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원문 성경강해

[헬라어 성경 로마서 강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바울(롬 1:8-17)

기혼샘 2021. 11. 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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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 신앙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복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는 복음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 때문에 고통이 있어도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복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바울(롬 1:8-17)

 

8절 프로톤 멘 유카리스토 토 데오 무 디아 이에수 크리스투 휘페르 판톤 휘몬 호티 헤 피스티스 휘몬 카탕겔레타이 엔 홀로 토 코스모

성 경: [롬1:8]

󰃨 첫째는. - 헬라 원어로 프로톤 멘이다. 이 어투는, 논리적으로 둘째는이란 말이 아래 있을 것이라고 예상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 이 말에 대하여 해석이 세 가지가 있다. 바울이 감사에 넘침으로 인하여 둘째로란 말을 잊었다고 함(B. Weis).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이 논리적 어투는 차리지 않았으나 문맥은 그대로 나타내었다고 함(Yodet). , 첫째는 감사요, 둘째는 다음절부터 나온 기도라고 하였다. 첫째로란 말은 그저 무엇보다도 먼저는이란 의미니, 그 아래 둘째는이란 말이 나오리라고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함(Theodore Zahn). 바울은, 그의 저서 살전 5:18에 말하기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한 것 같이, 언제나 어쨌든지 먼저 감사의 조건을 찾았다. 감사 제일주의가 있어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의 감사 제일주의는 그의 서신마다 나타났다(고전 1:4 ; 고후 1:3 ; 1:3 ; 1:3 ; 1:3 ; 살전 1:2 ; 살후 1:3 ; 딤후 1:3 ; 4).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감사함. -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은, 그 무슨 일이든지 그리스도의 중보역(仲保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감사하는 일도 그리스도를 힘입어서만 가능하거든, 하물며 다른 일들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랴. 그리스도를 힘입은 길은 그리스도 신앙이다. 이것이 있는 때엔 죄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지만 이것이 없는 때엔 소위 의인(義人)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바이스(B. Weiss), 이 문구가 다만 그들이 믿어 그리스도인 된 사실에만 국한된 것이고, 그들의 무슨 특별한 선행을 가리킨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와 반면에 고데(F. Godet), 이것이 그들의 모범적 덕행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너희 믿음이란 말이 그들의 믿음 생활(믿음과 덕)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감사 제목으로서 그들의 신앙생활 전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그때 로마는 큰 도시였고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만큼, 교회의 일이 각처에 퍼졌을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로마에 있는 교회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당시 신자들에게 그 소문이 들린 일을 매우 귀중히 여겨서 그렇게 평가한 표현이다. , 여기저기서 참 신자들이 그들을 알아주어도, 그것은 온 세상이 알아주는 것과 같은 큰 영예(榮譽)라는 것이다(Calvin).

9절 마르튀스 가르 무 에스틴 호 데오스 호 라트류오 엔 토 프뉴마티 무 엔 토 유앙겔리오 투 휘우 아우투 호스 아디알레이프토스 므네이안 휘몬 포이우마이

성 경: [롬1:9]

󰃨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었다. 이를 보면, 그가 복음 전파를 자기의 출세나 생계나 취미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소명감(召命感)에 끌려 행하여지는 것이었다. 그의 모든 전도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하는 의식이 그 지배 의식이었다. 여기 심령이란 말은 렐라 원어로 프뉴마이니, 곧 영을 의미한다. 그러면 내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함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인격의 중심으로 하나님께 봉사함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력과 체력(體力)의 전부를 다하여 봉사함을 가리킨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 봉사는, 마음을 드리지 않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다하여 하는 것이다. , 진실하게 온 인격을 기울여하는 봉사이다라고 하였다.

10절 판토테 에피 톤 프로슈콘 무 데오메노스 에이포스 에데 포테 유오도데소마이 엔 토 델레마티 투 데우 엘데인 프로스 휘마스

성 경: [롬1:10]

󰃨 하나님의 뜻 안에서. - 이 말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여기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종교 윤리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되 남이 세운 교회에 간섭하는 잘못이 되지 않는 한, 거기 가기를 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 윤리적인 하나님 뜻을 가리키는 헬라 원어는, 여기 본문처럼 엔 토 델레마티 투 데우가 아니고 카타 토 델레마 투 데우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하나미의 뜻이란 것은 섭리적 의지(攝理的意志)를 말함이다. 그가 로마에 가려고 해도 교통 사정으로 길이 막혀서 갈 수 없이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그 사정이 섭리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

