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가복음 6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청중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겠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이 몇 개가 있는지 가서 보라고 말합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들을 축사하시고 예수님을 따르던 청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육으로 채워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적인 고민과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고민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주님을 통해서 해결해 주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나서 영육으로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막 6:32-44)
32절은 카이 아펠돈 에이스 에레몬 토폰 토 프로이오 카트 이디안입니다.
막 6: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6:32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예수와 제자들이 무리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육지에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아마도 그들은 호수 북동쪽으로 갔을 것이다. 이때 예수를 좇던 무리들은 황급히 요단강 본류에서 갈릴리 호수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얕은 곳을 따라 요단강을 횡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한적한 곳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호숫가에서 배를 이용하여 다른 호숫가로 이동하는 점이다. 그러나 눅 9:10을 참고하면 행선지는 이름이 “어촌”이라는 뜻을 지닌 “벳새다”라 하는 광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5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건너편 벳새다”로 가라고 지시한다.
그렇다면 33절에서의 도착 지점은 “벳새다”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같은 모순은 갈릴리 해변에는 이 지명을 지닌 곳이 두 곳(갈릴리 북동쪽과 갈릴리 서안쪽)이었다고 봄으로써 어느 정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갈릴리 북동쪽 벳새다는 헤롯 빌립이 도시(city)로 승격시키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스(Julias)의 이름을 따서 그곳에 명명함으로써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33절은 카이 에이돈 아우투스 휘파곤타스 호이 오클로이 카이 에페그노산 아우톤 폴로이 카이 페제 아포 파손 톤 폴레온 쉬네드라몬 에케이 카이 프로엘돈 아우투스 카이 쉬넬돈 프로스 아우톤입니다.
막 6: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6:33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 이 구절로 보아 군중들이 배가 떠난 뒤 뒤늦게야 배에 탄 자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문맥상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예수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호수 주면에 있는 여러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각각 자기 마을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가는 배를 보고(아마 당시 역풍으로 인해 배의 진행이 지체된 듯함)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호숫가에 위치한 여러 마을 사람들이 멀리서도 예수의 일행을 알아보았다면 그들은 이미 예수에 대한 명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로 보여진다.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해 주는 구절이 곧 이어진다.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徒步)로....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 이는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 기법이 돋보이는 장면으로 휴식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는 예수의 일행과 그 일행을 따라 달리는 군중들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즉 부정적 시각에서 보면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시달리며 피곤해하는 예수의 일행을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휴식하러 떠나는 예수의 일행을 조보(徒步)로 좇아가는 군중들의 열성을 생각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 대한 기대로 충만했던 무리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들은 수십km가 넘는(가버나움에서 벳새다까지는 약 30km) 먼 거리를 지칠 줄 모르고 걸어 예수의 일행보다 먼저 당도했던 것이다. 예수께 대한 무리들의 기댜 심리는 이제 최고조에 달했음을 알게 한다.
34절은 카이 엑셀돈 에이덴 호 이에수스 폴륀 오클론 카이 에스플랑크니스데 에프 아우토이스 호티 에산 호스 프로바타 메 에콘타 포이메나 카이 에릌사토 디다스케인 아우투스 폴라입니다.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앞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군중들이 예수가 탄 배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 예수 일행이 도착하기 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예수는 배를 대고 배에서 내려오는 장면이다. 이것 역시 마가의 특유한 묘사이다. 항상 배, 바다, 군중이 함께 등장한다(3:7-9 ; 4:1,36 ; 5:2, 21).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 자신을 만나려고 모여드는 군중들을 보고 예수는 휴식의 장(場)을 빼앗긴데 대한 불쾌한 반응을 보이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와 제자들의 피곤함을 모두 잊고 깊은 감동과 연민의 정을 강하게 느끼셨다. 불쌍히 여긴다는 헬라어 단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 4697 동사이다.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스플랑크논(4698)에서 유래했으며, '내심으로 감동하다, 동정심을 가지다, 동정하다, 자비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유대교의 저술과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법은 직설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3인칭입니다. 직설법을 사용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실제로 측은히 여기셨다는 의미다. 과거 시제는 목자 없는 양처럼 고통 중에 있는 영혼들을 보고 있었다는 의미다. 수동디포는 예수님을 따르는 청중들을 보니 목자 없는 양같이 처량하게 보여서 불쌍히 보였다는 의미다.
