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에서는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된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을 부르심(행 9:1-43)
1-19a절, 사울을 부르심
[1-2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道)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은 후에 자기의 행동이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였다(딤전 1:13). 그는 예루살렘의 신자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심지어 당시 유대인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회당들에 갈 공문을 요청했다.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4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회는 그곳의 회당들에도 영향력을 가졌던 것 같다. 무지에서 나온 잘못된 열심은 이렇게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죽이는 극히 악한 일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3-5절]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에게 비친 그 빛은 아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해보다도 더 밝은 빛일 것이다. 사울의 무지한 열심의 걸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개입하셨다. 그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거꾸러뜨리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살아계심을 증거하였다. 살아계신 주께서는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또한 주께서 그의 제자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심도 보여준다(마 10:40).
[6-9절]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사울이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던 그 3일은 그에게 기도하고 묵상하며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시간이며 그의 삶에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 시간이었다. 그는 후에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죄인의 괴수였다고 고백하며 그 시간을 늘 기억하였다(딤전 1:15).
[10-12절]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直街)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환상 중에](전통본문)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는 살아계셔서 직접 제자들에게 역사하셨다. 본문에는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10, 11, 15절). 주께서는 환상 중에 그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환상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나 사도 시대에 자신을 계시하신 한 방법이었다. 주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장소와 사람 이름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지시하셨다. 사울은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날들은 그에게 회개하며 믿기로 결심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사울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다.
[13-14절]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害)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하여 많은 사람에게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고 들은 바가 있었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면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일일 것이다. 또 아나니아는 사울이 다메섹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다고 말했다.
[15-16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는](원문)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그릇임이니라]. [이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보일 것임이니라] 하시니.
아나니아의 불만스러운 심경에서 나온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처음 명령을 그대로 반복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며 그의 긍휼과 너그러움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다.
주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사울에게 가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는 그가 주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택한 주의 그릇이기 때문이었다. 주께서는 원수 같은 사울을 택하셨다. 둘째는 그가 주의 이름을 위해 많은 해를 받을 것을 그에게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은 주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과연 그는 그런 고난을 받았다.
[17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주님의 답변은 아나니아에게 충분하였다. 그는 주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는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사울에게 안수하며 “형제 사울아”라고 말하였다. 그는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고 주의 지시대로 형제로 받아들였다. 또 그는 주 곧 그가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자기를 보내어 그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살아계신 주님이심을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주 되심을 한번 더 확인하고 믿게 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8-19a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주께서 사울에게 주셨던 환상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었고 강건하여졌다. 세례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표시이었다.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그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을 확증하는 일이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사울은 이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사건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무지에서 나오는 잘못된 열심을 조심하자. 이방 종교인들이나 이단 종파에 속한 자들이나 심지어 공산주의자들도 열심을 낸다. 우리는 잘못된 열심을 조심하자.
둘째로,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사울에게 나타나 셨고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신 그는 지금도 성령으로 온 세상에서 역사하시고 또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감동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셋째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해야 한다.
넷째로, 주 예수께는 풍성한 긍휼과 사랑, 그리고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크신 능력이 있으시다. 그는 그와 그의 제자들을 핍박했던 원수 같은 사울을 사랑하셨고 그의 무지하고 완고한 마음을 변화시켜 구원하셨고 또 그를 그의 사도로 삼으셨다. 핍박자가 제자가 되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또 주님의 능력을 믿고 완고한 가족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자.
19b-31절, 사울이 예수님을 증거함
[19b-22절]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새 친구들이 생겼다. 유대교의 랍비들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들이 친구가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교제이었다. 성도들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영적 교제이다. 사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했고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유대인들이 자기처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듣는 사람들은 다 놀라며 그를 믿지 않았으나, 그는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케 했다.
