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룻기 1장 설교 중에서 마지막 결단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와 오르바와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이 자신의 모압 땅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가도 베들레헴에서 다른 남편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베들레헴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주님이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끝까지 가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결단
룻 1:9-11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 명제 : 나오미가 마지막으로 며느리들에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한다.
● 목적 : 구원받은 백성들도 종말의 때에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험이 많이 온다.
나오미는 모압 땅 우상을 버리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주님을 버리고 갔다가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모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청년기에 예수님을 만났다가 세상이 너무나 좋아서 나오미가 모압에서 10년의 세월을 살았던 것처럼 인생의 황금기를 세상에서 보내고 나이가 들어 노년기에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였기 때문에 다시 회개하여 돌아오게 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들과 베들레헴에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가는 길은 험난한 길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더 이상 부귀영화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압 땅으로 가서 너희의 인생을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들도 세상의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화려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끝까지 남아 베들레헴의 떡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천국을 상징합니다. 현재 나오미와 오르바와 룻이 가는 베들레헴의 여정은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지막 종착지는 천국입니다.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과 고난과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신앙을 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위기도 나에게 오게 됩니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신앙을 지켜나가야 할 것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룻기 속에는 교회생활에 대한 말씀도 녹아져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고 마지막 천국의 종착지를 향하여 나가시기 바랍니다.
룻 1: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축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기를 원한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위로를: מנוחה메누하 4496 쉴 곳, 평안한 곳. נוח누아흐 5117 동맹하다, 평안하다, 안식하다, 예정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 과부의 삶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축복해 주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과부이기 때문에 과부의 삶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보호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선택권도 많지 않습니다. 일하기도 힘들고 돈을 벌어 생활해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다시 모압 땅으로 가서 재혼하여 남편을 맞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입을 맞추고 보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현재 나에게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과부가 되어 고통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영원한 안식이 없이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예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안식처가 되어 주셔서 평안해집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십자가에 나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과 동맹을 맺은 사람입니다. 또한 이들은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이 땅에서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다윗은 자신이 양이고 여호와는 목자라고 비유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생에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쉴만한’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룻기 1장 9절의 ‘위로’(מנוחה메누하)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나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동맹관계가 되면 나는 주님 안에서 평안함을 얻고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누리게: εχω에코 2192 가지다, 소유하다, 차지하다, 지니다) 그런데 아무나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만이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교회만 나온다고 해서 영적인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평안을 누리게 되고 신랑과 함께 하지 않으면 절대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지금 현재 신랑을 소유하고 주님이 내 마음에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신랑이 나의 마음속에 함께 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소유하면서 항상 주님과 동행하시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평안을 누리는 자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과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과부가 되면 영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떠나보내기 위하여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입 맞추매: נשק(나샤크 5401 입 맞추다, 복종하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유대인들은 입을 맞춤으로 인사를 합니다. 나오미는 즉시로 며느리들에게 입을 맞추고 떠나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보니 며느리들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신앙의 시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냐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들고 어렵지만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면에 육적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영적인 환난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주님을 입맞춤으로 떠날 것이며 주님과 입맞춤으로 따를 것이냐가 판가름 나게 됩니다.
룻 1: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오르바와 룻은 나오미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의 입맞춤을 하고 나서 이들은 서로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결단을 합니다. 시어머니와 절대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입을 맞춤으로 떠나지 않고 끝까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신앙의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르바와 룻은 나오미와 함께 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모압의 추악한 곳에서 베들레헴으로 길을 돌이켜 가려고 나오미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가겠나이다: שוב슈브 7725 함께 가다, 옮기다, 돌이키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의 어떠한 시련이 와도 꿋꿋하게 이기고 승리하겠다는 다짐을 말합니다. 나오미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수 없습니다. 오르바와 룻은 계속해서 나오미와 따를 것을 고백합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나도 주님을 버리지 말고 천국에 갈 때까지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어려움에 처했다면 주님 안에서 이와 같은 시련을 이기고 끝까지 주님을 섬김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룻 1: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이와 같이 오르바와 룻의 신앙고백을 듣고 나오미는 말합니다. 내 딸들아 모압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하느냐 그곳에 간들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이 될 아들들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베들레헴에 가도 생명의 역사는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도 아무런 소망이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과부는 신랑을 만나야 소망이 있는데 신랑을 만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만약에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신앙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신랑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랑만 만나면 교회생활은 재미가 납니다. 자꾸 신랑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계속해서 자신과 함께 하지 말고 새로운 신랑을 찾으라고 모압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압은 우상을 섬기는 곳으로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곳입니다. 만약에 육신적인 안목만 생각한다면 모압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생명을 생각한다면 베들레헴으로 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이 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인생 가운데 세상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주님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결정을 내리실 것입니까? 세상입니까? 아니면 주님입니까? 모압입니까? 아니면 베들레헴입니까? 육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영적인 것입니까? 이 시간 심사숙고하셔서 현재 내가 영적인 과부라면 세상을 바라보지 마시고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신랑을 만나러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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