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8장에서는 의인의 현명함과 복된 삶에 대해서 말씀한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탐심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성도는 항상 복음 말씀을 듣고 악에서 떠나야 한다.
의인, 악인 칭찬, 경책, 구제(잠 28:1-28)
[1절]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본문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이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며 선을 행하는 자이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 그것은 그의 양심의 불안과 가책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양심은 조물주 하나님의 음성이다. 또 악인은 하나님께서 내리실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그들을 치셔서 그들이 그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그들을 미워하는 자가 그들을 다스릴 것이며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레 26:17). 또 그는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사 48:22). 악인에게는 심적 평안도, 몸의 평안도, 환경적 평안도 없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은 일리가 있다. 도둑은 밤에 편히 잠을 못 잔다.
그러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 그것은 양심의 평안 때문일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도우시고 지키시고 갚아주실 것을 믿고 또 그렇게 체험한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였다(시 3:5-6). 그래서 주의 사도들은 핍박 중에도 담대히 전도했고 순교의 자리에도 나아갔다(행 4-5장). 우리가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담대함을 얻는다(요일 3:21). 우리는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는 악인이 되지 말고, 사자같이 담대한 의인이 되자. 그를 위해 믿음과 거룩과 의와 선으로만 살자.
[2절]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본문은,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나라에 죄가 있으면 주관자, 즉 교만하여 대장 노릇하려는 자들, 소위 뱃사공이 많아진다. 인간의 죄 속에는 교만이 있고 거기에서 불순종의 죄가 나오며 그 결과는 무질서와 분쟁과 분열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20-21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 . .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라에 의가 있으면 사람들은 겸손의 미덕을 갖추고 계명에 순종하며 사회의 질서를 지킨다. 사람이 부족하고 불완전하므로 갈등이 없을 수는 없으나 토론하며 평안을 찾을 것이다(행 15장, 예루살렘 총회).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이다(갈 5:22-23).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단합해야 한다(엡 4:1-3).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온유하고 유순하다(약 3:17). 우리는 다 이런 지혜와 덕을 사모해야 하겠다.
본문은,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함으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이다. 이런 자가 사회의 참 지도자이며 또 교회에 합당한 직분자이다. 그런 자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그 나라가 장구하게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질서가 유지되고 의의 길로 진행하며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형통할 것이다. 잠언 29:4, 1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우리는 범죄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와 선을 행함으로 지혜를 얻어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자.
[3절]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본문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는 보통 자신이 가난해 보았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사정을 더 잘 동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도 가난한 자이면서도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인정이 없는 자가 있다. 그는 인격이 매우 나쁜 자, 인격 형성이 잘못된 자이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와 같다. 태풍이나 허리케인 같은 것은 폭우를 동반한다. 그런 폭풍우가 지나가면 농작물이나 집들이 크게 손상된다. 가난한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지는 못할 망정, 그를 학대하다니 얼마나 나쁜 마음인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선하고 착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18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멸시한다. 그러므로 잠언 12:10은,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다.
의인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않는다. 의인은 도리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선대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자들의 마땅한 바이다. 그러므로 잠언 14:31은,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한다. 또 잠언 29:7은,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인정 없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선대하며 살자.
[4절]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본문은,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고 말한다. 율법을 버린 자는 율법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으로 존중치 않고 무시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무시하는 자이며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치 않는 자이다. 그런 자는 악인을 칭찬한다. 악인은 율법을 어기는 자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노여워하시는 자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를 칭찬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충고하고 권면하고 책망할 일인데, 율법을 버린 자는 악한 자를 칭찬하는 것이다. 로마서 1:32는,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말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러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다고 말했다(렘 23:14).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에게 평안을 선포하였고,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셨다(렘 23:17; 겔 13:22).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한다. ‘대적한다’는 원어(이스가루)는 ‘다툰다’는 뜻이다(BDB, KJV, NASB). 율법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존중하고 지키는 자이다. 그는 악인과 동감하지 않고 악을 칭찬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의견충돌이 있고 그와 다툰다. 그는 악인에게 충고하고 권면하고 책망할 것이며 마침내 그와의 교제를 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율법을 지키자. 우리는 악인을 칭찬하지 말자. 악인에게 권면하고 책망하고 교제를 끊는 것도 두려워 말자.