실로 예수의 이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이야말로 모든 구원과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마 14:14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목자 없는 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는 민 27:17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간혹 사용하신 표현이다(마 9:36). 이 말은 먼저 자기 의무를 잊은 거짓 목자에 대한 비판적 이해할 수 있다(왕하 22:17 ; 겔 34:5).
왜냐하면 당시 율법학자, 바리새인, 서기관 등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무리들이 예수를 이렇게 열성적으로 따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 행위가 당시 종교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진리로 받아들여졌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이 무리들에게 진리를 공급해주지 않았으므로 무리들은 진리에 심히 굶주려 있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반대로 예수 자신이 지금부터 민중의 새로운 목자로 나선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가 배에서 내려 자신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며 여러 가지로 가르친다고 표현하였다. 사실 양보다 더 그의 인도자를 필요로 하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목자 없는 양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물도, 꼴도, 안식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처럼 그의 백성을 인도하며(사 40:11), 다윗처럼 그들에게 휴식을(겔 34:23-25) 제공하심으로(Lane Mauer) 그들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셨던 것이다(요 10:1ff).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무리들과 굶주려 있는 무리들을 향한 예수의 인간애는 애절한 것이었다. 8:2에 나오는 4.000명 급식 이적에서 보여준 예수의 감정은 무리들의 영적인 굶주림만 아니라 육체적 굶주림까지 걱정하며 애통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인간 사랑은 인간의 영. 육 구원, 즉 전인(全人) 구원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가 뒤에 나오는 급식 이적에 대한 이해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이 가르침의 주 내용은 천국 복음일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다(눅 9:11). 그리고 마태와 누가는 각각 병 고치시는 장면을 더불어 기록하고 있다(마 14:14 ; 눅 9:11). 이로 보건대 예수는 모인 무리들의 모든 필요(영. 육간)을 채워 주셨음을 보게 된다. 진정 그 무리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목자가 주어진 것이다(시 23:1).
35절은 카이 에데 호라스 폴레스 게노메네스 프로셀돈테스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레구신 호티 에레모스 에스틴 호 토포스 카이 에데 호라 폴레입니다.
막 6: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절은 아폴뤼손 아우투스 히나 아펠돈테스 에이스 투스 퀴클로 아그루스 카이 코마스 아고라소신 헤아우토이스 아르투스 티 가르 파고신 우크 에쿠신입니다.
막 6: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6:35-36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 급식 이적의 치밀한 도입부를(30-34) 거쳐 이제 본론부에 들어선다.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언제쯤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동안 예수가 가르쳤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시각은 일반적으로 저녁 먹을 시간 곧 초저녁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가르치느라고 시간이 지난 것을 못 느끼는 듯하며 그 시간의 경과를 제자들이 예수에게 보고하며 제안하고 있다.
그 제안은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고 사람들을 해산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곳이 “빈들” 곧 보통 때는 인적이 없는 한적한 광야이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벳새다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곳이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벳새다 남쪽의 “엘바디하” 평야가 동쪽으로 뻗어 있는 구릉의 중간 지역이라고 한다.
여하튼 실로 현상적으로 볼 때에 시간적, 장소적으로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해져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가까운 마을로 나가 각자 식사를 해결하게 하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제안을 하였다. 이와 같은 제안을 통해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이 31절의 묘사와 같이 식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열정적(熱情的)이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그리고 식사 시간을 지나칠 정도로 예수의 활동과 청중들의 태도가 진지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설교 현장은 빈 들이었지만 그들의 진지함과 열정은 빈 들을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촌”(아그루스)은 들판에 자연 발생적으로 이뤄진 조그마한 촌락을, “마을”(코마스)은 조금 발달된 소읍을 가리킨다.
