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창세기 설교말씀]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야곱(창 32:1-12)

기혼샘 2021. 5. 30.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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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설교말씀 중에서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야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자신의 형인 에서가 두렵습니다. 20년 전에 자신이 축복을 빼앗다는 것 때문에 분노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말하기를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여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으로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에서를 만나기 위해서 선물을 보내게 됩니다.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야곱(창 32:1-12)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야곱이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야곱을 만나주셨다. 여태껏 인격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소개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알아보았습니다. 웬일인가?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와 동행하던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삭의 축복과의 관계... 이삭의 기도는 곧 하나님의 보장이 되었습니다. 신용 있는 사업가가 사인한 수표는 곧 지불보증이 되듯이.. 그 수표의 지불보증은 받는 자의 인격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발행하는 자의 신용에 관계됩니다. 받는 자의 인격 유무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자 하시면 인격적으로 윤리적으로 형편없는 죄인이라도 눈을 뜨서 신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던 발람 선지자의 눈을 뜨게 하시니 그가 하나님의 천사가 불칼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보는 신령한 은혜를 입은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삭의 축복의 기도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유가 있다면 누구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빼앗아서라도 가져야겠다는 열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빼앗아서라도 가지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자는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그는 천국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속한 것의 귀함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이것들을 베푸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의와 경건에 자기도취적인 만족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복음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의와 자신의 삶에 자만하고 있는 자들은 하늘의 것을 소홀이 여깁니다. 복음을 자기에게 주어지는 썩어질 것들만 못하게 여기는 자들에게는 그가 사람들에게 아무리 의롭다고 인정받고 윤리적이며 인격적이라고 인정받을지라도 주시지 않습니.

비윤리적이며 인간쓰레기들이라고 천대받던 세리와 창기들이 윤리적이고 경건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라. 여러분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기회를 받는 것을 여러분 삶의 최우선 순위로 하라.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세상의 것은 빼앗기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의 것은 빼앗기지 말라. 은혜받을 기회를 소홀히 하고 예배와 기도의 시간,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교회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먼저 고려하는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신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들은 위의 것을 사모하라. 그것을 빼앗아서라도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라. 빼앗아서 라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천국 문을 여시고 각가지 신령한 것들을 다 주십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열심히 있는 자는 더하여 가지고 하늘의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는 그 있는 믿음까지도 까먹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야곱이..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보내며..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야곱은 그의 형 에서가 사는 땅이 가까워 올수록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에 돌아간다는 기쁨보다는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고장으로 피신시킬 때에 "네 형 에서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라고 약속한 것이 창 27:45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전갈을 받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 형 에서의 감정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야곱으로서는 부정적으로 예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용의주도한 야곱은 그의 종들을 정찰대로 보내어 형 에서의 감정을 미리 살펴보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형 에서를 높여 "내 주"라고 표현하게 합니. 이것은 단지 형 에서를 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종으로 비하시킨 표현입니. 고대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라고 호칭하는 것은 요즈음 흔히들 상대방을 높여 부를 때 쓰는 각하나 사장님 또는 선생님과는 류가 다릅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상대방을 높이고 기분 좋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라고 호칭하는 것은 '나는 당신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에 대한 주권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노예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생존을 위해서 자존심을 포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에게 있어서 자존심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보입니다.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존심을 아낌없이 내동댕이 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서 14년간을 머슴살이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두 여인 사이를 배구공인 듯 오가면서도 그는 그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

자존심을 잣대로 놓고 보면 야곱은 속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의 원하는 바를 위해서 그의 생존을 위해서는 자존심을 초월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생존 방식입니다.

우리는 자존심이 강하다든가, 혹은 자존심도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존심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한 개인의 것이고, 남이 인정하지 않아도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나 혼자 지켜야 할 하나의 신념이 됩니다. 누구나 다 자존심이 있다. 부자에게도 있지만 거지에게도 있습니다. 지식인에게도 있고 무식한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헬라의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어느 날 귀족이요, 부자 철학자인 플라톤의 궁전 같은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집의 응접실에 깐 호화스러운 양탄자 위를 걸어가면서 디오게네스는 마치 생물을 밟아 죽이는 제스처로 짓이기며 플라톤의 교만을 짓밟았습니다.