󰃨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 여기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유오도데소마이”인데 보통으로 성황(盛況), 혹은 이득(利得)을 의미한다(고전 2:16). 바울의 이 기도는 성취되어, 후에 그가 로마에 가게 되었다.(27:1-28:29). 그러나 그로 하여금 거기 가게 한 길은, 얼른 보면 좋은 길이 아니고 이상하게도 소송건에 끌려가게 됨이었다. 그 길은 대단히 위태하여 그가 여러 번 파선 당해 죽을 뻔한 것이다(26:32-27:44). 곧 그의 로마행은 육신적으로 괴로운 길이었다. 이것이, 이익을 얻는 길에 대한 바울의 기도 응답이었다. 경건한 신자에게 있어서 이익을 얻는 길은 반드시 평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육신상으로 불행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다가 혹시 고생길에 설 때에도 낙심치 말고 도리어 그것이 유익 있는 오묘한 길인 줄 믿고 기뻐할 것이다.

11절 에피포도 가르 이데인 휘마스 히나 티 메타도 카리스마 휘민 프뉴마티콘 에이스 토 스테리크데나이 휘마스

성 경: [롬1:11]

󰃨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주어. - 여기 무슨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 그것은 아직 받지 않은(그러나 장차 받을) 어떤 신령한 은혜를 염두에 둔 말이다. 바울은 로마에 가는 도상에 오를 때에 반드시 로마의 신자들에게 풍성한 영적 축복이 임할 것을 확신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라고, 그는 말하였다(15:29). 주의 종이 주님의 시키시는 일에만 순종하며, 언제나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력(靈力)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신령한 은사란 것은,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것인데 그것이 물질적 혹은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나눠주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메타도, 은혜를 나눠 주는 자 자신도 남들과 함께 그 은혜에 참여함을 가리킨다(Theodore Zahn). 만일 주님의 종을 통하여 교회 중에 하나님의 교훈이 임한다면, 주님의 종 자신도 그 교훈의 심판 아래 서야 된다.

󰃨 너희를 견고케 함. - 이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너희로 견고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바울이 자기 힘으로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할 수 있다 함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굳게 될 것이라고 한다. 신앙을 장성케 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니(고전 3:5-7), 여기서도 바울은 자기의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하실 일을 구분한다.

12절 투토 데 에스틴 쉼파라클레데나이 엔 휘민 디아 테스 엔 알렐로이스 피스테오스 휘몬 테 카이 에무

성 경: [롬1:12]

󰃨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 - 이것은 신앙상 위안을 말함이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 부딪쳐 끊임없이 피곤해진다. 그러므로 이런 안위는, 우리에게 매일 음식과 같이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안위는, 염세주의(厭世主義)에서 찾아 만나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안에서 성도들의 교통에서 얻을 수 있다. 내 신앙이 피곤해졌을 때에 남의 열심 있는 신앙을 보아서 용기를 얻게 되며, 또 본래 튼튼한 신앙도 다른 사람의 모본을 보고 더욱 힘을 얻는다.

13절 우 델로 데 휘마스 아그노에인 아델포이 호티 폴라키스 프로에데멘 엘데인 프로스 휘마스 카이 에콜뤼덴 아크리 투 듀로 히나 카르폰 티나 스코 카이 엔 휘민 카도스 카이 엔 토이스 로이포이스 에드네신

성 경: [롬1:13]

󰃨 열매를 맺게 하려 함. - 15:16 참조,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세상에 두시는 목적은, 그들이 영적(靈的)으로 결실하게 되기 위함이다. 그들의 처음이 좋지 못했어도 나중에는 좋을 수도 있다. 신약의 사울은, 처음에 비록 패역했으나 한 번 회개한 후에는 주님을 충성되이 섬겼다. 마가도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가다가 낙심하고 돌아섰으므로 바울에게 불신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도 후에 회개하고 귀한 종이 되었으므로, 바울이 그를 자기에게 유익한 종으로 여겨 모든 교회에 추천하였다(4:10). 이와 반대로, 어떤 신자들의 처음이 좋았다 할지라도 그 나중이 좋지 못한 것은, 그들의 실패를 의미한다(18:21-24). 구약의 사울은, 처음엔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에 패역한 길로 갔으므로 그 말년에는 저주를 받았다. “열매는 주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신자 자신의 성결의 열매요, 둘째는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전도의 열매이다. 15:1-6 ; 눅 13:6-9 ; 11:11-14, 20-21 참조.

