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에서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둠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어둠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성도는 빛이신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요 8:1-59)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성수하여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감사와 찬양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드리러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분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Enter into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into his courts with praise: be thankful unto him, and bless his name.” (시 100:4, 참고. 시 92:1, 95:1-2, 105:1-2, 106:1-2 등).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9-20)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화를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5-17)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입니다(In every thing give thank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concerning you. 살전 5:18) 감사의 씨앗은 또 다른 감사의 열매를 맺으며, 감사를 생활화하면 행복의 지수가 최고로 높아집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고 남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영어에 감사하다(thank)와 생각하다(think)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한번 더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창의적이고 진취적이며 생산적입니다. 감사하면 모든 질병이 떠나갑니다. 감사하면 문제가 잘 해결되며, 불평하면 문제가 엉키며 꼬입니다.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감사가 입술과 몸에 배여 있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며 표시하는 것입니다.
헬런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년, 88세, 미국의 작가, 교육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는 당시 여성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를 받은 최초의 3중 장애우 즉 시각, 청각, 시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헬런 켈러는 미국 앨라배마 터스컴비아에 있는 아이비 그린 농장의 저택에서 남부 동맹의 전직 사무관인 아버지와 남부 동맹 장군이었던 찰스 W. 애덤스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스위스에서 이민 왔답니다. 생후 19개월 후에 의사로부터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위와 뇌에서의 급성 출혈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고 이 병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그녀는 평생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7세에 자기보다 14살 많은 앤 설리번(Anne Sullivan = 본명 Johanna Mansfield Sullivan Macy, 1866~1936)를 가정교사로 만난 후 49년 동안 지도를 받았답니다. 설리번 선생도 한때 시각 장애로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Perkins School for the Blind)에 다니면서 재수술을 받아 시력이 회복되었지만 이 학교에서 졸업을 한 후 그 이듬해 헬런 켈러를 만나 평생 그녀를 지도하면서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퍼킨스 학교를 졸업하고 캠브리지 여학교를 거쳐 20세에 라드크립 대학(Radcliffe College)에 입학하였고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은 1963년 이전에는 여학생들이 입학할 수가 없어서 여학생 입학을 위해 설립된 학교가 바로 Radcliffe College(하버드 정문 건너편에 위치)입니다. 헬런 켈러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평생 장로교인으로 살면서 신앙의 힘으로 승리하였습니다. 헬렌 켈러는 말년에 삶에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13가지로 고백했습니다.
(1)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2)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4) 인간의 성격은 편안한 생활 속에서는 발전할 수 없다. 시련과 고생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은 단련되고 성공의 발판이 된다.
(5) 희망은 인간을 성공으로 인도하는 신앙이다. 희망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도 없다.
(6)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져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7) 비관론자 치고 별의 비밀을 발견하고 미지의 땅을 항해하고 인간 정신의 새 지평을 연 사람은 없었다.
(8)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은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
(9)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작다. 함께 할 때 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있다.
(10) 세상이 비록 고통으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힘도 가득하다.
(11)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는 것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 만족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삶의 목적을 위해 충실하게 행동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12) 모든 사람들이 며칠간만이라도 눈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경험을 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축복할 것이다. 어둠은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하고 침묵은 소리를 듣는 기쁨을 가르쳐 줄 것이다.
