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불의 혀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방언을 하기 시작했고 구원의 확신을 얻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을 받고 난 후에 성도가 되어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대제사장들 앞에서도 복음을 과감하게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고 담대한 마음이 됩니다. 우리도 성령님이 임할 때 구원의 확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도장을 찍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사람이 성도입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성령을 받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 목: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설 교 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말씀: 행 1:1-8
요 절: “오직 성신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주 제: 땅끝 복음전파는 기독교인의 최대 사명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에서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 모닥불 조반을 하시면서 베드로의 실수를 용서하시고, 사랑의 대화하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산에서 지상 명제(the Great Commission)인 세계 선교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고[‘제자 삼으라는 말은 없음’]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신님의 이름으로 밥티스마를 주고 내가 너희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Go ye therefore, and teach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and, lo, I am with you alway,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Amen.(마 28:19-20)" 즉 선교의 사명을 다하는 자와 세상 끝[끝날이 아님]까지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기사를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 첫 부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0-53절에 의하면 베다니 앞 즉 감람산 꼭대기에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같은 기자인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시작에서 이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택하신 성도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왕국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행 1:3). 공생애 시작하실 때도 40일간 유대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셨고, 승천하시기 전에도 40일 동안 전도와 말씀을 전하시는 사역을 마무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계획을 가지시고 하십니다.
사도들과 함께 모여 있을 때 저들에게 부탁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즉 성신님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침례, 밥티스마]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저희들은 몇 날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겠다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회복의 때를 묻던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신님께서 너희들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고 당부하셨습니다. 주님의 유언대로 제자들은 땅끝 선교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12 사도들의 선교에 대해 추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야고보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2:2). 헤롯 왕이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라고 하는데 아마 참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죽음을 맞이한 상황들은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관련이 있지만 우리는 이런 설명들에 대해 너무 많은 무게를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죽음에 관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교회의 전통적인 이야기는,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요 21:18)의 성취로서 로마에서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내용은 다른 사도들의 죽음에 관해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전통적인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은 부상 때문에 고통받으며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로마의 박해의 물결이 있는 동안 기름이 끓는 큰 가마솥에 처해져서 순교를 맞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 후 요한은 밧모섬에 있는 광물을 캐는 감옥에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밧모에서 예언적인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나중에 사도 요한은 자유롭게 되어 지금 현재의 터키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늙어서 106세에 자연사로 죽었는데, 평화롭게 죽은 유일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순교였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공식적인 사도는 아닙니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부인하지 않자 성전의 남동 쪽 꼭대기(약 30미터의 상공)에서 던져졌습니다. 그의 원수들은 야고보가 추락 후에도 죽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곤봉으로 때려서 죽였습니다. 이 꼭대기는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데리고 갔던 시험산(여리고가 내려다 보임)으로 여겨집니다.
나다니엘이라고도 알려진 바돌로매는 아시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터기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였고 아르메니아에서 설교하다가 순교하였는데, 살이 벗겨지도록 죽을 때까지 채찍에 맞았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X)자 모양의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일곱 명의 군사들이 그를 심하게 채찍질을 한 후, 극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위해 끈으로 그의 몸을 십자가에 묶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안드레가 십자가로 이끌릴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반겼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 행복한 순간을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십자가는 거기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틀 동안 그를 고문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설교했습니다.
사도 도마는 한국과 인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여러 차례 선교 여행을 하다가 어느 날 인도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배신자 유다를 대신해서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은 주후 67년에 로마의 악한 황제인 네로에 의해서 고문당하고 참수되었습니다. 목이 세 번 튀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이외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신뢰할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들 모두가 믿음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짓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위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끔찍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었다는 엄청난 증거가 됩니다.
앞으로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어떤 전도의 열매를 맺고 살았는지, 얼마나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는지 질문당할 때 대답할 말이 있어야겠습니다.
행 1:8은 한마디로 제자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 최후의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제자를 삼고 주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성도의 신앙생활이 무엇이냐 할 때 이 제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신앙의 내용이고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제자도를 다했습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을 믿음으로 잘 교훈한 관계로 모리아산에서 산 제물로 바쳐도 이삭은 순종한 것입니다. 창세기 18:17-18은 구약의 지상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약속의 말씀이 자여 손에게 미치는 것이 바로 땅끝까지 말씀을 전수하는 것입니다. 온 족속이나 땅끝이나 수평적인 지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자녀, 손자, 증손, 고손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①온 민족들을 가르치라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며 그들에게 이 천국의 복음과 진리들을 전달하느냐 하는 문제 이전에 이 말씀 자체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와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수행할 만한 모델이 될 수 있느냐, 인격적인 자세와 품격을 갖추느냐 하는데 더 많은 초점이 있습니다.