[5절]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본문은,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경건하고 악하게 사는 자이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한다. 공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그는 공의를 저버린 자이므로 심령이 어두워져 공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공의를 깨달았다면, 그는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을 얻는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며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하며 또 그의 긍휼과 힘을 구하는 자이다. 시편 34:8, 10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하고, 시편 107:9는,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한다.
특히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깨닫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것,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119:18). 주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주님의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7:17). 또 그는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며, 또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다(요 14:26; 16:13). 또 요한일서 2:27은, 모든 신자 속에 계신 기름부음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했다. 우리는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찾고 좋은 것을 얻고 특히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고 그 공의를 힘써 행하는 자가 되자.
[6절]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성실히’라는 원어(베숨모)는 ‘온전함으로, 순전함으로, 흠 없이’라는 뜻이다. 성실히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경건하고 의롭게, 도덕적으로 온전하게, 흠 없이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반대로, ‘사곡히 행하는’이라는 원어(익케쉬)는 ‘바른 길로 가지 않고 비뚤어지게 행하는, 사악하게 행하는’이라는 뜻이다.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낫다.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에 있지 않다(눅 12:15). 자색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즐기는 생활을 했던 부자는 거지 나사로보다 못한 자이었다. 그는 죽어 지옥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멸시하고 압제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약 2:5-7).
인간의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물질적 부요가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사랑이다. 또 인간은 물질에 관해서는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6:7-8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의 의식주의 기본적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기 백성에게 먹을것과 입을 것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16-33). 성도의 생활지침은 오직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사곡하게 행하며 물질적 부요를 얻으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온전하고 흠 없이 살아가자.
[7절]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본문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고 말한다. 율법은 사람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다. 그것을 지킨다는 말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고 그것을 보수하고 믿고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다. ‘지혜롭다’는 원어(메빈)는 ‘명철하다, 총명하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자란 하나님의 뜻과 인생의 정로(正路), 평강과 행복의 길, 불행과 멸망을 피하는 길을 깨닫고 분별하는 자다.
‘탐식자’라는 원어(졸렐림)는 ‘탐식자, 낭비하는 자, 방탕한 자’라는 뜻이다. 돈을 벌 줄 모르고 돈을 쓰기만 잘하는 자, 사치하고 연락하며 허랑방탕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들과 사귀는 자는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15:33은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를 욕되게 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언제나 좋은 사람이 될까?” 하고 근심하며 노하게 될 것이며, 또 “저 아이는 뉘 집 아들이냐?”는 이웃의 비난을 듣고 수치와 마음의 고통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근면하게 사는 것이다. 근면은 사람의 정로(正路)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명하셨다(출 20:9). 사도 바울도 신자들에게 “종용하여[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명했다(살후 3:10). 성도는 또한 검소하고 절약하며 살아야 한다. 음식도 먹을 만큼 만들어 먹는 것이 좋다. 그래야 가난한 이웃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또 탐식하거나 낭비하거나 방탕하지 말고, 근면하고 절제 있게 살아가자.
[8절]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본문은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치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중한 변리로’라는 원어(베네쉐크 우베사르비스)는 ‘고리대금과 변리로’라는 뜻이다(BDB, KJV). 고리대금은 보통 가난한 자들을 상대하여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재산 증식의 정당한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리대금을 금하셨다. 레위기 25:36-37은,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라,”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빌려주지] 말라”고 말씀한다. 재산 증식의 정당한 방식은 각자의 직업에서 근면하게 일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본문은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의인들에게 주신다. 욥은, “[악인이] 비록 은을 티끌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할지라도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욥 27:16-17). 잠언 13:22도, “선인(善人)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고 말하였다. 악인은 망하고 그 재산은 결국 의인들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신명기 15장은, 우리가 가난한 형제들에 대해 반드시 손을 펴서 그의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고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그에게 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7-11절). 에베소서 4:28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중한 변리로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정당하게 의롭게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돈을 벌자. 또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자.