(13) 눈을 사용하라! 내일은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일 살아간다면 평소에는 당연시했거나 보지 못했던 세상의 경이로움을 새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요한복음 8장을 강해합니다. 일주일간 초막절 축제를 마치고 팔일째 되는 날을 ‘심캇 토라 Simchat Tora’ 즉 ‘오경 말씀의 기쁨’의 날입니다. ‘토라(오경 Pentateuch)를 기뻐하다’는 뜻으로 작년 초막절 마친 날부터 읽어야 할 토라를 한 번씩 완독한 것을 기뻐하며 축제를 가진 날입니다.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를 디아스포라고 부름)만 완전한 명절로 지키는 즐거운 명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리야(aliya)를 받을 때까지 토라의 마지막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며, 이어서 ‘베레쉿(Bereshit, 창세기 1장)’을 읽습니다. 이날부터 내년 초막절 마지막 날까지 매주 읽어야 할 토라를 일독하기 시작합니다. 지난 한해동안 토라를 다 읽고 난 것을 감사하면서 회당 안에서 ‘하카폿(Hakafot)’이라는 토라 행진을 합니다. 이 날은 춤추고 노래하며 박수치는 날이므로 평소 회당에서 지키던 전통적인 규칙들은 잠시 덮어두게 됩니다.
1.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심(요 7:53-8:11)
(7:53)(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8:1예수님은 올리브산으로 가시다(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4)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님을 시험함이러라.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말씀하시기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10) 예수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1-5절. 초막절 마지막 날 군중들에게 생수의 강을 마시라고 초대하신 후 군중들은 각각 귀가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습니다. 일명 감람산이라고 부르는 올리브산은 기드론 계곡을 건너서 예루살렘 성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황금문 맞은편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밤에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산에서 철야기도하며 지내셨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기드론 계곡 건너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헌금함(연보궤)이 있는 기도의 광장으로 들어오시니 백성들이 그분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분은 앉으셔서 천국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 중에 체포된 한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참으로 딱한 요청입니다. 설교 도중 혹 강의 도중에 이런 일을 당하십니다. 잡혀온 여자는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성적 욕구는 정당한 것이지만 간음하면 죄가 됩니다. 성(性)생활은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간음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런데 이 여자만 체포되어 왔고 간부(남자)는 없습니다.
6-8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런 질문한 것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그분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만 죽을 죄인이 아니고 예수님을 까닭없이 정죄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죽을 죄인들입니다. 사실 당시의 법대로 이 여인에 대해 처벌하면 될 일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판결하면 주님이 평소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위배됨을 지적하려고 하며, 용서하라고 판결하신다면 율법을 어긴 죄를 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속히 대답하지 않으신 채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쓰고 계십니다. 아마 그는 하나님의 율법도 지키고 그 여인도 구할 길을 생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 묻기를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일어나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무엇을 땅에 쓰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동시에 그 여인을 구할 수 있는 지혜로운 대답이었습니다. 또 그것은 인간의 죄성을 깨우치신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간음죄를 지은 그 여인도, 예수님을 미워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죄인이었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사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먼저 던질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9-11절. 간음죄로 돌로 치러왔던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being convicted by their own conscience)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도덕적 분별력과 판단력으로 본능입니다. 사람은 양심 때문에 악을 깨닫고 부끄러워하고 그 형벌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특히 간음죄인)임을 느끼며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인이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주님 없나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Neither do I condemn thee: go, and sin no more.” 예수님께서는 그 간음녀를 죽음에서 건져주셨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장차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의인과 악인,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불의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님의 얼굴과 그분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 그러나 지금 그분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단지 회개하라고 부르십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에서 돌이키고 죄를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회개한 자는 이제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죄 용서함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 부르신 모든 사람은 모든 죄를 다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거룩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시다 I am the Light of the World.(요 8:12-20)
(12)예수님께서 또 말씀을 계속 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3)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14)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16)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19)이에 그들이 묻기를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21)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22)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그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살하려는가?”(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4)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5) 그들이 말하기를 “당신이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 참되시니 내가 그분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니(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28)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9)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30)이 말씀을 하시니 많은 사람이 믿더라.
