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호세아 2장 하나님말씀 중에서 육비와 돌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육비와 돌비(호 2:14-20 고후 3:17-4:2 막 2:18-22)
제1 주제 : 호세아 2:14-16(17-18), 19-20
호세아는 북왕국에서 활동하고 우리의 본문을 기록한 예언자 중에 유일한 자이다. 그의 사역은 대개 주전 750과 725년 사이의 시대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증언하면서 그는 주전 721년에 앗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정복할 때까지는 살지 못한 것 같다. 수많은 호세아의 비판은 바알에 대한 가나안의 제사에 반해서 방향 지어진다. 북쪽은 그 혼합주의로 알려졌다.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 아래서 바알 숭배는 강력한 왕의 비호 아래 인정되었다. 호세아의 시대까지 이 제단은 확실히 큰 종교집단을 이루었다. 그것의 소구력은 생활에 접근할 수 있는 심미적인 데 있었다. 제의적 매춘과 식물의 예식은 죽음과 메마름을 극복하는 삶과 부요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었다.
호세아는 비록 그 제의를 아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대에 휩쓸고 있는 바알에 대해 그의 부채를 드러내 놓는 본성적 은유와 사랑의 상을 사용하고 있다. 연인이 그의 소녀에게 구혼하듯이 그렇게 야웨는 구속을 위하여 그의 백성을 사막 속으로 불러들인다(14절). 비록 사막에는 "고통"이 있더라도, 이제 그것은 희망의 장소이다. (아골 골짜기, 즉 "고통"의 골짜기에서 악한은 금지된 물건을 훔친 결과 돌에 맞아 죽었고, 그의 범죄는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주었다. 수 7:22-26 참조) "고통의" 골짜기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머문 때가 이스라엘의 이상적 시기로 생각된다. 그때, 거기서 야웨와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는 거짓 애인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았다.
이 이상적 시기는 이제 회복될 것이다. 다가오는 구원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15절). 광야로부터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것이다. 야웨의 신부, 즉 이스라엘은 "그녀의 젊은 시절"에 있었던 그녀의 신랑에게 돌아갈 것이다(15절). 바알과의 간음 관계는 그의 아내가 남편에게 보여 준 그런 사랑에 의해 대치될 것이다(16-17절). 결혼은 평화의 계약 속에 인치게 될 것이다(18절). 인간과 짐승,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적대관계는 종료될 것이다(사 11:6-9, 2:4 참조). 자연과 역사는 화해될 것이다. 야웨는 신부의 선물로 의, 정의, 사랑, 그리고 자비를 제공한다(19절). 이스라엘을 돌아서 여자와 남자 사이에 존재하는 본능을 가지고 야웨를 "알게" 될 것이다(창 4:1 참조).
제2 주제 고린도 후서 3:1-6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의 적대자들에 관해 광범위한 괄목할 만한 연구에서 죠지(D.Georgi)는 바울신학의 어떤 관점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은 유대 기독교 선교자들과 겨루고 있는데, 그들은 주로 성서의 예언적 해석, 영적 황홀감, 그리고 기적의 수행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그들 자신이 신적 힘을 갖고 부여해 준다고 생각했으며, 그리고 그들의 주된 직무가 표적과 기적을 과시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바울이 이들 적대자들을 "큰 사도들"이라고 규정지었을 때(11:5,12:11), 그는 그들의 능력의 현시를 참고하고 있는 것이다. 광범위한 역사적 관점에서 이 "큰 사도들"은 헬레니즘의 신적 인간(theios-aner) 관념론의 표현인 유행적인 종교적 형식의 대표자들이었다.
그 신적 인간의 선교사들은 의심할 것 없이 다른 공동체의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쓰인 추천장을 휴대하고 고린도에 도착했다. 모든 가능성에서 볼 때, 이 서류는 선교사들의 사도적 덕과 영적 실천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서신의 요약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관계 서신을 사용하려는 상투적인 실습에 대해 그의 적대자들을(1절) 비판한다(그렇지만 바울 자신은 오네시모를 대신하여 빌레몬에게 추천서를 썼다). 그 자신의 추천서는 바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다(2절. 고전 9:2 참조). 바로 이 교회의 존재가 바울의 심장에 지울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교회의 존재가 모든 세상이 보아야 할 것이다(2절).
적대자들이 그들의 영적 전시에도 불구하고 잉크와 종이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에, 바울의 "그리스도로부터의 편지"는 살아 계신 성령의 영속적인 특성에 의하여 쓰인 것이다(3절). 바울의 살아 있는 편지는 심지어 모세의 시내 산의 돌판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다(3절). 사람들 자신들이 바울의 사도적 신뢰,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형성한 것이다(4절). 더 이상의 신임장이 필요치 않다. 적대자들은 모든 능력의 근원을 위해 능력으로 그들의 인간적 모습을 잘못 취하려고 하는 것 같다. 바울은 신적 인간의 사도들에게 종교적 자기 충분성으로 그런 일은 없다는 점을 기억시켜 주고 있다(2:16 참조). 그와 그들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5절).
