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롬 8:1-39)
로마서 8장은 구원받은 성도의 거룩한 삶, 곧 성화의 과정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성화는 성령의 은혜이다.
1-14절, 성령을 따라 삶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사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나를](전통본문) 해방하였음이라.
‘이제’는 구원받은 후를 가리킨다. ‘육신’은 사람의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이요 육신 즉 몸의 죄성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고 진실히 주를 믿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비록 부족과 연약은 있지만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시는 영생을 가리킨 것 같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가리킬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셨으므로 성도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을 묘사한다. ‘그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이 의를 은혜로 주셨다.
[5-8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본절의 육신과 영은 단지 사람의 육체와 영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의 죄성을 가진 몸 혹은 몸의 죄성과 성령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단순히 몸과 영의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의 영이라도 영육이 결합되어 있는 동안에는 몸의 죄성의 영향을 받아 영의 기능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연약과 부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내면적 싸움은 죄성을 가진 몸 혹은 몸의 죄성과 성령의 대립이다. 사람은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면 그 결과는 죽음이지만, 성령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죽이며 산다면 그 결과는 의와 생명과 평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 즉 몸의 죄성을 따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인간은 심히 죄악되며 무능력해졌다. 그러므로 본성 그대로의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화는 본성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된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구원받는 자 속에 오셔서 거하신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복이며 신약 성도에게 주신 특권이다. 이렇게 성령께서 그 속에 거하시는 성도는 더 이상 육신 즉 죄성을 가진 육체에 불과한 자가 아니고 성령 안에 있는 자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과 동일시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나타나 있다. 참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은 자이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도가 될 수 없다. 오순절파는 이 점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10-11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성령께서는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원문, KJV).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신성(神性)으로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계신다.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과 같고 또 어느 날 죽게 될 것이지만,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생명을 시작하시고 유지시키시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령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성도 속에 계시다면 성도의 영은 장차 그 영으로 인해 부활할 것이다. 성도의 미래의 몸의 부활은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셨듯이, 예수님 믿고 구원얻은 모든 성도들도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할 것이다. 모든 성도들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 일을 보증하신다. 성도들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12-14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구원받은 우리는 죄성을 가진 몸에 빚을 져서 몸의 욕구대로 살아야 할 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께 빚을 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신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고 새 생명을 주셨다. 이것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빚이다. 지옥 갈 죄인을 천국 가게 하신 구원의 은혜의 값을 어떻게 환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도가 죄성을 가진 몸의 욕구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 말씀은 가상적 경고이다. 이 말씀은 중생한 성도가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이 사람이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지 구원받은 자가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택한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부르신 모든 사람은 영광에 이를 것이다(롬 8:30). 그러나 성도가 계속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으로 몸의 죄악된 행위들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성화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속에 거주하신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14절의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13절의 ‘영’이라는 말이 성령을 가리킴을 보인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를 위해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의지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중생한 영을 감동하시고 지도하신다. 구원받은 성도 속에도 죄성과 연약성이 남아 있지만, 그는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
둘째로, 이런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사는 자는 참으로 중생한 성도가 아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생하고 믿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셋째로, 성화(聖化)는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다. 성화는 단순히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죄성을 죽임으로써 이루어진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5-25절, 양자(養子) 됨
[15-17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양자(養子)의 영’ 곧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영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자(親子)이시고 예수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고 우리 속에 하나님을 ‘아바(아람어) 아버지’라고 부를 마음을 일으키셨다. 우리의 영의 이런 진심의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기업을 이어받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 곧 천국을 이어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의 상속자로 묘사되었고 우리도 그와 함께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다. 영광의 천국은 바로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되었다. 마태복음 25: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그가 고난 후에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장차 영광을 받을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다.
[18-21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은 부활과 영생의 영광이며 천국의 영광이다. 고린도전서 15:42-43,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1:10-1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성도가 장차 누릴 영광은 성도가 현재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아름답고 영원할 것이다.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피조물들’은 주로 동식물의 세계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광스런 부활체를 입은 자들, 곧 영화(榮化)된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지금은 동물들도 식물들도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리며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지만, 그 날이 오면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날에는 피조물들에게도 죽음이나 질병이나 썩는 것이 없을 것이다.