37절은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아우토이스 도테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파게인 카이 레구신 아우토 아펠돈테스 아고라소멘 디아코시온 데나리온 아르투스 카이 도멘 아우토이스 파게인입니다.
막 6: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6:3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 예수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여 청중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는 강조적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너희가”(휘메이스) 먹을 것을 주라 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능력을 과시한 명령이기보다 오히려 제자들의 절대적 무능을 일깨우고 또 그들의 당신께 대한 영적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라 본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의 명령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리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액수가 필요하다는 조로 예수께 반문을 한 것이다. 제자들은 청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이 파악한 청중의 숫자를 통해 식사에 필요한 예산을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200 데나리온은 당시 한 사람의 하루 임금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경우 한 사람이 약 8개월 정도 벌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혹자(Bruce)의 주장대로 당시 제자들에게 이만한 돈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제자들에게는 매우 큰돈이었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요 6:7에서 빌립이 200 데나리온을 사용해도 청중들을 먹이기에 부족하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계산에 밝았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불합리하게 보이는 명령을 내리고 계신 그분의 뜻과 그분의 초합리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無知)했다는 사실이다.
38절은 호 데 레게이 아우토이스 포수스 아르투스 에케테 휘파게테 카이 이데테 카이 그논테스 레구신 펜테 카이 뒤오 익뒤아스입니다.
막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6:38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 예수는 직접 문제 해결에 참여한다. 먼저 예수는 즉시 구할 수 있는 떡이 몇 개인지 제자들에게 알아보라고 명한다. 제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신 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①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자신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계신 예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즉 문제의 해결자로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예수께 전적인 의뢰를 하는 참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② 비록 하찮은 존재이나 예수의 도구로 사용되기만 하면 위대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요(롬 4:17),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27).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떡과 물고기의 숫자는 4 복음서 모두 동일하다. 다만 요한복음에서는 떡이 구체적으로 보리떡이고 소유자가 어린아이임을 덧붙이고 있다(요 6:9). 이 음식의 양은 37절에서 제자가 어림잡아 산출한 예산과 대비되어 엄청나게 부족한 것임을 강조한다. 거기 모인 5,000명 이상의 군중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양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처럼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고 더군다나 어린아이가 먹으려고 소유했던 것임을 감안한다면 한 사람의 식사 양으로 충분한 것이 못 되었을 것이다(마 14:17 ; 요 6:9, 13). 이로 보건대 마가는 아주 적은 양으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사실에 강조점을 두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밝힌 음식의 양은 기적의 효과를 고무시키기 위한 배경이 된다.
39절은 카이 에페탁센 아우토이스 아나클리나이 판타스 쉼포시아 쉼포시아 에피 토 클로로 코르토입니다.
막 6: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절은 카이 아네페손 프라시아이 프라시아이 아나 헤카톤 카이 아나 펜테콘타입니다.
막 6: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6:39-40
명하사....떼를 지어...앉게 하시니....앉은지라. ---- 예수의 행동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함으로 나아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청중들을 무리 지어 앉게 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데를 지어”(쉼포시아 쉼포시아)란 마치 집안에서 식탁 주위에 앉은 것처럼(주로 U자형으로 앉음) 옹기종기 모여 앉은 상태를 일컫는다. 그렇게 모여 앉은 한 때가 50명 혹은 100명씩 되는 규모였다.