12절. 성전뜰에서 성도들을 가르치시던 주님께서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어와 그분을 시험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때문에 잠시 방해를 받으셨으나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분을 시험하던 자들은 다 떠나갔으나 새벽부터 그분의 가르침을 듣던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을 상징하고, 어두움은 무지와 죄와 슬픔을 상징합니다. 이사야는 이방의 빛이 될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사 42:6; 49:6).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취고 있습니다. 그 빛은 무궁한 생명의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 빛을 받아 무궁한 생명의 복을 얻습니다. 구원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후 4:6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3-14절. 그러므로 그 자리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은 그분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자신을 위하여 증거하니 당신의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하니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이는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사람 즉 신적 구주이시며 세상을 구원할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고 장차 승천하여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실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증거는 인간의 어떤 증거와도 같지 않습니다. 그분은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으로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그 어떤 최선의 증거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증거는 세상에서 가장 힘있고 완전한 증거일 것입니다.
15-18절. 예수님께서는 또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외모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신적인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아무도 판단치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사람을 판단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요 3:17). 그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까지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마지막 날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16절) “그러나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믿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슨 일을 판단할 때 한 사람의 증언만 가지고 하지 말고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가지고 하라고 합니다(민 35:20; 신 19:15).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세상에 온 사실에 대해 율법의 요구대로 두 증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증인은 자기 자신이요 다른 한분은 아버지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침례] 받으실 때, 또 그분께서 변모산위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친 음성으로 아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마 3:16-17; 17:5).
19-20절. 이에 그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마 11:27). 이상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연보궤) 앞에서 하셨습니다. 헌금함 앞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은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증거되신 바로 그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으나 잡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고 그분을 잡아죽이려 하였으나, 아직 그를 해칠 힘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직 그분께서 잡히실 때(kairos)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에 끝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생의 기한이 있습니다(전 3:1).
21-24절.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아버지께로 즉 천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요 7:33; 8:14).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저버리면 다시는 회개치 못하고 믿지 못하고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그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살하려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죄인데 주님께서 자살을 의미했을 리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목숨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바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끊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23절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앞에서 주님께서 간다고 말한 것이 자살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함을 증거합니다. 유대인들은 다 아래서 났고 이 세상에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가 아니고 위에서 나셨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났다,' '속한다'는 원어(에크 ek)는 근원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신적인 근원을 가지는데 성신님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를 통해 특별하게 탄생하셨음을 암시합니다(마 1:18; 눅 1:35). 24절.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의 신성(神性) 즉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신앙의 필수적 요소입니다. 구원은 이 신앙을 통해 옵니다. 불신앙은 큰 죄악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의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서 죽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죄사함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것입니다(요 3:36).
25-27절. 그러자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에 대해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그분은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무궁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 3:16). 그분은 그리스도(메시야)의 오실 것을 믿고 있었던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그로라”고 하셨습니다(요 4:26). 그분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유대인들과 변론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요 5:17-18). 그분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기적의 빵을 먹었던 군중들에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요 6:48, 51). 또한 초막절 마지막 날 성전에 모인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7:37-38). 또 간음하다 현장 체포된 여인을 용서하신 후 선언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 8:12).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하셨습니다. 26-27절에서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 참되시니 내가 그분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마귀는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그의 말씀은 다 진리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합니다.
28-30절.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유대인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으나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는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하고 배척하였으나,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시고 그분을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으셨고 배척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항상 함께하셨습니다. 감사하게도 몇 사람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3. 죄로부터의 자유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요 8:31-38)
(3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3)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34)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1-32절.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분의 참 제자가 되려면 그분의 말에 거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거한다는 말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것을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제자는 선생님에게서 배우고 그 배운 바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입니다(잠 10:8). 32절에 “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요 14:6) 그분의 말씀과 그분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진리의 말씀입니다(엡 1:13). 복음의 요지는,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지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주셨으므로 그분을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과 천국과 영생 소망을 주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 32절은 연세대학교 학훈(Motto)입니다. 이를 라틴어로 Veritas vos Liberabit(libero의 3인칭 단수 미래 능동태 직설법.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장 큰 복은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무식과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것은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33-36절. 유대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된 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 속에 있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죄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생치 못한 자들은 영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몸의 질병이나 돈의 손실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죄 문제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깨달음도 없습니다.
