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원문 성경강해

[사도행전 6장 히브리어 강해설교]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선출(행 6:1-7)

기혼샘 2021. 7. 13. 16:29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6장 히브리어 강해설교 중에서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선출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초대교회 때에 사도들은 오직 복음과 기도에 전념하기를 원했습니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서 교회를 관리할 집사가 필요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에서 칭찬받는 사람 일곱 명을 선택하여 교회의 일을 맡기게 됩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선출(행 6:1-7)

 

행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우리는 교회가 그의 적들과 투쟁한 내용과 교회에 주어진 승리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제 우리는 교회가 그 내적인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몇몇 교인 간의 불행스러운 논쟁은 나쁜 영향을 끼칠 것처럼 보여졌으나 신중하게 조정이 되고 적절한 시기에 처리되었다. "그때에 제자의 수가"(제자라 함은 기독교인은 처음에 그리스도를 배우는 자로 불리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수천 명으로 증가하는데 이때 원망이 일어났다.

"제자들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준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보고 마음이 초조하였다. 복음 전파에 대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그것은 그 진행을 저지하는 대신에 오히려 촉진제가 되었다. 초창기의 기독교 교회는 애굽에서 초창기의 유대 교회가 그러하였듯이 "박해를 받을수록 더욱 왕성하여졌다." 전도자들은 매를 맞고 위협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였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심판대 앞에서 보여 준 놀라운 인내와 변함없는 기쁨을 보고 그들이 자신들에게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영에 의해 보존되고 일을 수행한다는 것을 확신케 되었다.


행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그러나 제자들의 수가 증가하므로 원망이 생겼다는 것은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 준다. 지금까지는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 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수가 많아지자 원망이 시작되었다. 구약에서와 같이 "그들이 수가 많아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스스로 타락하였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셨으나 그 즐거움은 더하시지 않았다"(사 9:3)(한글 개역과 다름. 한글 개역에는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다로 되어 있음:역주). 아브라함과 롯의 가족이 많아지므로 "그들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본문에서도 그러하였다. 즉 노골적인 불평은 아니었고 은밀히 가슴 태우며 하는 그런 불평이 일어났다.

 



(1) 불평한 사람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 파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리스와 다른 지역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로서 그들은 보통 희랍어를 말하였고 희랍어판 구약 성서를 읽었으며 히브리 원어 성경은 읽지 않았다. 절기를 당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리하여 교인의 수가 늘었고, 그들은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 사람들이 히브리 원어로 된 구약 성서를 읽는 유대 본토인 히브리인들에 대해 불평하였다. 양파에서 얼마씩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함께 받아들였다고 해서 회심하기 전에 그들이 서로 품고 있었던 사소한 시비가 해소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옛 누룩을 얼마씩 보유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희랍인도 없고 유대인도 없으며" 히브리 파와 헬라파의 구분도 없고 모두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요 또 그로 인하여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또는 기억하지 못하였다.

(2)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평은 "그들이 과부들이 무시를 당하여 날마다의 식량 배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한글 개역과는 조금 다름. 공동 번역 참조:역주) 즉 구제를 베푸는 일에 있어서 히브리 파 유대인의 과부들이 그들보다 더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기독교 교회의 최초의 논쟁은 금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사소한 문제들이" "저 세상의 보다 큰 일에" 전념해야 할 사람들 가운데서 화근이 되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상당한 양의 금액이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 모금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종종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분배하는데 모든 사람을 만족케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발아래 놓인 돈을 다루는 사도들은 헌납자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도록 그것을 처리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고 물론 그 일의 계획을 수립하는 데도 최대 한도의 공정성을 기하였다. 따라서 희랍파 유대인들보다 히브리 파 유대인을 더 유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일에 대해 불평하였고 들어 내놓고서가 아니라 남몰래 "희랍 유대인 과부들이 무시된다고" 불평하였다. 물론 그들도 구제를 받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많이 할당되지 않는다는 식의, 또는 히브리 파 유대인들처럼 많은 사람에게 분배되지 않는다든가 때맞게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① 아마도 이 불평은 근거도 없고 부당한 것인 듯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붙이든 간에 유리한 입장에 서지 않은 사람들은(희랍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입장과 비교해 보고 그러하였듯이)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은데 그들이 무시받고 있다고 시기하기 쉽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결점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대신에 불평하며 소란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더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든가 또는 그들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준다고 흠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시기와 탐심은 늘 있어서 이 비정함의 근원은 부자들에게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도 발견되며 이들은 겸손히 절약하며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② 그러나 반면에 우리들은 그들의 불평에 근거가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어떤 이는 다른 가난한 사람들이 잘 공급을 받고 있는데 그들에게 속한 과부들은 무시를 당한 것은 관리하는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이 지켰던 옛 관습에 의해 문제를 다스렸기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이 옛 관습이란 것은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가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먼저 그 과부를 대접하게 하라"는 말씀이다(딤전 5:4).

