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삶을 위한 교훈들(잠 25:17-28)
잠언 25장에서는 지혜로운 삶에 대해서 교훈한다. 인생을 살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한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고 했다. 사람을 참소하지 말라고 했다.
17-20절, 이웃 왕래, 거짓 증거, 불신실, 동감
[17절]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는 원문(호카르 라글레카 밉베스 레에카)은 “네 발을 네 이웃의 집으로부터 드물게 하라”는 뜻이다. 이웃집에 자주 드나들지 않고 드물게 하는 것이 지혜자의 처신이라는 말이다. 이웃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하지 못하고 남에 대한 말도 하기 쉽다.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또 사람마다 개인의 시간계획이 있고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 사람에게 30분 혹은 1시간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큰 일이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게 행동하지 말고 남을 생각하고 예의를 가져야 한다. 남의 시간을 필요로 할 때에는 먼저 정중히 양해를 구해야 하고 전화도 꼭 필요한 경우,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하신 이웃 사랑의 원리에 맞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상대를 배려한다(고전 13:4-5).
그러나 상대방의 구원을 위한 접촉이나 방문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상대방의 영혼 구원은 가장 귀한 일이므로 그 일을 위해서 접촉하고 방문하는 것은 우리가 기회를 잡아 힘써야 할 귀한 일이다.
본문은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한다. 특별한 일 없이 이웃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이웃에게 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야지 귀찮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선하고 흠 없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18절]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그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로 비난하고 해치는 자는 그 이웃을 방망이로 때리고 날카로운 칼로 베고 뾰족한 화살로 쏘아 찔러 죽이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하셨다(출 20: 16). 거짓말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행동이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뱀을 통해 거짓말로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를 범죄케 하였고 아담과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창 3장). 주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거짓말은 마귀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남을 치는 거짓 증거는 교만과 미움에서 나온다. 교만은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만들며, 미움은 남을 해치고 죽이게 한다. 미움과 살인은 멸망의 죄악이다.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했다(요일 3:15). 성경은 거짓말하는 자와 살인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되고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1:8,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 증거는 매우 큰 죄악이다.
[19절] 환난 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違骨)된 발 같으니라.
‘진실치 못한 자’라는 원어(보게드)는 ‘배신자, 불신실한 자’라는 뜻이다. 그는 양심적으로, 진리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 입장을 바꾸고 관계를 변하는 자이다. 그는 우리가 부요하고 형통할 때는 친근히 하다가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즉 물질적 어려움이 있고 환경적 재난이 닥칠 때에는 등을 돌리는 자이다.
환난날에 배신자, 불신실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齒](쉔 로아)[나쁜 이](NASB, NIV)와 위골(違骨)된 발(레겔 무아뎃)[뒤뚝거리는(tottering) 발](BDB) 같다. 이나 발은 몸에 꼭 필요한 지체이지만, 부러진 이 혹은 나쁜 이는 음식을 씹는 기능을 잘 못하는 이이며 뒤뚝거리는 발은 걷는 기능을 잘 못하는 발이다. 그것들은 쓸모없고 오히려 통증이 있어서 고통과 짐이 되는 지체들이다. 이와 같이, 환난날에 배신자, 불신실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며 오히려 마음에 고통과 짐이 되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님 안에서 신실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그의 진리 안에서 의리를 지키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사랑엔 거짓이 없고(롬 12:9), 또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사람은 실상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하고 떠나간다. 그러므로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요 2:24).
[20절]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
추운 날에는 옷을 더 입어야지 옷을 벗으면 더 추울 것이다. 또한 소다 위에 초를 붓는 것은 서로 맞지 않는 두 물질을 잘못 섞는 것이며 그것은 소다를 녹여 그것을 쓸모없고 효능이 없게 만든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위로하기는커녕 그의 마음을 더 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지 말고 은밀히 그를 위해 기도하든지 혹은 함께 기도해야 하며 또 그에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성도는 고난 중에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다른 사람과 마음을 같이해야 한다. 그것이 온유와 겸손의 마음가짐이요 사랑의 마음가짐이다. 경건한 욥은,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말했다(욥 30:25). 사도 바울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하며(고전 12:26),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교훈하였다(롬 12:15-16).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體恤)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고 교훈하였다(벧전 3:8). 우리는 서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고,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한 자가 되자. 우리는 이웃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되고 부담을 주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이웃을 미워하거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특히 이웃에 대해 거짓된 말로 증거하지 말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진리 안에서 서로 신실한 친구가 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자.