[9절]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본문은,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경외치 않고 존중치 않고 사랑치 않고 섬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을 수 있고(롬 10:17)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는데, 그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니 어떻게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겠는가? 사람이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 잠언 1:24-33은,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귀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며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 신명기 6:4-5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잠언 1:8은,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사무엘상 15:22-23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신다(마 13:9 전통본문). 율법을 듣지 않는 자의 기도는 가증하다. 우리는 율법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10절]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본문은,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진다”고 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남도 죄 짓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하는 행위와 같다. 그런 일을 행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공의의 징벌과 보응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공의로 갚으신다. 본문은 그러나,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는다”고 말한다. ‘성실한 자’라는 원어(테미밈)는 ‘완전한 자들, 온전한 자들,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그의 뜻을 순종하며 의롭게 선하게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남에게 악을 행치 않는 자이다. 그들은 결코 남을 악한 길로 이끌지 않고 오직 선한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고(창 17:1) 예수께서도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8). 노아는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자이었다(창 6:9). 욥도 순전하고[완전하고] 정직한 자이었다(욥 1:1). 우리의 성화의 목표는 인격적 온전함이다.
성실한 자는 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복 주신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편 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道)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욥이 그러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 책망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되고, 또 남에게 악을 행치 말고 오직 그를 선한 길로만 인도하자.
[11절]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겨도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를 살펴 아느니라.
본문은,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고 말한다. 사람은 물질이 많으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교만해지기 쉽다. 주위에 아첨하는 친구들도 그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일을 거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혜롭게 여긴다. 그러나 실상, 그는 참 지혜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물질적 부요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잠언 23:4-5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했고, 디모데전서 6:17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교훈한다. 본문은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를 살펴 안다”고 말한다. “그를”에 ‘그’는 부자를 가리킨다. 가난한 자가 다 명철한 자는 아니다. 가난해도 어리석은 자일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을 통해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많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고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다고 말했다(약 2:5).
명철한 가난한 자는 부자를 살펴 그의 지혜 없음, 그의 믿음 없음, 그의 교만한 죄, 그리고 그의 허무함을 안다. 우리는 모든 육체가 풀이요 그의 모든 영광이 들의 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사 40:6).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소망 외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전 1:2).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외에 세상의 모든 일이 실상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요 6:27). 우리는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또 물질로 인해 높은 마음을 가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의 계명만 힘써 행하자.
[12절]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본문은,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다”고 말한다. ‘득의하다’는 원어(알라츠)는 ‘(뜻을 이루어) 기뻐하다’는 뜻이다(BDB, KJV).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교훈을 행하는 자마다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인들이 잘 되고 높임을 받고 다스리면 그 나라와 백성에게 큰 영광이 있을 것이다. 잠언 11:10도,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고 말하고, 또 잠언 29:2도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고 말한다. 경건한 다윗이 통치했을 때 이스라엘 나라에는 큰 영광이 있었다. 의로운 모르드개가 악한 하만을 대신해 높임을 받았을 때, 성경은 수산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였고 유다인들에게는 영광과 기쁨이 있었다고 기록했다(에 8:15-16).
그러나 본문은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는다”고 말한다. 잠언 28:28도,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고 말한다. ‘일어난다’는 말은 세력을 잡는 것을 뜻한다. 그때 아첨꾼이나 기회주의자들은 나설 것이지만, 진실한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는다. 그것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양심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게, 합리적이지 않게, 자기 이권을 따라, 자기 감정을 따라 말하며 행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상대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 시대는 어두운 시대이다. 아하시야의 모친 악한 여자 아달랴는 그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왕의 씨들을 다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다. 그때에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는 고모의 도움으로 성전에서 숨기어 자랐다. 독재 권력자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이가 통치하면 선한 사람들이 숨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의인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쓰며, 또 의인들이 기뻐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복된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자.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본문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다”고 말한다. 죄를 짓고도 안 지었다고 속여 말하며 자신의 범죄를 감추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은밀한 일을 다 보시고 심판하시는 자이시기 때문이다(전 12:14). 사람은 죄를 지으면 결코 복되지 않다. 아간이 여리고 정복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노략한 물건 중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그의 장막의 땅 속에 감추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이 성의 패전이라는 쓴잔을 맛보게 하셨다(수 7장).본문은,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실제로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죄 없는 자가 없으나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자가 있고 회개치 않고 용서를 받지 못하는 자가 있다.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그는 죄의 용서와 기도의 응답과 도우심을 받는다. 다윗은 선지자의 지적을 받았을 때 즉시 회개하였고 죄의 용서를 받았다(삼하 12:7, 13). 또 그는 시편 32편에서,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고 말하였다(시 32:3, 5). 또 삭개오도 회개할 때 구원을 받았고(눅 19:8-9), 십자가상의 한 강도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긍휼을 구할 때 그 날 낙원에 들어감을 얻었다(눅 23:41-42). 요한일서 1:9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숨기려 하지 말고 자복하며 버리자. 열심히 회개하자. 몸이 더러워지면 씻을 줄 알면서 더러운 죄는 왜 회개치 않으랴!