[23-25절]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그를 담아](전통본문)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약 3년의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님을 믿은 후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고 3년 후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15일간 그와 함께 유했다고 말했다(갈 1:17-18). 그 3년 중 얼마 동안 아라비아에서 아마 하나님과 깊은 기도의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메섹 성에 살던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했다. 신앙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특히 전도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그 계교가 그에게 알려졌고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자, 제자들은 밤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렸다.
[26-27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갈라디아 1장에 보면, 그는 3년 만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그와 함께 15일을 유하면서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갈 1:18-19). 다른 사도들은 여러 다른 곳으로 흩어져 전도 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과거에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자에 대해 사도들은 두려움과 거리낌을 가졌다. 그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참 교제는 상대방의 진실을 알 때 가능하다.
사울이 당한 어려움을 도와준 인물은 바나바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친구이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 4:36-37에 보면 자기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둘 정도로 진실히 주를 믿고 따른 자이었다. 또 사도행전 11:24는 그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건하고 선한 인물을 사울에게 친구로 주셔서 사울과 사도들의 교량 역할을 하게 하셨다. 그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사울을 이해하고 그를 주의 제자와 형제로 용납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바나바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세상 친구가 아니고, 주 안에서 사울을 위하고 그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준 믿음의 좋은 친구이었다.
[28-30절]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사울은 예수께서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도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또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였다. ‘헬라파 유대인’(헬레니스테스)이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힘썼다. 그것은 신앙적 충돌에 기인한 것이었다. 더욱이 한때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사울이 배신자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들의 마음은 더욱 격분했을 것이다.
형제들은 위급함을 알고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다(갈 1:21). 길리기아 다소는 사울의 출생지이었다(행 22:3). 나중에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거기서 함께 1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다(행 11:25-26).
[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교회들](전통본문)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본절은 그 당시의 교회들의 형편을 네 마디로 표현하였다. 첫째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은 평안하였다.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기독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이 변하여 예수 믿는 자가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었을 때, 유대인들의 핍박은 한 풀 꺾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실상 주께서 주시는 내적인 평안은 더욱 큰 것이었다. 교회는 항상 이 평안 가운데 거한다.
둘째로, 교회들은 든든히 서 가고 있었다. ‘든든히 서 간다’는 원어(오이코도메오)는 ‘집을 세운다, 증진시키다, 성장시키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 건립, 즉 성도들의 성화(聖化), 즉 성도들이 지식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있어서 자라가는 것을 말한다.
셋째로, 교회들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들이 건전하게 진행하며 발전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주를 경외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전한 교회이다. 그런 교회들에는 성령의 위로가 있다.
넷째로, 교회들은 수가 더 많아졌다. 교회들의 수도 또 교인들의 수도 많아졌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상적 신앙생활을 할 때, 전도의 효력과 결실이 나타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지 않는 이웃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전도는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명하시는 일이며 성도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복된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통과해야 하며(행 14:22) 경건한 삶에는 핍박도 있다(딤후 3: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피할 길도 예비해주신다.
셋째로, 우리는 바나바같이 좋은 친구가 되자. 우리는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이지 말고 필요한 때에 상대방의 신앙 이력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그를 변호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교회들의 평안과 영적 성장과 성령의 위로를 위해 기도하자.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평안을 주셨다. 우리는 믿음과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 안에 항상 거하자. 또 우리는 성경말씀의 교훈 안에서 지식과 믿음이 자라고 거룩함과 사랑이 온전해지자. 또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고 성경말씀을 진심으로 순종한다면, 성령의 위로도 풍성할 것이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기를 원합니다’는 예배 끝날 때의 축도는 바로 이것을 포함한다. 또 그렇게 되면, 우리의 교회들도 구원받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더하게 될 것이다.