[22-25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중생한 자들을 가리킨다. 모든 피조물과 중생한 성도들은 함께 탄식하며 몸의 구속(救贖) 즉 영광스런 부활을 기다리며 사모한다. 우리는 다 죄와 죽음과 불행이 영원히 사라질 그 날을 사모한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로 시작된 구원은 성화(聖化)로 진행되며 마침내 영화(榮化)로 완성될 것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다 거듭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해지고 영광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법적인 구원 곧 칭의(稱義)와 양자(養子)는 영화(榮化)의 단계에서야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즉 죄가 실제로 전혀 없는 구원이 될 것이다. 지금은 죄의 세력과의 싸움이 있지만, 그때에는 그런 싸움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 영화의 단계는 아직 미래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소망 가운데 가진다. 성도는 법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장차 그것을 완전히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광의 구원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치 않는 완전한 구원이며 그 영광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말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는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둘째로, 성도들이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셨듯이, 예수님 믿는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많은 고난을 겪지만, 장차 영광의 부활에 이를 것이며 복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목표인 몸의 구속(救贖) 즉 몸의 부활과 영광의 천국을 확신하며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26-39절, 영화(榮化)의 확실성
[26-27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는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지 알지 못하지만, 이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 이것은 성령의 중보 사역이다. 성령의 중보 사역으로 우리는 실패치 않고, 우리의 영적 생활은 쇠잔해지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효력이 있다.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이 진리가 확실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은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그것 안에는 낙심할 만한 일도 있고 실패한 일도 있고, 심지어 실수하고 범죄한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조차도 선을 이루는 데 사용된다. ‘선’은 일차적으로 성화(聖化)를 가리킨다. 성도의 일생은 영적 훈련과 성장 즉 성화의 과정이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말은 구별하여 사랑하신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주권적 행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 곧 선택된 자들만 그에게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6:37, 44, 65).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셨다. 그의 예정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목표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함으로 그것을 상실하였고 이제 구원으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은 죄 없는 거룩한 형상이다. 또 본문은 예수께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히 그의 동생들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영화롭게 하셨다’는 과거시제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확실한 미래의 사건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성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예정하신 바이며 지금 섭리하시는 바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이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義)가 선언되었고, 또 이 일을 위해 성령께서 성도 안에 오셔서 도우신다.
[31-32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일’은 구원의 일, 특히 영화를 가리킨다. 세상에서도 최고 권력자가 어떤 이를 위하면 그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우주의 최고 권력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자들을 대적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인간의 최대의 대적자는 사탄인데 심지어 그도 욥기 1장에 증거한 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사탄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 증거는 그의 독생자를 주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요 3:16; 롬 5:8).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인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 외의 것을 무엇이든지 주지 않으시겠는가?
[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하나님이시도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본문은 칭의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효력이 지금도 있음을 증거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를 송사하거나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속죄를 확증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간구하심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속죄를 계속 적용하시는 행위이다.
[35-37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성도들의 구원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크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근거한 성도의 구원은 영원한 보장을 가진다. 성도의 삶은 고난과 핍박의 삶이지만, 성도는 어떠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치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다. 성도의 구원과 승리는 완전하고 확실하다. 성도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치 않고 끝까지 보존되고 성도는 성화를 이루고 마침내 영광의 상태에 이를 것이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 성도의 넉넉한 승리를 단언한 이유가 있다. 성도는 영광의 구원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인치심에서 확증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성도에게 부어졌고 그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의 완성인 영화는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낙심치 않고 담대히 행할 수 있다.
성화는 인간의 본성적 노력만으론 불가능하지만, 성도는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므로 점점 거룩해진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성화를 이루게 하신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인 영화(榮化)는 확실하게 보장된다. 성도의 승리는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특권과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오직 성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힘쓰자.
[역대상 22장 하나님 말씀] 성전 건축의 재료를 준비함(대상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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