한편 마가는 그들이 앉은 장소가 “푸른 잔디”위임을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50명씩 앉게 하라고 명하나(눅 9:14) 푸른 잔디라는 말은 없다. 마태와 함께 “푸른 잔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마가는 이 단어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있다. 먼저 35절에서 언급한 “빈들”이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신선하고 생동감 있는 들판임을 암시해 줌으로써 식사를 위한 준비와 함께 한층 더 희망적인 분위기를 창출한다.
또 “푸른 잔디”에 앉게 하는 예수의 지시는 시 23편을 연상케 한다. 즉 목자가 양 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듯한 모습을 이 구절에서 보게 된다. 결국 예수는 설교도 하시고 푸른 초장 위에서 음식까지 먹임으로써 민중의 손색없는 목자가 된다. 이는 34절에 나오는 예수의 탄식과 잘 어울린다. 또 “푸른 잔디”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편히 “쉼”과 평화로운 풍경이다.
참으로 예수 앞에서 쉼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마가는 그려내고 있다. 그와 더불어 “푸른 잔디”라는 그때가 팔레스틴의 우기가 막 끝난 후인 3, 4월경이었음을 보여준다(마 14:19). 특히 요한은 이때를 유월절이 가까운 때(니산월 14일, 태양력으로 3, 4월경)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요 6:4). 그렇다면 이때는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양으로 잡히시기 만 1년 전의 사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50명 또는 100명 단위로 무리를 지어 앉는 것은 식사와 교제를 위한 공동체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의 야영(野營) 생활을 연상케 한다(출 18:21).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와 더불어 제2의 출애굽을 경험하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새 공동체를 경험하게 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급식 기적의 최고점이라고 할 수 있는 41-44절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이끌어들인다. 한편 40절에 언급된 바 있는 “떼로”(프라시아이 프라시아이)에서 “프라시아이”란 “작은 정원”, “꽃밭”이나 “정원”같은 인상을 주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아마 이러한 인상은 무리들이 매우 질서 있게 앉아 있었고, 또 그들이 입은 옷들의 색깔이 매우 다양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 주고 있다 할 것이다(Donald W. Burdick).
41절은 카이 라본 투스 펜테 아르투스 카이 투스 뒤오 익뒤아스 아나블렢사스 에이스 톤 우라논 율로게센 카이 카테클라센 투스 아르투스 카이 에디두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히나 파라티도신 아우토이스 카이 투스 뒤오 익뒤아스 에메리센 파신입니다.
막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6:41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제자들에게 주어. ---- 예수는 유대의 전통적인 공동 식사 관습에 따라 자신이 가장의 위치에서 그리고 그 모인 무리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고 먼저 하늘을 향해 감사와 찬양을 한다. 특히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상징한다(요 11:41 ; 17:1). 그리고 이때 드리는 기도의 형식은 “찬송하리로다! 땅에서 양식을 내신 만유의 왕이신 주 우리 하나님이시여!”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예수의 행위를 성만찬과 연결시키는 해석들도 있지만 적절하지 못하다. 여기서는 포도주도 없고 또한 성만찬에는 없는 물고기가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동 식사의 전통적 관습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한 다음, 직접 떡을 떼어 제자들로 하여금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고 또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다.
이것 역시 유대 공동 식사의 관습 곧 가장 또는 그 식탁의 주빈이 음식을 떼어 나누어주는 전통적 관례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떼어”(카테크라센)란 직설법 부정 과거 시상으로서 그 행위의 사실성과 장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언급된 “주어”(에디두)는 능동태 미완료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눠주어 분배케 하셨음을 암시한다. 실로 그 떡은 떼시는 예수의 손 안에서 계속 커져서 예수께서 무리들을 모두 먹이실 때까지 불어났을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이적 사역을 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 아직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단어는 기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가 골고루 돌아갔음을 밝힘으로써 창조의 능력으로 만물을 주장하시는 예수의 초월적(超越的)인 권능을 단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
42절은 카이 에파곤 판테스 카이 에코르타스데산입니다.