32-43절, 베드로가 기적들을 행함
[32-33절]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년이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하므로 형제들이 사울을 다소로 보냈을 때에,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35킬로미터쯤에 있었다. 누가는 본문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성도’라고 표현했다. 그는 본서에서 믿는 자들을 ‘형제,’ ‘제자,’ ‘믿는 자,’ ‘성도’ 등의 말로 표현하였다. ‘성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이라는 뜻으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자주 사용한 명칭이다. 많은 기적들 중에 일부만 기록한 성경이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그 내용이 놀랍기도 하지만 더욱이 다음에 나오는 욥바와 가이사랴에서의 사건들에 연결되기 때문인 것 같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8년이나 되었다.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도 모든 병자들이 다 고침받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애니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즈음 병상에 눕기 시작한 듯하다. 그는 그에게 병고침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 베드로를 통해 병고침을 받게 되었다.
[34절]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예수께서는 살아계셔서 사도들을 통해 능력의 일들을 이루셨다. 사도들을 통해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다(행 2:43; 5:12). 기적은 사도들의 신분증과 같았다(고후 12:12).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 이후에도 기적들을 계속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며 죄를 떠나고 거룩하고 선한 새 삶을 사는 것이다.
[35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본문의 말씀은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던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병고침의 기적을 본다고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셔야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36-37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영양, 羚羊; gazelle)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선행과 구제는 참된 경건의 증거이다. 성경의 전체적 요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서로 사랑하며 선을 베풀라는 것이다(요일 3:23). 그런데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고 그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었다. 경건하고 선한 성도도 병들어 죽기도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죽으나, 그 후에 천국에서의 안식이 있고 또 부활이 있다.
[38-39절]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웠다. 룻다에서 서북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도시가 욥바이다. 욥바에 있는 제자들은 베드로가 룻다에서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던 애니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빨리 와달라고 간청하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나이 40세쯤 되었을 사람이지만, 주께서는 그에게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과 권위를 주셨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자 그들은 그를 데리고 다락에 올라갔다. 모든 과부들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다. 옛시대에 옷은 귀한 것이었다. 그 옷들은 다비다의 선행의 흔적들이었다. 모든 과부들의 눈물과 그들이 보여준 옷들은 다비다가 어떻게 진실하고 선한 성도이었는지를 잘 증거하였다.
[40절]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어보냈다. 그것은 기도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해야지 사람 앞에 하듯 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 중심을 아뢰는 것이어야 한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우리는 병자를 위해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4-18,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베드로는 기도를 마친 후 돌이켜 다비다의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다비다는 눈을 떠 베드로를 보았고 일어나 앉았다. 베드로는 룻다에서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만 의지하고 그를 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42절).
[41-43절]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제혁업자]의 집에서 유하니라.
다비다를 살린 자는 베드로가 아니고 그와 함께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은 베드로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은 그 사건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기적들을 행하게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주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운 애니아를 고쳐주셨고 또 죽은 여제자 다비다를 살려주셨다.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 개인 속에 또한 우리 회중 속에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베드로의 기적들과 또 성경에 기록된 많은 증거들을 통해 그를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의 믿음은 사랑과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고 또 이제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는 믿음과 선행으로 단장된 자이다. 선행은 산 믿음의 증거이다.
셋째로, 우리는 죽음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자. 인간의 생명과 죽음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그의 정하신 때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고,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하고, 또 죽을 때는 천국에 들어감을 확신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병에 걸렸거나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자. 주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또 그는 환난 날에 기도하고(시 50:15), 특히 병들었을 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해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우리는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받으며 느끼며 살고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에스겔 4장 주석 강해설교말씀] 예루살렘 멸망의 예표(겔 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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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강해설교말씀]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눅 17:1-37) (0) | 2022.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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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예배 설교말씀] 임종 예배 설교말씀-영생의 소망(요 6:37-40) (0) | 2022.03.18 |
[히브리서 2장 성경 좋은 말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히 2:1-18) (0) | 2022.03.13 |
[로마서 8장 주일 성경 좋은 말씀] 성령의 인도하심(롬 8:1-39) (0) | 2022.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