다음에는 플라톤이 디오게네스의 가난을 과시하며 사는, 비가 새는 집을 방문했을 때 누더기 양탄자 위를 뱀의 머리를 밟아 죽이는 모션으로 그 방을 거닐면서 디오게네스의 청빈 과잉 의식의 교만을 짓밟아 주었습니다.

부자의 교만과 가난한 자의 교만을 함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자기의 자존심을 높이면서 상대를 짓밟으려 하는 인간의 못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

모두 다 자존심을 가지고 있지만 지나친 자존심은 마음을 허약하게 만들며, 칫하면 상처를 받으므로 마음의 병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자존심은 그 자체가 병들어 있습니다. 병든 자존심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열등감의 그림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존심이 지나친 사람은 뒤집어 놓고 보면 그 마음 깊이에 인생의 병든 상처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내세워 자기 스스로를 우월하게 평가하는 것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일이지만 병든 자존심은 자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허상을 좇아 살아가게 만듭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게 만드는 것입니. 그러므로 병든 자존심으로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생존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병자가 전쟁터에 나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죄악에 빠진 인간이 병든 자존심으로 자신을 살리려 하는 것은 영육 간에 자기 생존의 기반을 스스로 허물어 뜨리는 길이며 멸망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화를 내고, 자존심 때문에 다투고, 자존심 때문에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소원은 있으나 사랑하지 못하고, 자존심 때문에 자기에게 알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되는 일을 자행하고,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인생은 마침내는 자존심 때문에 천국을 포기하고 지옥에 까지 내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죽으면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을 받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신세가 되고 섬기는 자는 섬김을 받게 될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자존심을 아예 없애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병든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존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나의 자존심을 좇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존심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라서 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사는 하나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에 힘입어 살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죄악으로 얼룩진 자존심 때문에 영광된 삶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병든 자존심을 포기하기 못하는 교인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힘입어 살 수 없습니다. 그는 생존 경쟁의 사회에서 여전히 자존심이 상하는 고통을 겪을 것이며 염려 근심 걱정 초조 안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 그가 있는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모든 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자존심을 억제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억눌린 자존심은 마음과 몸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존심을 억제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자존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칼로 자기를 죽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따르며 그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힘입어 만민이 흠모하는 사랑의 사람, 격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 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형 에서에게 보내는 짐승의 수는 모두 550마리였습니다. 요즈음 값으로 따진다면 근 3억에 가까운 돈입니다. 요즈음 걸핏하면 억억 하는 우리나라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3억이라도 대수롭지 않은 돈이겠지만 우리 돈 20만 원만 가져도 신학생 1년 치의 학비로 쓸 수 있다고 하는 중국에서라면 평생을 쓰고도 남을 돈입니다.

당시로서도 짐승 550마리라면 재산이 전혀 없는 한 가족을 하루아침에 부자로 만들어 주는 양의 재산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잘 키우기만 그 짐승들이 새끼에 새끼를 쳐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면 거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이런 막대한 재산을 뚝 떼어 형에게 뇌물로 보내는 것을 보면 야곱이 몹시 다급하게 느꼈던 모양입니다. 정찰대의 보고에 의하면 형 에서가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고 하는데 형제를 환영하러 나오는 환영객 치고는 너무나 규모가 큰 것입니다. 자기를 일국의 국왕으로 예우하여 환영할 처지가 아닌데 이는 필시 묵은 감정을 품고 오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형의 마음을 누그려 뜨릴 양으로 이런 엄청난 재물을 사전에 뇌물로 보낸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소유한 재물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서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롯의 아내입니다. 두고 온 재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서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전설 같습니다만 결코 전설이 아닙니다. 소금기둥이 아니라 강도에게 전세금 이백만 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잃어버린 예도 있습니다.

아간은 여리고 성에서 본 금덩이와 외투 한 벌 때문에 그의 온 집안이 몰살하는 비운을 겪었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살찐 소와 양들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버리심을 받았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이 가져온 재물이 탐이나 거짓말을 했다가 문둥병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영생의 길을 물으러 예수께 나온 부자 청년은 네 재물을 팔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하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받을 수 없어서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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