둘째, 나는 본문에서 과부들이 모든 가난한 사람들보다 우선적으로 대접받았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교회에 전해오는 여러 책 가운데 구제를 받은 많은 사마들은 과부들로서 그들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잘 지냈으나 그들이 죽으므로 곤경에 빠지게 된 자들이었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특례를 정하여 과부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했었던 것처럼(사 1:17; 눅 18:3) 구제 문제를 다스리는 사람들도 특별히 과부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야 한다(딤전 5:3). 본문의 과부들과 또 다른 가난한 사람들이 매일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아마 그들은 앞날을 예측하지 못했고 따라서 훗날을 위해 저축한 것도 없었던 것 같으며 그러므로 재정 관리자들은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였다. 그들은 겨우 근근이 살아가는 정도였다. 

이제 희랍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비교적 무시당하였던 것같이 보이는 면을 생각해 보자. 아마 금전을 다루는 사람들이 부유한 히브리 파 유대인들이 부유한 희랍파 유대인들보다 더 많이 헌납한 것을 고려한 것 같다. 희랍파 유대인들은 히브리 파 유대인들처럼 재산을 팔지 않았고 따라서 가난한 희랍파 유대인들에게 그 기금에서 적게 배당이 된 것 같다. 이와 같이 넓게 생각하면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은 매정하고 부당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에서도 잘못과 부당한 처사, 불만스러운 일이나 또는 적어도 어떤류의 불평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최상의 것일수록 불완전이 최소로 줄어들 수는 있으나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문제에 대한 적절한 조치 및 이 불평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대책의 설정. 지금까지는 사도들이 이 문제를 다스렸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구제를 신청하였고 그들의 비참한 입장을 호소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 지휘 하에 사람들을 채용해야 했었다. 이 사람들은 사도들처럼 잘 보살피지도 못하였고 편파적인 유혹에 대해 확고히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사도들보다 이 문제를 다룰 만한 여유가 있고 이 문제를 전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몇 택정 되어야만 했다. 또한 이들은 사도들이 채용했던 사람들보다 신용을 보장할 수 있어야 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사도들에 의해 제출된 선출 방법. "그들이 모든 제자" 즉 예루살렘에서 모이는 집회의 회장들 곧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인물들을 불렀다. 그들을 제쳐놓고 12 사도들이 어떤 문제이건 결정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안전하며" 또 이러한 성질의 사건에서는 사도들보다 이 세상의 일반사에 보다 정통한 사람들이 가장 적절하게 조력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1) 사도들은 막중한 사업을 앞에 두고 지금과 같은 큰 분열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2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금전을 받고 지불하는 일은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업무와 같이" 세상적인 살림의 문제였다. 이것은 사도들이 본래 불리워진 사명과는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했다." 그들은 지금 우리들과 같이 매 경우마다 그들이 전할 것을 연구하지는 않았지만(그들이 말해야 할 것은 그 시각에 성령에 의해 주어졌으므로) 그러나 그들은 그들 한 사람이 우리 열 명보다 아니 천 명보다 나았으나 이 일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것으로 즉 그들의 생각과 염려와 시간을 모두 투입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만일 그들이 교회 생활에 관여하면 그만치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은" 손해가 되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능력껏 세심하게 복음 전파하는 사명에 노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즉 우리의 마음이란 한 번에 두 가지의 다른 염려스러운 문제들을 같이 감당하지 못한다. 물론 공궤 하는 일은 경건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부유한 기독교인들이 도움을 받아 가난한 교인들의 궁핍을 해결해 주는 것으로 둘 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었지만 사도들은 이 일을 해야 된다고 해서 말씀 전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등에 채찍을 맞았다고 해서 이 사명에서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발 앞에 놓은 금전 때문에 말씀 전파를 멀리 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들이 수효가 적었을 때는 사도들은 그들의 주 업무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지 않고 서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의 수가 증가했으므로 그들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우크 아레스톤 에스틴’(6:2)- 즉 그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즉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 곧 육신의 떡 때문에 영혼을 먹이는 일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 또는 장려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역자가 해야 할 최고의 사명이요, 가장 적절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그는 이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쳐야 한다(딤전 4:15). 이렇게 전하는 일에 충성하고 이 세상 문제로 자신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딤후 2:4). 또한 하나님의 집의 외적인 업무에도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느 11:16).