우리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지 말자. 이웃과 생각을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하자.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자. 그것이 겸손하고 온유하며 사랑이 있는 성도의 바른 마음가짐이다.
21-24절, 원수 사랑, 참소하는 혀, 다투는 여인
[21-22절]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본문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는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원수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구원하셨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도 비슷한 내용을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전통본문). 누가복음 6:27-28,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도 바울도 교훈하기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다(롬 12:20-21).
핀 숯을 머리에 놓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핀 숯이 쇠를 달구듯이 그의 선행이 원수의 마음을 감동시켜 회개케 하고 변화시킴을 뜻할지도 모른다. 원수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상대에게 악을 행했는데 상대는 자기에게 선을 행하기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가 그래도 변하지 않으면 그가 원수에게 한 선행이 도리어 그의 머리에 놓여진 하나님의 진노의 숯불이 된다는 뜻도 포함할 것이다.
본문은,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사랑의 선행에 대해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23절] 북풍이 비를 일으킴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일으킨다’는 원어(테콜렐)는 ‘가져온다’는 뜻이라고 한다(BDB). 고대 헬라어 70인역이나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이 그런 뜻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옛날 영어성경(KJV)은 ‘몰아낸다’(drive away)고 번역하였고 주후 170년경에 번역된 헬라어 구약성경인 시마쿠스역이나 라틴어 벌게이트역이나 어떤 유대인 학자들(아벤 에즈라, 죠셉 킴치)의 지지를 가진다(카일-델리취). ‘참소하는 혀’라는 원어(레숀 사세르)는 ‘은밀한 혀’라는 말로 ‘은밀히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혀’라는 뜻이라고 본다(BDB).
한글 본문은, 북풍이 비를 일으키듯이, 은밀하게 남을 헐뜯는 혀가 비난당하는 당사자나 바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분노케 만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혹은, 본문의 뜻이, 옛날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북풍이 비를 몰아내듯이, 노한 얼굴은 남을 헐뜯는 혀를 몰아내느니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팔레스틴 땅의 북풍은 보통 비가 없는 바람이라고 한다. 팔레스틴 땅에는 보통 서풍이나 남서풍이 비를 가져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문은,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은밀히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을 듣지 않고 그 앞에서 화를 내면 그는 다시 와서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디모데전서 3:11은,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이 참소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24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21:19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비슷한 내용을 말한다. 다투는 여인은 성격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람은 욕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하고 다툰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불만도 없고 다툼도 없을 것이다.
여성의 가치는 경건과 선함과 온유함 등의 덕성에 있다.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경건함이 여성의 귀한 덕임을 증거한 것이다. 또 잠언 12:4는, “어진[덕스러운]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하며, 디모데전서 2:9-10은,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덕스러움과 선행을 여성의 아름다움과 가치로 증거한 것이다. 또 베드로전서 3:4는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성경은 검소함, 절제, 근면의 덕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예쁜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실상 사람의 외모보다 그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 사람의 인격은 외모보다 훨씬 중요하며, 영혼은 그의 인격을 형성한다. 결혼의 행복은 가정의 평안과 사랑에 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우리는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자.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끝까지 선을 베풀며 선으로 악을 이기자. 이것이 하나님께서 본을 보이신 바요 우리에게 교훈하신 선한 삶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또 우리에게 와서 은밀히 남을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화를 내어 쫓아내는 것이 좋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외모보다 내면성, 인격성에 두자. 모든 성도들 특히 여성도들은 경건과 선함과 온유함의 덕을 갖추도록 힘쓰자.
25-28절, 좋은 기별, 의인의 굴복, 영예, 마음 제어
[25절]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집안 사정이 어려워 대학갈 형편이 못 되었던 시골 가정의 한 학생이 서울에 올라와 몇 년 동안 자취하며 학원에서 칠판 지우고 지우개 털고 청소하고 고생하면서 어깨너머로 공부하듯 틈틈이 공부하여, 서울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부모님께 전해드릴 때, 아들의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부모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가.
모든 사람은 목마른 자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셨다(사 55:1). 주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6). 모든 사람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목말라 있고 또 의와 영생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천국 복음은 먼 땅에서 오는 가장 좋은 기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소식이며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할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했다(딤전 1:15).
