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시편 133편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화평의 열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이 임하면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하고 그다음은 형제간에 화평을 이루면서 나가야 합니다.
제 목: 화평의 열매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말씀: 시 133:1-3, 갈 5:22-25, 야고보서 3:14-18
요 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7-18)
주 제: 화평의 열매를 맺어 하늘의 평화를 누리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자
성령의 열매 가운데 세 번째가 화평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산상수훈 팔복에서 일곱 번째 복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 5:9) 평화롭게 하는 사람(peace-maker)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시민은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meat and drink; b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Ghost.) 우리가 성령님 안에 거하며 성령님과 동행하면 의와 평화와 기쁨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란 찬송에서 보듯이 주님을 모시는 자는 하늘의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살후 3:16)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6-27)고 하십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하늘의 평화를 주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저에게 내가 진 모든 죄짐을 담당하심으로 보혈을 흘려주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4-5) 주님께서는 화평하는 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화평하는 자는 이처럼 남이 당해야 할 고난을 대신 지기도 하며 대신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희생적인 정신이 없으면 화평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남이 들어야 할 욕을 대신 듣고, 대신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평화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7-18)고 하십니다.
평화를 빼앗아 가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의 죄를 다 하나님께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 마음속에 평화의 선물을 주십니다. 죄가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 평화할 수 없습니다. 또한 평화를 빼앗아 가는 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마침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약 1:15). 그래서 우리는 어떤 욕심이든지 비워야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우리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있는 한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평화를 저해하는 것이 분규요 논쟁입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신학적 논쟁, 이단과의 논쟁, 정치적 이념이나 생각의 차이로 인한 싸움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평화의 열매를 어떻게 맺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 이런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큰 논쟁거리였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유대 법에 식사법(dietary law)이 나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코셀(kosher) 음식만 먹습니다. 비행기에서도 이 음식을 주문할 수 있고, 유대인 동네에 있는 식료품에서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 오거나 여행을 할 때 대부분 유대인들은 코셀 음식을 도시락으로 사서 먹습니다. 당시 로마교회에는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도 이 음식법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당시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기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졌다가 판매된 것을 사 먹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도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먹지 않는 사람들은 먹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헐뜯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이로 인하여 신앙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기까지 했습니다(롬 14:3).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단순한 문제로 교회가 양분되고 분쟁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1054년에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될 때 교회 안에 조각이나 성화같은 성상 문제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더니, 급기야 성령님께서는 아버지 성부로부터만 오셨다(동방)고 하는 반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셨다(서방)고 하는 신학논쟁으로 점화되어, 결국 교회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중간에서 화평케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노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논쟁과 분쟁, 분열, 대립을 넘어선 의와 평화와 기쁨인데 이를 제대로 가르쳐 주고 지도할만한 인물이 그 시대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되는데, 당회, 노회, 총회에 화평케 하는 사역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하며 성령의 화평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일입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는 “우리 비판의 근거는 훌륭하지만, 사단은 우리를 자신의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 비판을 이용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원치 않게 사단을 이롭게 하는 일이 교회 내에서 벌어지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는 논쟁을 좋아하고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trouble-maker, problem-maker)보다는 화평케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논쟁보다는 기도해야 하고, 이념과 신학적 이슈보다는 성경공부에 힘쓰며, 전도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섬기며 봉사하는 일에 더 힘써야 합니다. 지엽적인 일에 목숨 걸지 말고 복음의 본질에 목숨을 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롬 14:17)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고 ‘평강’은 사람들과의 조화로운 관계이며, ‘희락’은 평강함으로 오는 개인적인 기쁨입니다. 평강에는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될 때 그 가운데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사람들 간의 장벽이 사라지게 됩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 교리와 전통의 장벽이 사라집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 인종과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사라집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의 장벽이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 있으면, 자기를 죽이고 포기하고 성령의 지배에 순종하기 때문에 장벽이 다 무너져 버리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410장(통468장)을 찾아 부르시면서 평화의 선물을 받읍시다.
1.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후렴)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2. 주 십자가에 달리사 날 구원해 주셨으며 주 예수님 고난 받아 나 평화 누리도다
3. 나 주께 영광 돌릴 때 이 평화 충만하도다 주 하나님 은헤로써 이 평화 누리도다
4. 이 평화를 얻으려고 주 앞으로 나아갈 때 주 예수님 우리에게 이 평화 주리로다
여러분은 평화의 사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이 나라에서도 이 세상에서 평화의 사도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십시다. 성령 안에서 삶을 산다는 것은, 보혜사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심으로 인해서 평안과 안정과 균형을 이루게 되는 삶을 말합니다(요 14:16). 배에는 자이로스코프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파도가 심할 때 배가 평형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장치입니다. 그것이 배 밑바닥에 있어서 산더미 같은 거대한 파도 속에서 배가 기울어졌다가도 다시 안정되고 평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장치입니다. 마찬가지로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있으면, 우리 삶에 거대한 폭풍우가 닥쳐와도, 악한 사탄의 공격이 강하게 몰아닥쳐도, 균형과 안정을 지킬 수 있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평화를 이룹니다 (17,18-20). 미주에 있는 어느 한인교회가 아주 오랫동안 분쟁과 분열이 없이 화목한 교회로 지내왔다고 합니다. 이 교회는 아주 화목한 교회로 알려졌는데, 그 교회에서 주보에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게재해 놓던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주 안의 형제 자매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요일 3:15).
