹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복음 말씀으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제목: "마음의 문을 열자" (라오디게아 교회)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계 3:14-22
요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주제: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요하나 회개하여 흰 옷을 갈아입고 영적 안약을 바르자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계 1:11) 가운데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the church of the Laodiceans)에 주신 편지를 읽겠습니다. 계 3:14-22 합독합시다.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계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 3:18 내가 너를 원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의 욕망을 버리지 못해 주님으로부터 가장 책망을 많이 받았고 칭찬은 전혀 받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핀 빌라델비아 교회와 대조적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말씀을 지켰고 배교하지 아니했으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큰 능력(사이즈 면이나 재정적으로)을 가져 물질의 부요함과 의학기술이 뛰어나 세속적 자부심이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2000년 교회사로 해석한다면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 서머나 교회는 속사도시대 교회, 버가모 교회는 박해시대 교회, 두아디라 교회는 중세초기, 사데교회는 중세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는 개혁시대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19세기 계몽주의부터 현대교회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묵상할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 재림하기 전까지 오늘날 우리 교회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헬라어 ‘라오디케이아(λαοδικεία)’는 라오스(λαός 백성) + ‘디케(δίκη 정의, 공의)’의 합성어로 ‘백성이 다스리는 공의(옳은 판단)’ ‘백성이 심판을 함’이란 뜻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니골라당(νικόλαος)이 ‘백성을 주관하다, 다스리다’의 뜻이고, 버가모 교회의 발람(בלעם)이 ‘백성을 통치하다’는 뜻의 반대어로 주권이 백성에게 있음을 말합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Philadelphia)에서 동남쪽으로 약 7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에베소에서는 동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맞은편 북쪽으로 약 9km 떨어진 곳에는 히에라볼리(Hierapolis "태양의 도시")가 있어 많은 양의 석회질이 오랫동안 물속에 침전돼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비경입니다. 약 100m 높이에 이르는 백색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자연 장관은 멀리서 보면 마치 만발한 목화송이로 뒤덮인 것 같아 '목화성'이란 뜻의 '파묵칼레(Pamukkale)'로 불립니다.
당시 부유하게 살았던 라오디게아인들은 돌 송수관으로 뜨거운 물을 끌어들여 사용했답니다. 시내까지 흘러 들어오면서 식어서 미지근한 물로 되어 이 도시의 영적 상태가 차지고 않고 덥지도 않는 “미지근한(lukewarm, neither cold nor hot)” 것으로 책망을 받습니다. 현지에서 만난 터키인들은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한 온천수는 물맛도 없을 뿐 아니라 불순물이 많아서 이 물을 마신 사람들이 구토를 일으키거나 병을 앓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14킬로에 떨어진 골로새는 사도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로가 목회한 곳으로 바울은 자신의 선교지로 여기고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골 4:15∼16).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새 사람이 될 것을 간청하는 사도 바울의 심정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3∼15).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수도 에베소(Ephesus)에서 동쪽 수리아(Suria)로 가는 길에 있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 중 하나입니다. 그 길은 에베소 해안에서 시작해 약 2,800미터 높이의 중앙 고원을 올라가는 길인데, 깎아지른 듯한 메안델 강의 협곡을 피해 완만한 리쿠스(Lycus) 계곡을 거쳐야 아시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BC 2,000년경 그리스 본토에서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로 이주한 이오니아인들에 의해 세워져 디오스폴리스(Diospolis) 혹은 로아스(Rhoas)라고 불렸으나, 알렉산더 대왕 사후 시리아를 중심으로 세워진 셀류쿠스(Seleucus) 왕조 안티오코스 2세(Antiochus Ⅱ, B.C. 262-246년경)가 BC 261년과 253년 사이 도시를 재건하면서 자신의 부인인 라오디케(Laodike)의 이름을 따 라오디게아라 했답니다. 현재 라오디게아 유적지에 가보면 아치형 건물의 잔해와 비잔틴 시대의 교회 터, 2개의 극장 등의 흔적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핀 대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목회서신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의 천사(unto the angel of the church of the Laodiceans): 라오디게아에 복음을 전한 이는 사도 바울의 선교 동역자며 골로새 교회를 담임했던 에바브라였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 시대 때 목회를 하고 있었던 목회자는 사도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계 3:14)
(2)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 모습: 계 3:14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the Amen, the faithful and true witness,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God)가 이르시되”
① 아멘 이신 주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사 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②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주님은 진실하시며 초지일관 변함이 없으십니다.
요 14:6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Faithful and True)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faithful and true). 주 곧 대언자들의 영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사 55:4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witness)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leader)와 명령자(commander)로 삼았나니"
렘 42:5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a true and faithful witness)이 되시옵소서.”