[14절]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본문은,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나 들을 때에 겸손과 두려움으로 받고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경외해야 한다. 간혹이나 주일에만이 아니고 날마다, 시간마다,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렸고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안 지으려고 애썼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여전히 날마다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다니엘도 이방 나라에서 왕의 인정과 높임을 받았다.
본문은 “[그러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고 말한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란 마음이 높고 닫혀 있고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은 자이다. 그는 재앙에 빠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재앙에 빠지게 하셔서 그 높은 마음을 낮추시고 그 완고함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롯의 사위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다가 결국 소돔성 사람들과 함께 유황불비에 멸망을 당하였고, 예루살렘 거민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하다가 마침내 다 멸망을 당하였다. 우리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항상 겸손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일상생활에서 그 말씀을 힘써 행하자.
[15절]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본문은,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고 말한다. ‘주린’이라는 원어(쇼케크)는 ‘배회하는’(BDB, KJV), ‘돌진하는’(rushing)(NASB)이라는 뜻이다. 부르짖는 사자나 먹이를 덮치려고 배회하거나 돌진하는 곰은 참으로 무서운 짐승이다.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그와 같다. 선한 관원은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다스리겠지만, 악한 관원은 부자에게는 아첨하고 너그럽게 대하나 가난한 자는 무시하고 압제하고 강탈하고 억울하게 만들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부자뿐 아니라, 가난한 자도 만드셨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신다는 것과 또 그가 하늘에서 다 보시고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악한 관원은 물질욕 같은 세상의 욕심 때문에 부자들에게 아첨하고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학대하고 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이시요 보호자이시다. 시편 68:5는,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억울한 눈물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며, 압제하는 악인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했던 아합을 전쟁에서 죽게 하셨고 그 아들 70명은 하루아침에 몰살(沒殺)을 당하게 하셨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압제하는 악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자.
[16절]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본문은,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한다”고 말한다. ‘무지한 치리자’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직무와 또 자신의 부족을 알지 못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다. 그는 선함과 친절, 긍휼과 인정이 없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권위만 내세우고 자기 감정대로 행하며 남을 부당히 취급하며 압제하고 학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또 사랑은 온유하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다(고전 13:4-5). 본문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한다”고 말한다. ‘탐욕’이라는 원어(베차르)는 ‘불의의 이익, 또는 탐심’이라는 뜻이다. 탐심에서 속임과 다툼이 생긴다. 우리는 탐욕을 미워하고 정당한 소득으로 살며 자족해야 한다. 이런 자는 불만이 없고 항상 감사할 수 있고 또 절제하며 살 수 있다. 바울은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다(행 24:25). 권세자는 탐욕을 품고 사치하는 살기 쉽기 때문에 그런 주제를 강조했을 것이다.
‘장수한다’는 말은 ‘그의 날들을 연장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심령에 평안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탐욕은 불만을 낳으나 자족함은 감사와 평안을 낳을 것이다. 자족하며 사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도 몸의 건강과 장수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그런 통치자의 나라는 평안하며 그의 통치 기간도 오랠 것이다. 잠언 29:4는,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고 말하며, 잠언 29:14는,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한다. 또 그런 경건한 의인들은 또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무지한 치리자처럼 포학과 탐욕에 빠지지 말고, 선함과 친절, 자족과 절제로, 또 범사에 감사함으로 살아가자. 그것이 복된 삶이다.
[17절]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
본문은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사람의 피를 흘린 자’를 정죄한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며 하나님의 인격적, 도덕적 형상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살인은 매우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이며 그의 창조사역의 기본을 짓밟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9:6은,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살인 자체뿐 아니라, 마음의 미움, 시기와 질투, 입술의 독한 말, 거짓된 비방, 중상모략 등도 심히 악한 것이다. 그것들은 결국 살인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증거하였다(요일 3:15).
본문은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말한다(KJV, 한글개역). 이 번역은 살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근래의 어떤 영어성경들은 “죽을 때까지 도피자가 되리라”고 번역했다(NASB, NIV). 살인자는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 악을 보복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를 막지 말지니라”고 말한다(KJV, 한글개역). ‘막는다’는 원어(타마크)는 ‘붙들다’(grasp)(BDB, KB), ‘지지하다’(support) (NASB, NIV)는 뜻을 가진 말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반드시 임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를 드러내시며 때가 되기 전까지 악의 확산을 막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악을 행치 말고, 남을 미워하지도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오직 의와 선만 행하자.