둘째, 나도 허물과 죄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마 18:23-35).
셋째, 그 사람도 주 안에서 잘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롬 10:1-3).
넷째, 이러한 나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나와 내 자손에게 복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살전 2:4). " (윤영준, 신발 한 켤레의 사랑, 요단출판사, 2001)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화평의 열매”입니다.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행하며 전도하고 진리 탐구를 하는데 너무 바빠서 죄 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분쟁할 시간이 없습니다. 남을 헐뜯고 비난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찬양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 격려합니다. 미국의 교회성장 학자이자 남침례 신학교의 Thom S. Rainer 박사는 그의 책 <교회성장학>에서,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으면, 사람들이 칭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예수님 믿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고, 교회가 부흥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분위기도 좋아하고 건강해지고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편지를 쓸 때 흔히 ‘북풍이 몰아치는 엄동설한 그간 댁내 두루 평안하오시며,’ 혹은 ‘춘풍이 부는 이 계절에 옥체 보존 잘하시며,’ 등 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이름으로 문안을 드립니다. 바울서신을 살펴보면 서신 서두에 꼭 쓰는 문안인사가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쓰고 있습니다. 민수기 6:24-26에 나오는 축도문을 요약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롬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전 1:3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후 1:2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 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후 1:2 (은혜, 긍휼, 평강), 딛 1:4, 몬 1:3 벧후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요2: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요계 1: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평화의 열매를 맺어가며 이 평화를 나눠주며 화평의 소금을 가지고 화평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물으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은 한없는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긴장이 풀리고 얼굴에 웃음이 나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는 죽음 속에 생명을, 가난 속에 풍요로움을, 약함 속에 강함을, 고난 속에 내적 평안을, 혼돈 속에 질서를 창출합니다.
우리의 무궁화가 그러합니다. 하얀 분홍색의 노르스름한 꽃술, 파란 이파리 등이 수수하고 은은한 멋을 자아냅니다. 무궁화는 지는 듯하면서도 피어나고, 피어나는 듯 지다가 또 피어나고, 넘어지는 듯하나 일어나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고, 죽는 것 같으나 다시 사는 율동적(律動的)인 멋이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 89장에 실려있는 ‘샤론의 꽃 예수’ 찬송을 일제시대에 길선주 목사가 ‘무궁화 꽃 예수’로 번역했답니다. 당시 일제가 이를 허용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영어식 대로 샤론의 꽃으로 하고 말았습니다.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이 찬송을 본래 번역대로 ‘무궁화 꽃 예수’로 부르면서 새벽예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民族)이 무궁화처럼 여러 번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많은 외침(外侵)을 당하고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무궁화처럼 끈질긴 민족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면서 한 멋진 삶을 창출한 민족입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처음에는 우습게 보고 무단정치(武斷政治)를 하다가 3.1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 후 문민정치(文民政治)로 바꾸었습니다. 일본에게 다 죽은 듯했지만 다시 살아 피어난 민족입니다. 4,300년 동안 우리나라의 모습이 항상 이러했습니다. 애국가에서도 우리나라 땅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으로 표현함을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토의 대명사가 “무궁화동산” (The beautiful land of Korea)입니다. 태극기에도 무궁선이 한가운데 있습니다. 선(線)을 자세히 살펴보면, 물결치듯, 바람 불 듯, 물이 흐르듯, 살아 움직이는 맵시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자연의 멋 그대로 있니다. 우리의 무궁선은 생명선이요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주는 호흡의 모양입니다. 삼태극(三太極) 무늬가 북, 부채, 장고, 대문 등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문양(文樣)입니다. 자연의 선이 무궁선(S선, 나선)이다. 강이 흐르는 모습, 산의 곡선, 자연적으로 난 산길의 모양, 바람의 기류 방향, 구름의 형태 등을 보라. 우리나라 고전무용은 손끝의 무궁선, 치마의 날리는 선에서 아름다움과 함께함(공동체 의식)을 만들어 낸다. 물결의 모습, 달이 차고 일그러지는 모양, 초가집, 기와와 처마 끝의 문양, 마고자 등 무궁선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율동의 모습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이튿날 사하라 사막의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출 13:20-21) 새벽이 다하고 해가 동트기 직전에는 불기둥이 구름기둥으로 바뀌면서 불 구름기둥이 됩니다. (출 14:24) 광야생활 40년간 이 기둥이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구름은 물입니다. 불과 물의 율동이 이스라엘 광야생활을 지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임재하심을 체험하면서 성령님 안에서 화평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6.25 한국전쟁 발발일을 맞아 더욱 한반도에 화평케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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