③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입니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히 12:2 “믿음의 시작이요 또 완성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계 1:8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22:12-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마지막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창조의 근본이신 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창조가 크게 흔들릴 것을 아셨기 때문에 배교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피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셨습니다.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도 창조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무시되고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세기 암흑기 이후에 사탄이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가 끝난 후, 이 세상에는 무신론 세력이 급격하게 올라왔습니다. 중세기 천년 동안 하나님과 신앙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와 환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1798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교황 피우스 6세를 옥사시켰으며, 바티칸의 땅과 소유를 몰수해 버리면서 종교와 성경을 부인하는 사상이 크게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상이 사라졌으며,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과 학문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벨하우젠이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는 고등 비평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철학자 니이체는 “하나님은 죽었다”는 사신(死神) 신학을 주장했으며, 1855년에 챨스 다윈은 <종의 기원 The Origin of the species>을 발표해서 창조를 부인하고 진화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탄은 진화론을 퍼뜨림으로써 큰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실험실 안에서 증명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험실에서 증명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부족한 인간의 과학으로 증명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계시록을 통해서 지구 역사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주관되어 왔음을 입증해 보이십니다. 우리는 과학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서 무신론 세력이 아주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무신론 세력은 공산주의라는 정치 철학을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무신론 세력은 학문으로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무신론이 인본주의(휴머니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학계에 들어가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인본주의란,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에서는 하나님보다 인간이 먼저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은 오늘날 모든 교육 이념에 깊이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그토록 비종교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예배에도 인본주의가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entertainment) 예배가 성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술집과 댄스 클럽에서조차 세상 음악에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꿔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크리스천 록이라는 음악까지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탄의 음악은 엇박자이며 술과 성교와 마약에 중독하도록 하며 시끄럽습니다.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면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 때문에 세계 선교에 큰 도움을 받았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한 물질의 풍요와 재물의 축적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창조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온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과학과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이 가장 강력한 우상이 되었습니다. 사탄은 온 세상을 진화론, 인본주의, 무신론, 재물, 안일함, 이기주의 그리고 바쁜 삶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중세기에는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거짓 교리와 핍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했는데, 마지막 시대에 들어오면서 사탄은 교회를 세속적으로 만들고, 돈과 세상을 사랑하는 넓은 길을 걸어도 구원받을 것처럼 미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지라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미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신앙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짐승의 환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깊이 살펴서 마음이 크게 부흥되고 깨우침을 받지 못하면, 사탄에게 미혹을 받아서 잃어버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성경의 바른 번역을 버리고 가톨릭이 변개한 성경번역이 판을 칩니다. 진리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암 8:11-12)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3) 책망의 말씀 (계 3:15-18)
칭찬의 말씀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모두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배교의 길로 걷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환난을 통과하고, 일곱 재앙을 통과하며, 아마겟돈 전쟁을 치루어야 할 교회가 전혀 준비 없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깊은 잠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의 성취가 주님의 재림인데 이를 앞두고 있으면서, 종말 대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보낸 종들은 어떤 복음을 가르치고 무엇을 강조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먼저 문제를 통렬하게 지적하면서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주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해결책을 온 마음과 생애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메안더 강 지류인 루커스 강 연안에 위치한 브루기아 주(州)의 교통, 무역, 금융의 중심지며, 면직과 모직 산업이 발달했던 도시입니다. 이런 여건으로 라오디게아는 재력이 풍부한 도시가 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이곳 주민들은 부족함을 몰랐고, AD 60년경에 발생한 대지진 때도 자력으로 피해를 복구할 정도로 재력이 탄탄했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는 연고로 된 안약 제조 기술이 유명했는데, 안약 제조 학교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실상은 가난하고 눈이 멀었다.’라고 지적하면서(계 3:17)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고 영적 무지를 깨우친 것은 이런 지역적 배경에서 나온 말씀으로 보입니다.
① 미지근한 영적 상태를 책망하십니다. (계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죄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전혀 모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을 가리키는 영어 ‘laodicean’은 ‘신앙적으로나 하는 일에 있어서 열정이 없는 사람’, ‘매사에 미온적인 사람,’ ‘미지근한 사람’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북쪽 20여리에 위치한 히에라폴리스('목화성‘)에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온천이 유명했고 골로새에서는 높은 산,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생수가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라오디게아는 남쪽으로 6마일 떨어진 데니즐리에서 물을 끌어와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했습니다.