[18절] 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본문은 “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고 말한다. ‘성실히’라는 원어(타밈 םי)는 ‘온전하게, 정직하게(uprightly)(KJV), 흠 없게(NASB, NIV)’라는 뜻이다. 성실히 행하는 자는 경건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근면하게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완전한 자이었다(창 6:9). 욥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순전한 자이었다(욥 1:1). 성실히 행하는 자, 즉 온전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은 특히 고난으로부터의 구원, 즉 질병이나 궁핍이나 원수들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선하게 사는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선한 인도하심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힘과 지혜,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며 원수들의 공격이나 예기치 못한 위험한 일을 막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질 것이다. 사곡히 행하는 것, 즉 항상 부정적이고 비뚤어지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의 성격과 인격의 결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오랫동안 그냥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곧, 머잖아 실패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순수하게, 순진하게, 단순하게, 무슨 일이나 가급적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물론 무슨 일이든지 조심하고 살피고 시험하고 확인해보아야 하며 그것이 지혜이지만, 그러나 너무 부정적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편 32:2는,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나다나엘에 대해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좋게 평가하셨다(요 1:47). 우리는 사람이나 사물을 너무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게 보지 말고, 항상 정직하게, 온전하게, 흠 없게 생각하며 말하며 행동하자.
[19절]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본문은,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고 말한다. 잠언 12:11에도 비슷하게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수고를 하는 자, 즉 자기의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는 먹을것이 많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수고한 만큼 거둘 것이다. 많이 수고하면 수확이 좀더 많을 것이다. 시편 128:1-2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복은 근면한 자에게 주어진다. 사람이 부지런히 자기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은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되었다(창 3:19).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출 20:9).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했고, 데살로니가전서 4:11은,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였다.
그러나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을 것이다. ‘방탕한 것’이라는 원어(레킴)는 ‘헛된 것들’(BDB, NASB), ‘허랑방탕한 것들’을 가리킨다(삿 9:4). 방탕을 좇는 자는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헛된 것들을 구하며 방탕하게 사는 자이다. 그런 자는 크게 궁핍할 것이다. 허랑방탕하여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탕진하였던 탕자는 흉년이 오자 돼지 쥐엄 열매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해졌었다(눅 15:13). 우리는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처럼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놀고 먹고 즐기듯이 헛된 것들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20절]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본문은,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말한다. ‘충성된 자’는 믿음이 있고 믿을 만하고 거짓이 없는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믿음이 있고 믿을 만한 진실한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그런 자를 장려한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실 것이다. 그는 심령의 평안과 기쁨, 몸의 건강, 물질의 여유, 아내와 자녀들 등 가족의 복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바이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 성읍에서나 들에서의 복, 자녀의 복, 토지 소산의 복, 우양(牛羊)의 복, 떡반죽 그릇의 복, 그리고 들어와도 받고 나가도 받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신 28:1-6).
그러나 속히 부유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짧은 시간에 부자 되려고 하는 자이다. 사람이 짧은 시간에 부자가 되려 하기 때문에, 부정당한 방법, 불의한 방법, 투기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으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정정당당하게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더러운 욕심 때문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명 순종의 의보다 세상 물질을 원하기 때문이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형벌을 면하다’는 원어(닉카)는 ‘깨끗하다, 죄 없다, 형벌을 면하다’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정하신 의로운 생활규칙인 계명을 어기는 자마다 정죄를 받으며 하나님의 내리시는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의롭고 정당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불의하고 부정당한 방법으로 또 거짓되이 속히 부자 되려 하지 말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음과 순종을 가진 충성된 자가 되자.