하나님의 복음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생수와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가성의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요 4:10, 14).
[26절]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우물이나 샘은 먹는 물이다. 의인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 잠언 10:11은,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고 말한다. 물이 흐리어짐과 더러워짐은 물을 못 먹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의인이 의를 지키지 못하고 악인의 위협과 핍박 앞에 굴복하여 불의를 용납하고 타협하고 절충하는 일이 있다. 경건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죽음의 위험 때문에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었다. 사도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었다. 그것들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크게 실망시킬 만한 일들이었다. 그런 일들은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다.
사람들은 의인의 말과 행위를 통해 의가 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악이 득세할 때 슬퍼하고 탄식한다. 잠언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에스겔은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고 지적했다(겔 34:18).
우리는 고난이나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과 의를 지켜야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사자굴의 위협과 풀무불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였다(단 3장, 6장). 주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5:10-11). 환난날에 필요한 것은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다(계 13:10).
[27절]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꿀은 달고 맛있는 좋은 음식이다. 성경은 지혜를 꿀에 비유하였다. 잠언 24:13-14는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 . .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고 하였다. 또 다윗이나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표현하였다(시 19:10; 119:103).
본문은 영예를 꿀에 비유한다. 영예는 좋은 것이며, 불명예나 수치는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2:1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라고 했고, 전도서 7:1도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말했다. 로마서 2:7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갚으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은 꿀을 적당히 먹어야 한다고 교훈했다. 잠언 25:16은,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절제를 교훈한 것이다. 음식뿐 아니라, 영예도 그러하다. 영예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사람들은 영예를 위해 외식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남에게 악을 행하기도 한다. 그것은 세상적 욕심이며 세상적 사랑이다. 전도서 1:2는 “[세상의 일들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말하였고, 또 요한일서 2:15-17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했다.
[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마음’이라는 원어(루아크)는 ‘영’이라는 뜻이다.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 등 영의 활동이다. 사람이 자기의 영과 마음을 제어하고 다스린다는 말은 절제를 가리킨다. 자신을 절제하는 사람은 훌륭한 인격자이다. 그는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이다. 이사야 26:3은, “주께서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않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다.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은 외부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와 같다. 그는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과 세상의 악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벽 곧 바른 우주관, 인생관, 가치관이 필요하고 경건과 의의 생활규칙이 필요하다. 또 경건과 의를 실천할 힘과, 불경건과 죄를 버릴 힘이 필요하며, 끊을 것은 끊고 피할 것은 피하고 힘쓸 것은 힘쓰는 결단력과 절제가 필요하다.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고전 6:12; 10:23), 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다(고전 9:25).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악 간에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실상,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며(갈 5:22-23)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덕성이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보내주신 복음은 영적으로 목마른 모든 죄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기쁘고 복된 구원의 소식이다. 우리는 이 복음을 널리 전하자.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다. 우리는 악인 앞에 굴복하지 말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과 의를 지키고 범죄치 말자. 우리는 신앙의 본을 보이자. 순교도 각오하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예와 영광은 좋은 것이지만, 세상 명예와 영광을 구하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구하지 말자.
우리는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훌륭한 인격자가 되자.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의와 선을 행하며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자.
[히브리어 성경 열왕기하 말씀] 생도의 과부에게 베푼 엘리사의 기적(왕하 4:1-7)
'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엘하 8장 설교말씀] 다윗의 정복 전쟁과 내각 조직(삼하 8:1-18) (0) | 2022.11.19 |
---|---|
[레위기 5장 설교말씀 모음] 가난한 자의 속죄제 제물과 규례(레 5:1-19) (0) | 2022.11.13 |
[시편 100편 추수감사절 설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시 100:1-5) (0) | 2022.11.12 |
[사무엘하 3장 주석 강해설교] 아브넬을 죽인 다윗의 군장 요압(삼하 3: 1-39) (0) | 2022.11.10 |
[출애굽기 5장 성경 강해설교] 가중된 이스라엘의 고난(출 5:3-23) (0) | 2022.11.08 |
[구약 성경주석 창세기 5장 강해] 셋부터 노아의 족보(창 5:6-20) (0) | 2022.11.06 |
[신명기 25장] 곡식 떠는 소와 공정한 도량형에 관한 규례(신 25:1-19) (0) | 2022.11.02 |
[이사야 38장 주일설교말씀]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기도(사 38:1-22) (0) | 2022.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