②가르치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있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드신 인간에 대하여 어떤 가치를 인정하시고 어떤 대우를 하시는가가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고자 하는 어떤 일에 대하여 우리를 수단과 방법으로 부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제자도라는 것을 쉽게 나가서 전도하며 기독교에 대해서 증언을 하는 것으로 그 내용을 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전도를 하고 교화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너무 쉬운 답은 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로의 발전과 우리의 책임에 방해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대언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여기 능력이라는 것으로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일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대언자, 귀신을 쫓아내는 일, 권능을 행하는 자. 만일 제자도가 일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이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을 목표로만 삼고 끝낸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처음에 등장시킨 이유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못을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능만으로 전쟁에서 전투를 잘하는 사람을 보고 용병이라고 합니다. 용병은 아무리 전투를 잘해도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전투하는 것은 애국심이나 책임이 아니라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 잘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투력은 인정하지만 그를 훌륭한 군인이라고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군인은 때에 따라 그가 전투에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그가 어떻게 힘을 다 썼으며 나라를 위하여 어떻게 개인적인 것을 희생했느냐로 가늠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군인이 전투력이 없으면 안되는 것처럼 신앙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과 그것에 의하여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복음에 대한 강렬한 도전성을 놓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놓고 있으면 일단 성도가 아닙니다. 그가 훌륭한 성도라고 할 때 군인이 전투력만으로 인정받지 않듯이 그의 신앙생활이 전도라는 원색적인 전투만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여기서 비로소 요한복음 13장의 사랑과 사도행전 1:8의 그 구절이 하나로 만나는 것을 봅니다. 제자를 삼을 때 우리가 꼭 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우리를 스승으로 하는 이유를 꼭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다른 사람이 나를 스승으로 본받을 때 나를 본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본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에게 녹아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내용이 방법적. 능력적으로 일을 성취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술과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한 인격과 자세와 모습으로써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싸움은 언제나 이것이다. 억울함과 복수심과 경쟁상대로서 이웃을 만나지 말고 이웃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할 대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장 많은 요구는 이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또 이것을 다 행한 자는 율법을 다 이룬 자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종교성을 띤 원색적인 싸움인 경우가 드물고 사실은 이 자세의 싸움입니다.
성신님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전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지, 정, 의로 역사하십니다.
첫째로 성신님께서 지적인 요소를 지니셔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0)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요 14:28),
둘째로 성신님께서 정적인 요소를 지니신 분이셔셔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시며 기도해 주십니다. (롬 8:26).
셋째로 성신님께서 의지적인 요소를 가지신 분이시라 뜻을 지니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의지대로 성신님을 각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주십니다 (고전 12:7-11).
우리도 조그마한 강이야 내가 노를 저어 건널 수 있지만 태평양과 같은 이 세상 바다를 건너려면 어떻게 돼야할까요? 성신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도, 그 외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기관도 성신님께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라고 하는 분의 시 한편의 줄거리만 제가 소개해봅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살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서 허둥지둥 둥지에 돌아왔습니다.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보았습니다. 발버둥을 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이 둥지를 떠나면 꼭 죽을 것 같아 안간힘을 썼으나 폭풍이 워낙 거세어서 둥지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날개를 펴고 폭풍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그대로 날아갔습니다. 끝없이 날아갔습니다. 얼마 동안 날아갔을 때 폭풍은 멎었습니다. 조용해졌을 때에 땅을 내려다보니 넓고 푸른 초원이 있었습니다. 생전 보지 못한, 전에 살던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다운 초원이 눈앞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새는 행복했습니다.
성신님 안에서 거듭난 삶을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길로 그대로 나를 맡기십시오. 날개를 펴십시오. 해묵은 전통과 고집을 버리십시오. 성공이라고 하는 허상을 버리십시오. 나라고 하는 우상도 다 버리고 묵은 땅을 깊이 갈아버리고 새롭게 파종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 집착되어있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거듭나야 되겠다. 겐네테아노센." 중생이라고 하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원어대로 보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Born from above, 위로부터 태어납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야 되겠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묵은땅을 갈고 다시 파종하고 주의 말씀의 씨앗을 우리의 가슴에 받아들이면 분명 새로운 세계가 보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신님으로부터 오는 전인격적인 권능을 받아 세계 선교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주님의 선교 사명을 감당하며 자여손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말씀을 평생 실천하시는 감람원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혼샘 신약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16장 설교말씀]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항변(마 16:20-28) (0) | 2021.05.26 |
---|---|
[히브리서 12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소망의 완성”(히 12:1-29) (0) | 2021.05.24 |
[요한계시록 14장 강해설교말씀] "하늘의 예배와 새 노래”(계 14:1-20) (0) | 2021.05.18 |
[요한삼서 강해설교말씀] "범사 형통과 강건 축복”(요삼 1:1~14) (0) | 2021.05.16 |
[요한복음 가나 혼인잔치 강해설교] “속사람을 새롭게 하소서”(요 2:1-11, 고후 4:16-18) (0) | 2021.05.13 |
[누가복음 10장 설교말씀] 누구를 만날 것인가?(눅 10:30-37) (0) | 2021.05.06 |
[시편 37편 설교말씀] 온유(meekness)의 열매(시 37:1-11, 마 11:25-30, 갈 5:22-25) (0) | 2021.05.04 |
[시편 133편 주일설교말씀] 화평의 열매(시 133:1-3, 갈 5:22-25) (0) | 2021.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