바울은 성령의 주권성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바로 그들이 결정적으로 종이의 면허장에 의존하려 한다고 논박한다. 적대자들은 아직도 옛 계약(the Old Covenant) 아래 섬기고 있음이 암시되고 있다(6절). 이것이 바로 역사적 의미에서 그 선교사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들을 유대화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바울의 논증이다(튜빙겐 논문). 바울의 요점은 적대자들이 아직도 모세의 법조문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새 계약의 영을 붙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복음서 주제 : 마가복음 2:18-22
이 금식에 관한 인용구는 전달과 해석상 복잡한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최종 설명이 그 이야기의 초기의 전도에서, 그리고 가능한 원래의 의도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점은 즉시 명백해진다. 초기에 금식에 관한 제자들의 무관심이 요한의 제자와 서기관들의 금식하는 것과 비교되어 있다(18절). 이런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서 예수는 금식 규례를 갖고 그의 제자들의 완전한 불복종을 시인하고 있다(19절). 그렇지만, 19-20절은 금식이 기독교인의 생활의 사건이 되었을 때를 가정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금식 의식은 정당화되고 있다. 금식에 관한 두 설명 사이에 있어서 차이는 각각 예수가 지상에 계실 때와 계시지 않음 때문이다. 예수가 생존해 계시는 동안 그의 부분적인 움직임은 요한과 바리새인 양자에게 신성시되어 버린 금식의 실행을 위배함으로써 독립성을 선포한다.
많은 학자들이 19절을 원래의 예수의 말로 보고 있다(J. 예레미야스, N.페린 참조). 예수의 현존은 금식의 전통적 시기와 양립할 수 없음을 입증했다. 그의 선교의 종말론적 신기한 사건이 유대주의와 세례 요한의 운동을 함께 깨뜨려 버렸다. 그렇지만, 19-20절은 변화하는 환경을 취급하는 데 있어서 계획되고 있는 개정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가장 낮은 설명이 마가의 상황과 접촉되었다고 보는 것이 완전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초기의 실천을 재고하게끔 했다. 이제 금식에 대한 완전한 자유는 마가에게는 그 소구력을 잃었고, 어느 날이 공식적으로 금식을 위해서 선정되었다. "그 날에"(문장 위치에 의해 강조) 예수의 격렬한 죽음의 날에 대한 선행하는 예를 구체화하고, 그리고 성금요일(Good Friday)을 지적한다. 현재의 형태에서 그 인용구는 주간 금식의 날로서 금요일을 시인하는 데 쓰인다.
그렇지만, 예수의 죽음 후에 그리스도인의 금식에 관한 재개는 유대주의로 되돌아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재고의 때로서 자극이 되었다. 만일 예수의 생존 시 제자들이 금식에 관한 그들의 무관심에 의해 유대주의와 모순되었다면, 예수의 죽음 후에 금요일의 그리스도인의 금식은 월요일과목요일의 유대인의 금식과 대비가 된다. 금식 인용구의 수정된 설명은 예수의 사역의 종말론적 논쟁을 계속한다. 이것은 헌 외투에 새 헝겊 조각과, 낡은 술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것에 관해서 어록집에 특별히 서술된 것이다(21-22절). 새 것과 옛 것 사이에 어떤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왕국의 새 생활은 생활의 옛 구습으로부터 벗어난 해방의 대가로 얻게 된다.
설교를 위한 해석
주전 8세기에 호세아의 상황은 누군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우리의 처지와 가깝다. 바알 숭배는 필연적으로 자연의 힘은 특별히 다산의 능력의 수단에 의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자연 숭배의 유혹과 극단적인 내세주의에 의해 성적으로 공동체의 잠재력에 대한 위험과 투쟁하려는 경향에 있었다. 라토렛(K.S.Latourette)이 지적하기를 초대교회에 의해서 비난받던 세계 부정적인 이교는 모나티시즘(monasticism)에 의하여 기독교 속에 침투한 과정을 발견했다. 그 결과 전통적인 금욕주의의 실행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에 관하여 대부분은 크게 현대인의 마음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영대 육에 관한 설득력 있는 가정은 구약과 신약적 의미로부터 매우 다른 주장이다.
동시에 우리의 문화는 종교적으로 성(sex)으로 점유당해 왔다. 호세아로부터의 교훈은 설교자에게 단순히 하나의 도덕적 문제로서 가끔 보이는 것에 대한 이 깊은 종교적 차원을 폭로시켜 주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누구나 공산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프란시스 파가 될 필요가 없듯이, 그렇게 설교자는 그 반대 입장을 묵과하기 위하여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의 잘못을 그렇게 반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호세아는 현대인들이 우리의 정절과 역사의 의로우신 역사의 하나님에 대한 개입으로부터 우리를 갈고리에서 벗어나도록 함으로써 자연 숭배에 관한 특별히 위험한 세력을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해 준다.