(2) 그러므로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합당한 일곱 사람을 선택하기를 원하였다. 이들의 업무는 공궤 하는 일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 즉 살림을 맡아 다스리는 집사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2절). 이 다스리는 일은 전에 사도들이 신경을 쓰던 것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야 했고 그러므로 적당한 사람이 선택되어야 했는데 이 사람들은 때때로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종사할 수 있지만 사도들처럼 전적으로 이 일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돌아보며 세심하게 살피며 지불할 것은 지불하고 회계 업무를 관장하고 "명절에 대비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입하는 일이었다."(요 13:29). 그 외에도 즉 영적인 활동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펴야 했다. 모든 일이 예모 있고 질서 있게 다루어져야 했고 한 개인이나 어떤 일도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① 이 사람들은 알맞은 성품을 지녀야만 한다. 사람들은 선출하였고 사도들은 안수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참으로 선택할 권한도 없고 사도들도 안수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 일에 합당치 않은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사람 일곱을 택하라." 그들은 현재로써는 이만한 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필요하다면 후에 증원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이 사람들은,

첫째, "칭찬 듣는 사람이어야 했다." 부정함이 없으며 이웃들에게 흠 없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어떤 추한 결함도 없고 오히려 모든 일에서 덕스럽고 찬양할 만하다 여겨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마르튀루메누스’- 즉 사람들의 오가는 말속에서 선한 행실이 입증되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교회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신망이 있고 결점이 없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이 조건은 그들의 직책의 신용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 직책을 그때그때 수행하는 데도 필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
둘째, 그것은 "성령이 충만해야"만 하였다. 즉 주어진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데 필요한 성령의 은사가 충만해야만 하였다. 그들은 정직한 사람일 뿐 아니라 재능과 용기를 겸한 사람들로서 이런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백성을 재판하는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출 18:21). "재덕이 겸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 무망 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였다. 그러나 본문에는 "성령이 충만한 자"로 표현된다.

셋째,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각이 있고 현명한 사람들로 억지로 떠맡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깊어 최선을 다하여 일을 순서 있게 처리하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는 말은 지혜의 영뿐만 아니라 성령도 마찬가지로 충만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지식의 말씀과는 구분되게 같은 성령이 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볼 수 있다(고전 12:8). 공금(公金)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어야 하며 그리하여 성실하고도 검소하게 금전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② 백성들에게 추천이 맡겨졌다. "너희 가운데서 사람 일곱을 택하라. 너희 가운데서 누가 이런 일을 맡기기에 가장 적당한지 생각해 보고 가장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택하라." 백성들은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가 하는 데 대해서는 사도들보다 더 잘 알고 적어도 이런 사람들을 찾는 데 자기들이 더 적절할 것이라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선택하는 일이 그들에게 맡겨졌다.

③ 사도들은 봉직함에 있어서 그들에게 안수하기를 바랐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직책을 맡기려 하였다. 즉 그들로 하여금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하며 직책 수행에 자신 있게 임하게 하며 그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상대하는 사람들이 누구며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들에게 복종해야 함을 알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영문판 성서 중에서 오류를 범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곳에서는 "너희가 이 일을 맡긴 사람"이라고 해석하므로 책임을 맡기는 권력이 백성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은 사도들에게 있는 것이었다. 즉 "우리가 이 일을 맡기고" 이 일을 돌보도록 하고 낭비나 부족함이 없는지 살피겠다는 말씀으로 봄이 옳다(우리말 성경과는 다름-역주).

(3) 사도들은 목회자로서의 그들의 사업에만 전념할 것이며 이 부담스러운 직책인 공궤 하는 일을 완전히 중단하며 더욱 일에 힘쓸 것이라 한다(4절).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① 복음의 이대(二大) 강령은 "말씀과 기도이다." 이 강령에 의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지고 보존되어야 한다. 말씀을 통해 그가 백성들에게 말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보완한다. 이 두 강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나라는 전진하며 그 수효가 증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른 뼈에게 예언해야 하며" 그런 다음 하나님에게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에 의해 다른 강령도 우리에게 성별 되며 성례는 그 효력을 발한다.

