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지만 날마다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영혼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졌지만 성화 구원을 이르기 위해서는 날마다 경건 훈련을 받아야 한다. 성도가 경건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하나님이 모욕을 당한다. 성도가 경건한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
경건 훈련에 관한 설교 예화
신자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이 세상에 몸소 고난을 겪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그리스도의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통한 경건 훈련입니다. 경건의 훈련은 평안하고 안일할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핍박과 고난의 현실 속에서 더 빛납니다.
교회사 초기의 콘스탄티노플 감독이었던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A.D. 347∼407)은 방탕한 여인 황후 유도기아(Eudoxia)에게 죽임을 당해 가면서도 경건치 못한 그녀의 생활을 질책했고, 밀란의 감독 암브로우스(Ambrous)는 데오도시우스(Theodocius) 황제가 데살로니가 사람을 7천 명이나 학살한 혐의로, 그가 교회에 들어오려는 것을 문전에서 막았다고 합니다.
현대 한국 교회는 이런 핍박과 고난의 때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의 경건의 모습이 아쉽습니다. 물량 주의와 열광 주의에 침전되어 경건의 모습을 잃은 까닭에 교회는 사회로부터 질시를 받고 있습니다. 구원의 주체로서 교회가 바로 서고자 하면 잃어버린 경건의 모습을 빨리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경건 훈련
자녀라고 말할 때 그 범위는 갓난애로부터 결혼해서 집을 떠날 때까지의 기간인데, 부모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부모의 권위 아래서 양육받도록 명령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 게 순종하라(골 3:20)"는 이 한마디 속에 자녀에 대한 명령이 요약됩니다. 예수님은 순종의 경건을 가정에서 배웠습니다. 이것을 십자가 위에서 실행하여 완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수의 아들로서 가게에 가서 일하는 것과 가족들의 생활을 돕는 일, 이것이 그의 사명을 위한 기본 교육과 준비가 되었고 맏아들로서 그의 누이와 형제들과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효도와 가정에 대한 책임을 훈련한 경건의 연습입니다.
이 순종하라는 명령 속에는 비록 부모가 그릇되더라도,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 것이 옳으니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깊은 조화와 순응의 의식세계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하게 됩니다. 복종하라는 명령 속에서 자녀의 축복으로 가는 길이 연결되고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이며 하나님의 권위에 순응하게 하기 위한 단계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는 이 순종을 통해서 어리석음과 자유분방의 길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으로서 경건을 훈련받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베브리 라헤이(cleverly Lahaye)는 자녀들의 불순종의 여섯 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첫째는 주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육신의 죄를 짓도록 허용하여 왔으며, 셋째는 부모의 훈련이 결핍된 채 살아왔고, 부모의 묵인으로 훈련과 가르침의 부족 때문에 불순종하고, 넷째는 복종심이 개발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께 순복 하는 것을 지켜보고, 딸은 어머니가 남편에게 순복 하는 것을 지켜보고 관찰함으로 순복을 배우는데 이것이 개발되지 못했다는 이유입니다. 다섯째는 부모 사랑의 결핍이 이유인데, 사랑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인 불순종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로는 권위를 존경하라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준 명령의 실행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13, 14세기의 영성
13세기에는 탁발승단(Mendicant Friars)이 생기면서 프란치스코회(franciscans), 도미니코회(Dominicans), 깔멜회(Carmelites), 어거스틴회(Augustins) 등이 등장했습니다. 탁발 승단을 걸식수도단이라고 번역하는데 종교적으로 깊은 뜻을 나타내 주지 못하며 이에 비하여 탁발은 겸손, 순종의 훈련 등의 영성훈련으로서의 의미를 표현해 줍니다.
프란치스코회는 정적이고 도미 니코회는 관조적입니다. 아시스의 프란시스(Fransis ofAssisi, 1181∼1226)는 "사랑, 평화, 자유, 청빈" 이 네 가지를 정신적으로 한 "작은 형제단"을 이끈 반면, 도미니코(Dominie, 1173-1221)는 최고 가치로서 가난을 명령했으며 자신이 또한 거지로서 "설 교수도회(Prea-china Order)"를 이끌었습니다. 설교는 겉치레였으며 그들은 영적 지시를 위한 훈련에 집중하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도미니코 수도사는 토마스 아퀴나스로서 그의 명상은 이성이었습니다.