브라운(Norman O.Brown) 같은 사람들은 구약의 바알 숭배와 비견되는 방향에서 현대인을 촉구하고 있다. 그의 작품 [사랑의몸](Love's Body)의 끝 부분에서 그는 하나의 새로운 정원, 곧 하나의 새로운 에덴을 주장하면서 거기에는 "아무도 누구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는" 곳이라고 한다. 만일 하나님도 그리고 아담의 아들들을 헤이시려고 부르실 아버지가 없다면, 그때 범죄도 없고 모든 범죄(기독교가 죄라고 불렀던)의 신경적 결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것이며, 한편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한 자연의 어머니의 품에서 만족할 것이라고 브라운은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타락한 자연(가끔 계모로서 그런 어머니가 아닌) 안에서가 아니라 역사의 하나님에 의하여 헤아림 받는 인간 존재 안에서는 하나의 이상향적 환상에 불과하다. 브라운은 책임을 제거함으로써 죄와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의 집단 가운데는 바로 그처럼 영적으로 바알 숭배를 회상시키는 매력적인 관점을 여러 가지 정도로 반영하고 있는 가속적인 성장이 있다.
동시에 호세아의 예는 우리가 역사로부터의 도피나 악을 지닌 자연과 성적 어떤 동일성 가운데서 그런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피하도록 도울 것이다. 반면에 매춘과 같은 그런 것들로서 잘못된 것은 그들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호세아는 야웨와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낭만과 성적 언어를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성적 유비에서 웃기고 간교한 웃음거리가 된 빅토리아주의와 프로이드주의자들의 이상한 혼합물이 있다. 루이스(C.S.Lewis)의 [네 가지 사랑] (The Four Loves)에 "남녀 간의 사랑"(Eros)의 장은 선에 관한 적절한 평가를 가지고 이 주제를 취급하면서, 그러나 이 사랑의 악마 같은 부적절성에 대한 훌륭한 자료이다. 18세기 시인 크리스토퍼 스마트(Christopher Smart)는 기독교의 이런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
모든 관대하심과 창조의 하나님, 선에서 악을 단념케 하신 이는 육신을 입으시고 그가 지으신 바로 그 세계의 본래의 모습이시니 이 육신이 되심에 대한 주제는 고린도서의 본문에서 수행된다. 바울은 그의 비판적 추천장에 관한 영원한 신임장을 회개한 자들의 변화된 생활이 바로 먹이 아닌 "마음의 육비에 쓰인 신임장"과 비교시키고 있다. 영적 권위를 주장하는 비난자들에 의해 둘러싸인 그의 존재는 특별히 우리의 시대에 적절한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유사한 갈등의 주장이 점증하고 있으며, 이 제일주의 법칙(rule of thumb)이 꼭 같이 오늘날도 적용되는 것 같다 : "그들의 열매로 너는 그들을 알지니", 그리고 참된 영은 "인간의 마음의 육비"에 쓰신다.
오늘날 카리스마적 운동은 죄악과 교묘한 조각(거의 흔히 무의식적인)에 의해 혼합된 큰 은혜의 결합이다. 권위의 갈등을 다루는 바울의 방식은 그것들을 성육신적 시험에다가 놓는다 : 어떤 권위가 해방시키고, 변형시키고, 사랑하고, 그리고 더욱 생명과 빛을 가져다주는가? 육비(사람들의 공동체)와 돌비(모세의 계율) 사이에, 법의 정신과 법의 조문 사이에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비유는 보다 광범위한 응용이다. 아카데믹하고 전문적인 세상에서 법령들이란 절대적으로 외적 신임, 박사학위, 전문학위, 인정받는 표준들-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의 실존 : 학생, 환자, 소송의뢰인, 교구민-을 위한 이유를 끌어올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신임장은 그들의 일의 변화된 심정에 쓰인 것이고, 그들은 단순히 벽에 걸린 유리 뒤에 부각시킨 것이 아닌가?
마가가 다룬 금식의 문제는 성문제에 대한 유사한 역사의 면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다산의 제의는 그들의 성적 긍정으로 종교를 악용하고, 그런 반응으로 교회는 성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사하게 금식이 부정적이든 형식적 방법이든 남용되어서, 그 반응은 함께 금식을 과소평가했다. 우리의 주석이 지적한 대로 금식에 관한 교회의 회복은 유대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월요일이나 목요일보다는 차라리 금요일에 금식하는 것이 옛 율법주의로 물러나는 것이 될 수 있고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자유의 새 차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금식에 관한 전통적인 기능은 육체를 종속시키고, 회개를 표현하고, 하나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의 일부를 되살려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은 금식했으나, 그러나 그는 분명히 요한과 유대주의의 금식의 전통과는 그의 사명을 분리하였다. 금식에 대한 기독교인의 차원은 비슷하게 회중에게 율법주의적 전통과 세계에 도달하기 어려운 자유의 수준에서 금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가 한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축하, 자극적인 축하로서 금식하게 한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것과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권세들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한 승리를 회상되게 할 필요가 있다. 육신은 살기 위해 음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금식이 굶주림은 아니다. 금식은 그리스도인의 확신과 이 육신의 종말이 곧 인간의 종말이 아니다는 어떤 희망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의 시민권은 지옥의 문이 결코 이길 수 없는 하늘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국가로서 우리의 독립을 회상하기 위해 한 시기를 정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서 한 시기를 정해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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