[21절]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본문은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한다. 사람의 낯을 보아준다는 말은 상대방의 얼굴 때문에 편벽되이 판단하여 불의를 용납하고 그것을 두둔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바르고 객관성이 있는 선악판단을 해야 한다. 의(義)는 의라고 판단하고 그렇게 말하고 악(惡)은 악이라고 판단하고 그렇게 말해야 한다. 레위기 19:15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라”고 말한다. 잠언의 여러 구절들은 이 진리를 확실히 증거한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18:5,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잠언 24:23,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유다 왕 아사는 모친이 우상숭배를 하므로 징벌하여 태후의 위를 폐하기까지 하였다(왕상 15:13).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다”는 원문은 영어성경들처럼 “이는 사람이 한 조각 떡을 위해 범법함이니라”(KJV, NASB)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 말씀은 사람이 물질적 욕심 때문에 자기의 작은 이익을 위해 사람의 낯을 보아주고 잘못 판단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권력자나 부자의 낯을 보아서 판결을 굽게 한다든지,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는 세상 이익을 초월해야 하고 항상 공명정대하게 살아야 한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잠 16:8). 우리는 모든 욕심을 버리자. 욕심은 사람을 시험에 빠지고 범죄하게 만든다. 우리는 오직 공의롭게 살자. 그것이 바르고 복된 삶이다.
[22절]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다”고 말한다. 악한 눈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자의 눈이다. 그런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다. 그는 부자를 부러워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다. 그러나 선한 자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본다. 잠언 21:26,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구제]하느니라.” 잠언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본문은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왜 악한 눈이 있는 자에게 빈궁이 임하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권적으로 섭리하신다. 악한 자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대비치 못하다가 큰 낭패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선악의 문제는 결국, 눈의 문제 곧 마음의 문제이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 그것은 또 지식의 문제이며 가치관의 문제이다. 우리는 선한 마음과 선한 눈, 즉 바른 지식과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마태복음 6:19-34에서, 주께서는 몇 가지 요점들을 교훈하셨다. (1) 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2)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3) 눈은 몸의 등불이다. (4) 탐심은 눈을 어둡게 한다. (5) 사람은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6) 의식주를 염려하지 말라. (7)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는 선한 마음과 선한 눈을 가지자.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계명에 순종하자. 우리는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구제하자.
[23절]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본문은,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고 말한다. 떠도는 풍문과 추측으로가 아니고, 사실에 근거하고 성경적, 이성적 판단으로 상대의 부족이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은 그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책망을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책망을 듣는 자는 당장에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지만, 책망은 결과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적을 받고 책망을 받은 점을 생각할 기회를 가지고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될 것이다. 책망은 유익을 줄 것이다. 상대방을 책망하는 것은 그에 대한 참된 사랑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망 듣기를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1:23은,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고 말하며, 잠언 6:23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하고, 또 잠언 19:20은,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고 말한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는다. 혀로 아첨하는 말은 당장에는 듣기 좋고 기분이 좋을 수 있으나, 우리의 잘못이나 부족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도리어 우리가 옳다고 착각에 빠지게 만들며 우리로 교만케 만든다. 거짓 선지자들이나 나라의 간신배들은 아첨하는 말을 잘한 자들이다. 그래서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를 책망하는 자가 참으로 우리의 좋은 친구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잘못에 더욱 빠지게 만드는 아첨의 말을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사랑으로 충고하고 필요할 때는 책망도 하는 자가 되자.
[24절]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
본문은,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고 말한다. ‘도적질하다’는 원어(가잘)는 ‘강탈하다’는 뜻이다(KJV, NASB, NIV). 본문은 부모의 물건, 즉 부모의 토지나 집이나 보물이나 현금을 강제로 빼앗고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자를 정죄한다. 부모의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모의 소유와 자녀의 소유는 구별되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준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은 자녀의 것이 아니다. 본문은, 부모의 물건을 강탈하고도 죄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라고 말한다. ‘멸망케 하는 자’라는 원어(이쉬 마쉐키스)는 ‘(도덕적으로) 부패시키는 자’(BDB), ‘파괴하는 자’(KJV, NASB, NIV)라는 뜻이다. 그는 부모에게 악을 행하고 부모를 해치는 자, 부모의 인격과 재산과 행복을 파괴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도덕 질서를 파괴하는 죄인이며 악인이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고 명하였다. 레위기 19:3은,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말하였고, 디모데전서 5:4는, “(자녀나 손자들로)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말했다. 불효는 큰 죄악이다. 부모의 물건을 강탈하는 것은 불효 이상의 죄악이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하며 남에게 선을 베풀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포함한다. 부모 공경의 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 관계의 계명 중 첫째 계명이다. 경건이 윤리의 기초이며 가정 윤리는 사회 윤리의 시작이다. 가정 윤리는 바로 세워져야 사회 윤리가 바로 세워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또 부모의 물건, 즉 토지나 집이나 물건이나 현금 등을 강탈하는 악을 범해서는 안 된다.