34절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범하는 사람은 다 죄의 종입니다. 죄는 그의 육신의 욕망을 충동질합니다. 모든 죄인은 다 죄의 종입니다. 그들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35-36절에서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종과 아들의 신분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종은 주인의 집에서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습니다. 죄의 종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천국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 영원히 거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실 수 있습니다.
37-38절.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시나 지금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약속된 메시아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요 5:16, 5:18, 7:1, 8:37, 8:40, 11:53).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까닭은 그분의 말씀이 그들 속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빵이요 세상의 빛이며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분은 자신이 모든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믿어야 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신적 구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8절에 “나는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곁에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와 함께, 아비 곁에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나시기 전 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 보셨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비 곁에서 본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아비란 일차적으로 그들의 육신적 아버지나 조상을 가리킬 것이지만, 근원적으로는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인 마귀를 암시합니다.
4. 너희는 마귀의 자녀 You are of your father the devil(요 8:39-47)
(39)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기를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4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니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39-40절. 유대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처럼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를 보여야 할 것이지만,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으나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을 닮지 않았고 오히려 마귀의 속성을 지니고 마귀의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대적 상태에 있음을 증거합니다.
41-43절. “또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악하였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실상 그들의 아버지는 마귀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라고 대답합니다. 42-43절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깨달음이 없었고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습니다(마 13:14-15).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이 구절은 마귀의 속성을 가장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요 8:32과 더불어 요 8:44을 꼭 암기합시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진리가 없습니다. 마귀의 욕심은 교만과 명예심 등이며 거기에서 미움과 시기와 살인이 나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입니다. 그는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함으로 죽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고 죽게 되었습니다.
45-47절.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무슨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자녀가 아니고 마귀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중생한 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을 것이지만, 그들이 그것을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속한다’는 원어는 ‘~에게서 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중생한 자는 예수님을 믿고 그를 따를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요 8:48-59)
(48) 유대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마귀가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마귀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니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분이 계시니라(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52)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지금 당신이 마귀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당신 말은 사람이 내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53) 당신은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 하느냐?”(54)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분이시라.(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키노라(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7)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48-50절. 유대인들이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마귀가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고 비난합니다.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그분이 참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정죄하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마귀가 들렸다는 말은 건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한 까닭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왔고(42절) 자신의 말이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46-47절)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고(행 24:5) 베스도 총독에게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행 26:24). 49-50절에서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마귀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님은 바른 정신으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그분께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셨다면 그분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거짓 선지자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으나 그의 영광을 구하고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판단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51-53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주님의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교훈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은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고 따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과 생명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단지 몸의 죽음으로만 이해했고 또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54-56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분이시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키노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성(神性)과 구원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로만 하나님을 알 뿐 실제로 그분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배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5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언제, 어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는가요?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 당시에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으나, 많은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12:3)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의 눈으로 먼 장래에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57-59절.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당신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나요?” 이때 예수님의 나이가 33세 정도이었을 텐데, 유대인들은 왜 그에게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라고 말했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얼굴이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였을지도 모르나 33세 정도가 50세로 보였겠는지는 의문입니다. 유대인들의 표현은, 라일의 주석대로, '네가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는 뜻으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58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 즉 그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고 말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느니라'는 말씀은 구약에 '여호와'라는 명칭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직역하면 '나는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4). 그것은 여호와라는 말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설명입니다.
59절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죄(blasphemy)로 처형하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신성과 동일시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아직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며 그들 가운데로 통과하여 지나가셨습니다. 투명인간처럼 위기 상황을 벗어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인간은 시작이 있지만,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신 자이시며(요 1:1)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십니다(계 22:13).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안에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51절).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 안에 거할 때 영생을 누립니다.
[열왕기하 7장 10분 설교문] 기쁜 소식 전하는 기쁨(왕하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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