② 복음 사역자들의 대 임무는 계속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며 말씀을 먹이는 것이다. 그들은 이 임무에 자신을 적응시키며 늘 준비를 갖추어야 하며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또는 그 밖에도 이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말씀을 전함으로써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야 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백성의 대언자가 되어야 한다. 조인을 믿고 회개케 하기 위하여 성도들을 교화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그들에게 말씀을 먹여야 한다. 또한 우리의 노력에 약속된 방법인 기도에 의해 활력을 공급해야 한다. 다만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말씀만 먹여서는 안 된다. 그 말씀이 효력을 지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설교 없이도 역사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우리의 설교는 헛된 것이다. 

사도들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주어졌고 그리하여 방언과 기적을 행하였다. 그렇지만 아직 그들은 이를 위해 계속해서 전파하고 기도해야 했었으며 이로써 교회를 교화할 수 있었다. 목회자들은 분명히 사도들의 계승자들이다(그렇다고 사도들의 능력 충만까지 계승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러한 것을 가장하는 사람들은 외람된 침해 자이다. 사도적인 직무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에서만 계승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계속해서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실 것이다.


행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이 제안에 합의를 보아 곧 제자들에 의해 실행에 옮겨졌다. 비록 사도들은 이것을 행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말할 수 있었지만 절대적 권력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빌 8). 오직 듣기 좋은 말로 제안하였다. 그러자 "온 무리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5절). 무리들은 사도들이 세속적인 문제에 관여하는 일을 기꺼이 피하고 이 문제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또한 그들은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사도들이 전념하겠다는 말을 듣고 만족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이지도 않았고 그 집행을 연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람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가 같은 사람들을 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각자마다 그의 친구가 있었고 그는 그 친구들을 좋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표가 본문에 명기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나머지 후보들이나 다른 유권자들도 이 결과에 순응하여 일반 사회단체에서 이러한 경우에 하는 것처럼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특별한 임무가 주어진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데 제비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보다 직접적인 하나님의 행위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집사는 사람들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그렇지만 이 안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수중에 모든 인간의 마음과 혀를 장악하신다.

우리는 택함 받은 사람들의 목록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그들이 전에 칠십 인의 제자였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칠십 인의 제자는 오래전에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안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제쳐놓고 공궤 하는 일을 맡을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성령이 임재한 후에 회심한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리라는 것"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약속에 의하면 은사는 성령 충만이요, 또한 성령 충만은 이 일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었다. 우리는 이 일곱 사람에 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행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팔아 공동재산에 돈을 바친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이 대등한 입장이라면(coeteris paribus) 관대하게 자신의 재산을 기증한 사람들이 그것을 분배하는 일을 맡는 것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 이 일곱 사람은 모두 헬라파 유대인일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희랍식 이름이었고 이들을 세움으로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평을 막기에 적절하겠고(이 불평 때문에 이런 조직이 이루어졌다.) 외국인들에게 자기들과 꼭 같이 신뢰를 표현하므로 그들이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니골라는 안디옥 출신의 개종자였는데 그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인 것을 보아도 그것은 명백하다. 어떤 이는 성서의 표현 방식에 비추어 볼 때 그만이 안디옥 출신이고 다른 이들은 예루살렘 출신 개종자들이라고 본다. 첫 번째 기록되고 있는 사람은 스데반인데 그는 이들 일곱 집사의 집단의 영광이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다른 누구보다 믿음으로 충만하였다. 그는 성실함과 용기로 충일하였다. 이는 그가 성령 즉 그의 선물과 은총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범한 인물이었고 모든 것 중에서 특출 났었다. 그의 이름은 "면류관"을 의미한다. 빌립이 다음에 기록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점차 인정을 받아 후에는 사도들의 동료와 조력자로서 전도자의 직무를 서품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특별히 전도자라고 불려지고 있다(21:8). 에베소서 4장 11절과 비교해 보라. 그의 가르침과 세례의 베풂은(우리가 8:12에서 읽게 되는데) 확실히 집사로서가 아니라(왜냐하면 집사직은 "말씀을 전하는 일"과는 정반대로 공궤 하는 일인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복음 전도자로서의 역할이었다. 그가 차라리 복음 전하는 일을 택하였으므로 그가 집사의 일은 그만두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일을 한 사람이 다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데반에게 있어서는 그를 복음 전도자로 여길 만한 아무 일도 그가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회당에서 변론을 하였고 법정에서 자기의 생명에 대하여 항변했기 때문이다(7:2). 맨 끝으로 기록된 사람은 니골라 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는 후에 타락하여(일곱 집사 가운데 가룟 유다와 같이) 우리가 계시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니골라당의 설립자가 되었다고 본다(계 2:6, 15).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기를 그것은 그가 미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몇 고대인들은 그에게서 이러한 누명을 벗겨 준다. 그들은 악독하고 불순한 이단이 자칭 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니골라는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하라"라고 주장했을 뿐인데 이를 이단들이 악랄한 수법으로 바꾸어서 "아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들을 공동으로 소유하게 하라"는 말로 바꾸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이 공동체의 소유에 대해 말할 때 특히 이것은 제외한다. 즉 우리들 가운데 모든 것은 공동 소유이나 우리의 아내들만은 예외로 한다.