14세기는 13세기보다 더 어둡고 염세적이나 엑크하르트(Hoister Eckhart, 1260-1327)는 극도로 관조적이며 그의 지적인 경향은 아퀴나스, 어거스틴, 디오니시우스였습니다. 그는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적 신학을 확신했으며, 하나님은 말할 수 와는 초본질적 지식이므로, 하나님을 알기 체해서는 미지의 어두움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방 교회의 영성으로서 비잔틴 영성은 수도원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두 개의 중요한 수도원 중에서 캐더린 수도원은 엄격하고 카리스마적이었고, 콘스탄티노플 수도원은 활동적이고 수용적이었습니다. 이 두 수도원의 긴장이 비잔틴 수도원 영성을 가장 창조적인 것의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맹구우목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존귀한 것인가를 깨우치는 옛이야기 중에 '맹구우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 황해 바다 깊은 물속에 수백 년 나이 먹은 늙은 거북이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너무 나이가 많아 눈이 안 보이는 거북이라 해서 '맹구'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눈먼 거북이에게 평생소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해변에 한번 올라가 육지를 거닐어 보는 것인데, 토생원이라도 한번 만나보면 더 여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눈이 안 보이니 동서남북 방향을 알 수 없고, 늙어 힘이 없으니 육지까지 헤엄쳐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압록강에서 벌목한 원목 큰 나무등치가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떠내려갈 때, 시간 차이가 안 나도록 잘 맞추어 물 위로 솟구쳐 오르면 요행히도 나무둥치를 만나 그 위에 올라타고 육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한 뼘의 오차로 흘러가는 나무둥치를 놓치면 또 다시 바다 밑으로 내려가 백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간발의 차이로 나무둥치를 놓친 지 천 년 만에 육지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사이처럼 무감동과 무관심의 시대에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하고 집중시켜야 할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생에 대한 잃어버린 감격을, 삶에 대한 감수성을,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놀라운 경이감을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영성훈련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점잖다는 것
경건이란 것은 속인 들 생각으로는 '점잖다'는 낱말로 통합니다. '젊지 않다'는 뜻일 것입니다. 젊지 않다는 것은 늙었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처럼 주먹질도 하지 않고, 뛰지도 않고, 까불지도 않고, 무게가 있고, 엄숙하고, 어른답고 말하자면 그런 축에 드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중세기 기독교에서는 '경건'을 사노(生活)라고 애썼습니다. 그때에는 육정이나 세속생 활을 불경건으로 여기고 금욕과 탈속을 경건으로 상정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사원(寺院) 불교 비슷한 삶을 경건으로 정의했습니다. 의복도 승복을 입고 노동을 신앙의 수련 과정으로 삼았습니다. 그 근행(勤行)에 성공하면 석굴 속의 성자기둥 위의 성자 등으로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경건파」의 유래
기독교 역사에는 경건주의(Pietism)란 신앙운동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17세기말에 독일의 루터교에서 일어나 18세기까지 활발히 전개되었던 신앙운동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신조의 지나친 강조에 반대하여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 외적인 행동보다는 내적인 신앙을 중요시하며 성직자들의 권위보다는 개인적 양심의 판단을 옳게 여길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임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렇듯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파악하고 발전한 종교개혁운동은 17세기에 이르러서 본래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즉, 루터교는 신조와 교리를 절대시 하시면서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지 않으며 심오한 종교적 경험과 숭고한 생활을 등한히 하고,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도덕적 및 신앙적 생활을 돌보지 않고 교권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니 결국 신도들은 모두 신앙의 길을 잃고 방황하며 미신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루터교의 타락상을 개탄한 나머지 프랑크푸르트의 목사이었던 필립 J. 스페너가 자기 교회 안의 유지들로 소위 건신단(建信國)을 조직하였습니다. '경건파'란 말은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조롱하는 뜻으로 사용한 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영혼의 봄
만물이 생동합니다. 생명의 위대함과 존엄함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봄입니다. 온누리에 생명이 있는 실존이면 모두 기침을 하며 깨어나 봄을 봄 되게 합니다.
아무려나, 수억 겁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봄을 기다리는 우리네 마음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죽은 듯이 버텨온 앙상한 간지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만은 변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일정이니 개헌이니, 박종철 고문사건, 복지원사건 등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떨리게 했지만 어디에선가 오는 봄을 막지는 못합니다.
한 시인은 봄이 광증난 자에게 맞아 죽었나 보라고, 오다가 발병이 낫는가 보라고 사람들이 수군대고 걱정하는 사이에 벌써 아무개네 울타리 곁에, 어느 개울가에 와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봄은 와 있는 것입니다. 이미 72년 전에 이 땅의 봄은 지축을 흔드는 만세소리에 실려 찾아왔던 것입니다. 암울했던 일제하의 겨울 속에서 봄은 그렇게 문을 활짝 열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봄은 과연 어떤 것일까? 박이 터져라고 싸우는 헤게모니 쟁탈전의 결과로 올 것인가? 제도상의 변혁이 가져다 줄 선물일 것인가? 남을 섬겨야 할 종의 자리에 있어야 할 자가 주인인양 섬김을 받으려고 착각하는 아류와 구조가 마땅히 깨어진다면 봄이 되는 것일까? 그래야 따뜻한 남쪽 나라, 봄이 와있는 나라가 되는 것일까? 물론 이런 것들도 봄을 초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이 땅에 봄을 초대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을 내부적으로 연결시켜 주고, 이웃과 이웃의 아픔과 기쁨을 서로 맞물려 줄 '참 인간 회복의 훈풍'이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불어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진지하게 교회는 갱신의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 영혼의 훈풍은 위로부터 불어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코끼리와 조련사
수피(Sufi)라고 불리는 모슬렘 신비주의자들은 이런 경고성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만약 코끼리를 수용하기엔 집이 작은 사람이 코끼리 조련사와 친한 친구 관계를 맺으려면 그전에 숙고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그 조련사는 자신만 혼자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도 데려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집을 당신 친구의 친구들과 나눠 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도 내주 하시는 손님으로서 결코 혼자 찾아오시는 법은 없습니다. 코끼리가 조련사와 더불어 대접을 받듯이, 그분은 자신과 더불어 영접되고 혜택을 받아야만 '소자'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영성은 총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은 단지 작은 '종교적 한구석' 또는 '영적인 나'라고 부르는 삶의 단편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과 인격전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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