[25절]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본문은,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탐하는 자’라 원어(레카브)는 ‘넓은 자, 교만한 자, 탐하는 자’라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교만한 자’(KJV), ‘거만한 자’(NASB), 또는 ‘탐하는 자’(NIV) 등으로 번역했다. 이 말은 잠언 21:4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는 말씀에서는 ‘교만한 것’이라고 번역되었다. 두 가지 뜻이 다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마음이 교만하거나 마음에 탐심이 있으면 다툰다. 그러므로 잠언 13:10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했고, 야고보서 4:1-2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하였다. 사랑과 온유 겸손과 절제에서는 화합과 일치와 단합이 있지만, 교만과 미움과 욕심에서는 다툼과 분쟁만 일어난다.
본문은,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교만하고 탐욕적인 자는 하나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의지하는 자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며 자신을 부정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풍족하게 될 것이다. ‘풍족하게 된다’는 원어(예둣솬)는 ‘기름지게 되다’(KJV), ‘형통하다’(NASB, NIV)는 뜻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복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의식주의 필요]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우리는 교만한 마음이나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겸손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되자. 거기에 참 평안이 있고 영육의 풍족함이 있다.
[26절]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본문은,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다(렘 17:9). 그러므로 그런 마음을 믿는 자는 무지한 길로 가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로 가고 자기의 그릇된 행동을 합리화시키며 자기 욕심을 따르며 가식과 위선으로 위장한다. 경건하고 바른 생각과 소원을 품은 자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죽을 때까지 그를 따르겠다고 고백했으나 여종 앞에서 그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본문은, “[그러나]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고 말한다.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사람이나 물질이나 세상 권세나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경말씀의 교훈대로만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이다. 그렇게 하면, 그는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 어려움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는 아파도 건강의 회복을 얻을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 건강의 길이다(잠 3:7-8). 그는 실직해도 다시 취직할 길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는 궁핍이 없을 것이다(마 6:33). 그는 경제 파탄을 당해도 다시 일어날 것이며, 원수의 핍박이 심해도 보호를 받을 것이며, 위험한 길을 만나도 피할 길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도우시기 때문이다(시 91:1, 3). 노아는 온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는 중에서도 그와 그 가족이 구원을 받았고, 욥은 큰 재앙에서 승리하였고, 다윗도 극심한 고난을 이기고 왕이 되었고, 다니엘도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구원을 얻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믿지 말고 지혜롭게 행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말씀만 순종하자.
[27절]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본문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구제하는 것이다. 신명기 15:7-10은 우리가 우리와 함께 거하는 가난한 형제에게 반드시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또 주께서도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교훈하셨다(눅 12:33). 의인은 구제에 힘쓰는 자들이다. 시편 37:21은,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고 말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10에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증거하였다.
구제에는 복이 따른다.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을 것이다. 신명기 15:10은,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였다. 시편 37:25-26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고 말했다. 잠언 11:25는,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했고,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빌려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구제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 본문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니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25:31-46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께서는 형제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구제하지 않은 자들이 장차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야고보서 4:17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했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제하는 자는 복되다. 그러나 구제치 않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28절]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본문은,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남에게 해를 주는 자이다. 악인이 일어난다는 말은 악인이 인정을 얻고 세력을 얻고 공직에 등용되고 직분자가 되고 활동하며 활개치는 것을 말한다. 악인들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는다. 잠언 28:12도,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고 말했다. 일반 사람들은 양심과 양식이 있고 어느 정도 도덕성이 있다. 그들이 숨는 이유는 악인들과 어울림으로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하기 싫고 또 그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싫기 때문일 것이다. 악인들은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비방하고 해치고 남의 소유를 강탈한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는다. 아모스 5:13은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악인이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한 악인이 멸망하면 다른 악인이 그것을 천벌 곧 하나님의 징벌로 느껴 회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징벌하실 때, 사람들은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것이다(시 58:11). 그러므로 이사야 26:9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고 말한다. 또 악인이 멸망하면 숨었던 의인들이 나타나고 등용되고 활동하게 됨으로써 의인이 많아질 것이다. 역대상 12:22는, 다윗이 왕위에 오른 뒤, 사람들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함으로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다고 기록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며, 또 세상은 악해질지라도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진실한 의인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하자.
[교회의 전도 방법 교육 성경공부] 전도 시 질문과 구원의 복음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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