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민수기 33장 하나님말씀 중에서 신 광야와 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신 광야 – 람”(민 33:11, 마 1:3)
♣명제: 신 광야는 가장 낮은 자로 오셔서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장소이다.
♣목적: 그리스도인들은 신 광야와 같은 주님의 고통의 채찍과 죽음으로 살아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가를 떠나 신 광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생활하던 노예의 근성을 버리고 광야로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구원받은 우리도 애굽과 같이 원죄의 노예로 살았던 모든 행동과 말과 습관들을 홍해 가에서 버리고 주님의 교회 안으로 들어와 십자가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가 신 광야와 같은 교회에 들어왔다면 과거의 죄의 습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죄악들을 모두 버리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천국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신 광야입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이 처음 전도되어 교회에 들어오면 많은 것들이 낯설어 보입니다. 처음 접해보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죄악의 습관들을 계속해서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됩니다. 교회는 거룩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들어가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걸어갔던 노정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광야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깨닫고 나는 온전한 신앙을 주님 앞에 세워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민33:11 홍해 가를 떠나 신 광야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가에서 자신들의 애굽 근성들을 모두 버리고 신 광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제부터 진정한 교회생활의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악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광야에 들어오면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가를 떠나서 신 광야에 들어와 진을 치게 됩니다. 우리는 신 광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을 통해서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신’ סין(신 5512) 신, 이라는 뜻이며 의미는 가시 잡목, 점토, 진흙,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광야입니다. 성경은 신 광야를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광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광야는 가데스 바네아 부근의 신 광야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번역으로는 똑같이 ‘신’이라고 되어있지만 원문으로는 צן(친 6790)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장막을 친 신 광야의 영적 의미를 깨달아보겠습니다.
신 광야의 원문의 뜻을 통하여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광야에 많은 가시 잡목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해 주는 장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원받은 선택 자들을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시에 찔림을 당하듯이 날카로운 채찍으로 온몸에 찔리시고 괴로움을 당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만세전에 선택받은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이런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부터 교회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에 들어왔다면 교회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가시에 찔리시고 고통을 당하셔서 죽으심으로 교회의 기초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신 광야를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가시에 찔리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 광야에는 점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토는 찰흙과 같아서 어떠한 모양을 만들어 놓으면 그대로 굳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죄악의 근성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신실한 믿음대로 굳어져서 교회의 새로운 믿음의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신 광야에 들어와 진흙탕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출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엘림에서 떠나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신 광야에 도착한 날짜가 나오는데 둘째 달 십오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난 날짜가 첫째 달 십오일입니다. 애굽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신 광야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대략 계산해 보면 2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 달 정도 살았으니 신 광야에 왔을 때에는 양식이 거의 떨어진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들어와 처음으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입니다.
출16: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장막을 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원망하는 이유는 먹을 양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먹을 것이 떨어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광야는 교회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이런 교회에 첫발을 내딛고 나서 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싸움질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원죄에서 주님이 해방시켜주셨는데 구원의 은혜는 온데간데없고 육적으로 힘들고 지치고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지도자들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나아가 예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께 대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은 교회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 광야로 인도하셨다면 먹을 양식을 준비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인내를 하지 못하고 과거의 애굽 생활을 회상하면서 원망하고 있습니다.
출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상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차라리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에게 말하기를 왜!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온 회중이 굶어서 죽게 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많은 고기를 먹었으며 떡을 배불리 먹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먹은 것이지 마음 편하게 음식을 먹지는 못했습니다. 노예의 삶이었는데 얼마나 많은 떡과 고기를 먹었겠습니까? 그러면서 지금의 광야의 삶을 한탄하면서 차라리 여호와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이 하는 말이 진심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교회에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당하신 주님의 기초로 세워진 교회에 들어와 애굽의 생활과 같은 원죄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단 하나 육적인 것이 풀어지지 않고 힘들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욕하고 주님을 모욕하는 행위를 일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해방된 것보다 과거의 원죄의 생활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애굽과 같은 고통에서 광야와 같은 교회로 인도하여 죄에서 자유와 해방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어려움 때문에 금방 돌변하는 이런 자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신앙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미 홍해 가를 지나왔기 때문에 이곳에 과거의 모든 죄악들은 묻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신 광야의 가시 잡목에 고통당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는 신앙의 출발이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까지 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에서도 영원한 천국까지 가려면 많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새롭게 출발하는 시점에서 과거의 원죄의 생활을 모두 잊어버리고 회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율법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악이었습니다. 이제 십자가 의로 구원을 얻었으니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입술에서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오직 주님께 영광만 돌리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출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주셔서 매일같이 먹을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양식을 날마다 거두어들이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의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겨우 고기와 떡을 먹었습니다. 고통의 삯으로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 광야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양식을’ לחם(레헴 3899) 음식, 빵, 떡, 이라는 뜻입니다. 이 양식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백성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세상의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원죄 가운데 먹었던 음식들은 고통의 음식들이었습니다. 내가 힘들게 고통 속에서 일을 해야 만이 먹을 수가 있었던 음식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원죄가 해결된 자들은 고통스럽게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양식을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입니다.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오는 자는 절대 주리지 않고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떡이니’라는 단어가 לחם(레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는 값없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만나가 언제부터 내리고 있습니까? 신 광야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 복음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내가 무슨 행위를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매일같이 내리는 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양식을 통해서 시험을 하시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양식이 내려오다가 6일째에는 갑절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유에서 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기고 안식일에 나갔던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시험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들도 율법적인 행위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의 의로만이 매일같이 양식이 하늘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린 양식을 믿음으로 나가서 거두어들이고 또한 6일째에는 갑절로 거두어서 주일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각 교회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 광야를 통해서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여기에 견주어 마태복음의 족보에 올라간 구속사의 인물은 ‘람’이라는 사람입니다.
대상2:9 헤스론이 낳은 아들은 여라므엘과 람과 글루배라
역대상의 족보에 헤스론이 낳은 아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스론이 낳은 아들이 세 명인데 여라므엘과 람과 글루배입니다. 람도 육적 장자는 아니지만 영적 장자로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 족보에 올라가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람’ רם(람 7410) 람, 이라는 뜻이며 רום(룸 7311) 높여지다, 올라가다, 일으키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람이라는 인물도 구속사 족보에 들어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람이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천한 자리에 오셨다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신 광야와 같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가시 잡목에 걸려 온 몸이 찢어지시고 고통당하셨으며 더러운 진흙과 같은 비참한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이렇게 가장 낮은 베들레헴의 한 구유에서 탄생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곳에서 사셨습니다. 이곳이 나사렛입니다. 이렇게 비천한 인생을 사시다가 온 몸을 채찍에 맞으시고 괴롭힘 당하셨으며 마지막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신 광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하나님은 끝내지 않으시고 람과 같이 삼일 만에 부활시키셔서 가장 높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하늘로 승천하여 모든 영광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람을 통하여 예수님은 가장 높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만왕의 왕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 광야와 람을 통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영적으로 깨닫는 것은 교회생활을 하면서 원죄의 생활을 회상하거나 그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율법의 행위로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만 먹으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져 고통스럽게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가장 비참하게 이 땅에 오셔서 나의 모든 원죄를 해결해주시고 또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셔서 모든 영광을 받으신 주님을 통해서 날마다 생명의 양식을 믿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신 광야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기초가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람과 같은 부활의 주님을 믿고 마지막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지 않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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