이 물은 미네랄 성분이 많은 온천수의 일종이었지만 물의 온도는 미지근했습니다. 아마도 거리가 가까운 것과 우선 쓰기에 좋도록 물이 미지근했다는 것이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보면 주께서 왜 이 교회를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책망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 그것은 뜨거운 열정은 없지만 냉철한 진리 파수의 지성이 강한 색채의 신앙으로 본다면, 히에라폴리스의 물은 온천수로 뜨거웠는데, 이는 뜨거운 열정적 신앙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라오디게아에서는 온천과 냉천이 혼합되어 미지근한 물이 되었는데, 교회의 신앙이 열정이 식어지고 냉정한 분위로 섞여있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이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하면 눈이 나빠져서 안질에 걸린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미지근한 신앙을 토하여 내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엘리야 선지 시대 때 백성들처럼 한발은 여호와 신앙, 한 발은 바알 신앙을 자기들이 편리한 대로 양다리 걸치기 자세를 주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 없는 감사를 하니 물고기가 그를 니느웨에 토하여 내쳤습니다(욘 2:10).
② 물질적 부자이나 영적인 문제투성이를 책망하십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wretched)과 가련한 것(miserable)과 가난한 것(poor)과 눈먼 것(blind)과 벌거벗은 것(naked)을 알지 못하는도다.
예수님의 눈에는 너무나 비참한 상태인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잘못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생애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볼 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읽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예언에 대해서 눈멀어 있고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개혁자들이 사용하던 성경(안디옥 학파)을 읽어야 합니다. 바른 성경,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신학, 바른 성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곤고하고 가련하다”라고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방언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마음속에 비밀스러운 우상을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돈의 우상, 자녀의 우상, 명예의 우상을 품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서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도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암흑 가운데 있으면서도,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태에 있으면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한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 받은 사람은 죄와 세속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라는 교리에 강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느껴야 구조 요청을 할 텐데, 거의 완벽한 자기만족과 자기기만 속에서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험이 어디 있을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거짓 구원론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4) 권면의 말씀(계 3:18-20)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주님께서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세 가지 치료제와 처방을 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보내신 종들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께서 보내신 종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지적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치료방법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 문제를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 들면서 성도들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책망과 치료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먼저 치료받고 회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있는 “들을 귀 있는 자들”이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①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a.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예수께서는 불로 연단한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사는 것일까요? 예수께 가야만 이 세 가지 모두를 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치 값진 보화를 짊어지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상인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각 개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처방을 사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세 가지 처방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세 가지 처방을 받아들여야만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b.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가장 가난하지만 부자라고 생각하고 가장 부족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벌거벗고 있지만 흰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입니다. 놀라운 기만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라오디게아 교인들 대다수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벌거벗고 있고 때문에 자신이 벌고 벗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멀어 있으면 자신이 눈멀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옷을 입고,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의 즉, 흰옷을 입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에 나아가 자신의 삶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본 그리스도인은 간절한 심령으로 자신의 온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었”고(엡 2:1),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여 성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사 1:4, 5). 그래서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맡겨서 고침 받기를 간절하게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심령으로 주 앞에 나가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해 주시는 거듭남의 경험을 주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4, 5).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되면 가련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은 영적 질병이 치료되고, 그때부터 우리 안에 있는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참된 중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그의 뜻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흰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c.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석회질이 있는 물이 안질을 유발시킵니다. 안약을 사서 눈을 치료해야 합니다. 영적인 안약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입니다. 바른 성경을 통해 바른 영적 눈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시력이 회복되었던 청년처럼 말입니다(요 9:1-7). 여리고의 바디매요가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막 10:46-52).
②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지금,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이 권면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마지막 교회에서 이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안타까움은 당신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 안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③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예수님께서는 마음 문밖에 계셔서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신다고 할지라도, 내가 마음 문을 열어드리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성화를 자세히 보면 문 밖에서는 고리가 없어 열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에서만 열어야 문이 열립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야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교제를 나눌 수 있는데 주님께서 문밖에 서 계시기 때문에 그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예수님의 위치는 마음 문밖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 각 개인을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5) 약속의 말씀(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구원의 특권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3가지 처방으로 치료를 받으면, 믿음을 통하여 깨끗하고 하얀 의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 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를 싫어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성도들에게 이기는 경험을 주실 것입니다.
(6) 영적 음성을 들으라(계 3:22)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성령님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사람이 있고, 문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선택은 각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음의 문을 어떻게 두드리실까요? 어떤 때는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면서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죄를 지적하면서 두드리시고 어떤 때는 양심의 가책으로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두드리십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발걸음과 경험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믿음을 주시고, 흰옷을 입혀주실 것이며, 안약을 발라 눈을 떠서 영적인 세계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위한 교회로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경험을 퍼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게 하듯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 속에서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흰 옷으로 갈아입고, 영적인 안약이 바른 말씀을 회복하여 영적 세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문 밖에서 지금도 노크하시는 주님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님께서 내 속에, 내 중심 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요한계시록 3장 주일설교말씀] "흰 옷을 입자" -사데 교회(계 3:1-6)
[요한계시록 주일설교말씀] "죽도록 충성하자"-서머나교회(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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