막 6:42 다 배불리 먹고
========6:42
다 배불리 먹고. --- 이 표현은 매우 함축적 의미를 시사한다. 우선 이제까지 진행되어온 이야기를 총 마감하고 있다. 즉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사실상 불가능했던 환경, 그리고 궁여 지책(窮餘之策)으로 등장한 아주 작은 양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빈약함에 대조되어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부르게 되었다는 말로 기적을 완결 짓는다. 또 다른 의미는 배부르다는 말은 충분히 만족해하는 표현이다.
즉 더 이상 부족하지 않다는 말이다. 충분한 식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셋째로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식사가 공동체 안에서 교제의 장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50명, 100명 단위로 식사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더불어 나눔을 뜻하고 모두 하나 됨을 뜻한다. 그들 모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주 마리로 큰 이적을 이루신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모두가 함께 배불리었으므로 하나의 공동 식사를 한 셈이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배불리었으니 풍요와 여유가 있고 따라서 공동체 안에 평화가 찾아온다.
이 장면은 31절의 분주함이나 33절의 군중 이동과 같은 긴박감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휴식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마가가 묘사하는 기적의 장면은 이 이야기의 서론부에서 표현된 상식 밖의 기대와는 달리 소박(素朴)하게 처리된다. 그 기적에 대해 놀라거나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식사의 평화로움이 깃드는 조용한 잔치로 인상 지워진다. 이것은 마가가 표현한 예수의 이상적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참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43절은 카이 에란 클라스마톤 도데카 코피누스 플레레이스 카이 아포 톤 익뒤온입니다.
막 6: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6:43
남은 떡 조각..... 열 두 바구니에 차게.----앞절에서 밝힌 기적의 결과를 다시 확인하고 그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즉 모두가 배불렀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남았다는 말은(그것도 최초의 음식 양보다 훨씬 많게) 넉넉한 공동 식사였음을 확인해 준다. 여기서 남은 떡과 물고기를 거두어 담은 “바구니”(코피노스)는 유대 사람들이 평소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으로서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휴대용 작은 바구니이다.
요즈음으로 말한다면 손가방 정도일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스스로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 바구니에 점심 식사와 몇 가지 생필품을 넣어 가지고 여행을 했다고 한다(W. W. Wessel). 한편 남은 떡과 물고기를 담은 바구니가 12개인 것은 제자들의 수가 12명인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음식을 각 사람에게 날라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남은 음식을 거둔 사람도 제자들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특히 요 6:12에서는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남은 음식을 거두라고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의 수가 “12명”이었으므로 떡과 물고기를 담은 수효는 12 바구니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한편 이러한 “12”란 숫자는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12지파를, “남은 것”은 구약에서 누누이 강조해온 “남은 자” 사상(스 9:8)을 은연중에 암시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Talor Grant). 더욱이 예수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생명의 떡으로 오신 당신이 기갈(飢渴) 중에 있는 뭇 심령들에게 생명을 주시돼 더 풍성히 주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셨을 것이다(요 10:10).
44절은 카이 에산 호이 파곤테스 투스 아르투스 호세이 펜타키스킬리오이 안드레스입니다.
막 6: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6: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 식사가 끝났을 때 군중의 수효가 밝혀진다. 아마도 50명 또는 100명씩 모여 앉았었꼬 식사 동안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천 명의 수를 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마 14:21에서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으로 그들은 남자 장정만을 공식적인 통계에 넣는다(민 1:3). 따라서 본문에서 가리킨 “남자”는 청중이 모두 남자로만 구성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남녀로 구성된 청중 중 남자만 수효를 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급식 대상이 된 사람의 수효는 약 2만 명 정도로 훨씬 불어나게 될 것이다.
마가는 이러한 암시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권능이 얼마나 탁월하고 놀아운 것인지를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 이적은 단지 “떡”이나 “오천 명”이라는 현상적 사실에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의 “인류 구원”이라는 궁극적 목적에로 모든 독자들의 눈길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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