행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들은 그들을 시급한 과제였던 공궤 하는 일에 임명하였다(6절). 백성들이 그들을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은 그들의 선택을 인가하고 집사들을 안수하였다.
① 그들은 집사들과 함께 또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욱 성령과 지혜를 주실 것과 그들이 소명받은 사명을 위하여 자격을 부여하실 것과 그들도 그 사명에 충성하게 하여 교회, 특히 가난한 무리에게 복이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모든 사람들은 교회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위탁되어야 한다.

②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즉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다." 왜냐하면 손을 얹는 일은 축복할 때 이행되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이게 축복하였다." "두말할 것 없이 축복이란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다"(히 7:7). 집사들은 사도들에게 축복을 받았다. 즉 회중의 목회자들에 의하여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사람들이 안수를 받았다. 그들은 기도함으로 그들에게 축복하시기를 간구하였고 안수함으로 그들에게 축복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수여되었음을 확신케 해 주었다. 또한 이 안수를 함으로 그들에게 직무를 수행할 권한을 주었고 백성들이 그들에게 순종하도록 의무를 부여하였다.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로 인하여 교회가 발전한다. 교회 내에서 질서 있게 문제들이 처리되자(불평이 사라지고 불만이 가라앉았다) 신앙이 뿌리를 내렸다(7절).

 



1.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갔다." 이제 사도들은 전보다 더욱 복음 전파에 힘썼다. 그러므로 복음은 더욱 널리 퍼졌고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목회자들은 세속적 일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전적으로 그들의 사업에만 몰두함으로 반드시 복음이 크게 역사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밭에 뿌린 씨앗이 자라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이같이 증가하리라고 기록되고 있다.

2. 기독교인들의 수가 많아졌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예루살렘에서 그의 복음 전파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도시에 제일 많은 개종자들이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장소에서도 그의 남은 자를 찾으신다.

3.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즉 복음을 반대하였거나 그렇지 않다 하여도 반대한 자들과 관련돼 있는 본문의 제사장들과 같은 자들이 복음을 믿게 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은총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들의 높은 직책이 실상 모세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제사장들이 기꺼이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나아왔으며 또한 그들은 "무리로" 온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서로 신용을 지키고 서로 격려하면서 같이 단번에 그리스도에게 그들의 이름을 드리려고 약속하였다. 즉 많은 제사장의 무리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그들의 편견을 극복하고 본문에 그들의 회심이 묘사된 대로 "이 도에 복종하였다."

(1)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진리에 그들은 매혹되었고 모든 부정적인 사상이 변하여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고후 10:4, 5). 이 복음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롬 16:26). 믿음은 복종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요일 3:23).

(2) 그들은 모든 복음의 명령과 교훈에 기꺼이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성실함을 나타냈다. 복음이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을 정케하고 개혁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계명을 주며 우리는 그 계명에 복종해야 한다.

사라 죽음과 헤브론 막벨라 굴 구입(창 23:1-20)

 

[창세기 히브리어 성경강해] 사라 죽음과 헤브론 막벨라 굴 구입(창 23:1-20)

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히브리어 성경 강해 중에서 사라 죽음과 헤브론 막벨라 굴 구입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라가 127세의 나이로 죽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

kihonsam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