󰃨 길이 막혔도다. -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신자들의 길을 언제나 열어 주시지 않고 때로는 막으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 하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그의 오묘한 섭리이다.

14절 헬레신 테 카이 바르바로이스 소포이스 테 카이 아노에토이스 오페일레테스 에이미

성 경: [롬1:14]

󰃨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 복음은 야만인에게도 가야 하며, 문명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한다. 문명(文明)이란 무엇인가? 지혜와 지식은 무엇인가? 혹은 과학이란 것이, 만물의 성질은 알 수 있으나 그것의 근원을 알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과학 연구로써 만물의 용법은 알 수 있으나, 그 만물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 바를 알 수는 없다(고전 1:20). 이 세상의 지식층은 무식(어리석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진리 앞에서는 소경이니, 진리 곧 복음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지식 있는 사람들 앞에 역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 빚진 자의 명심할 것이 두 가지니, 이 빚을 갚지 않으면 화를 당하는 것(고전 9:16), 복음 전한다는 자세를 하지 말 것이다(고전 9:18-23).

15절 후토스 토 카트 에메 프로뒤몬 카이 휘민 토이스 엔 로메 유양겔리사스다이

성 경: [롬1:15]

󰃨 할 수 있는 대로.... 원하노라. - 이 구절은 헬라 원어로 토 캇 에메 프로뒤몬”이니, 그것을 개역하면, “내게 달린 것은 뜨거운 소원이니이다. , 자기로서는 뜨겁게 원하나,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려한 후에야 그 소원대로 행동하리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어떤 선한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 행하지 않고 조급하게 행함은, 도리어 무익할 수 있다.

󰃨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이것은 이미 믿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는 말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벌써 믿는 자들에게 복음의 지식을 가르쳐 줌도 일종의 전도이다.

16절 우 가르 에파이스퀴노마이 토 유양겔리온 투 크리스투 뒤나미스 가르 데우 에스틴 에이스 소테리안 판티 토 피스튜온티 이우다이오 테 프로톤 카이 헬레니

성 경: [롬1:16]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 “부끄러움이란 것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곧 사람이 자기의 소유가 무가치하여 부끄러워함과 자기의 성질이 겁약하여 부끄러워함이다(딤후 1:8, 12-18 ; 2:11 ; 고후 10:8 ; 1:20 ; 눅 16:3 ; 요일 2:28).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소유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무쌍한 영관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귀중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복음 운동과 및 자기를 위하여 염려할(염려는 겁에 이르고 겁은 부끄러움에 이름)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가 본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울이었으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붙들렸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의 안에 사시는 이가 그리스도였다. 그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 되는 줄로 느껴졌다(1:21).

󰃨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 순서는 민족 차별(民族差別)의 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를 가리킬 뿐이다(3:1-2.9 ; 1-13, 11:1-6, 15:9 ; 15:24 ; 4:22 ; 1:8 , 13:46 참조). 구원의 복음이 왜 이스라엘 사람을 먼저 찾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복음이 이스라엘을 먼저 찾은 것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하는 동시에 꼭 같이 이방인들도 위한 것이다. , 그것이 이스라엘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는 행동인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을 전하는 제사장(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제사장이 됨)으로 세우는 행사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사역을 통하여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다(12:3 ; 19:5-6).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게 하시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게 할 수 있는 전능자시오 또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19:30).

17절 디카이오쉬네 가르 데우 엔 아우토 아포칼뤼프테타이 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 카도스 게르랍타이 호 데 디카이오스 에크 피스테오스 제세타이

성 경: [롬1:17]

󰃨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이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로 제공되셨음을 말함이다(고전 1:30). 사람이 하나님 하나님 앞에 의를 얻는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의견을 대표적으로 든다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펠라기안 학파의 의견, 이 학파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은 유대인의 의식적 율법을 순종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덕적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로마교의 의견, 여기서는 율법적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견은 성경적이 아니라. 푸로테스탄트 교회의 의견. 여기서는 성경이 말하는 데로 바로 주장하였다. , 우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행하여진 무엇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여진 다른 이(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 의는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여 주는 것뿐이다. 이 의는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 의로 말미암아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 의는 완전한 것이다.

나타나서란 뜻은 무엇인가? 이 말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때가 이르었다는 뜻(4:4).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신자들에게는 바로 종말을 현재화(現在化)시켰다는 의미도 된다. 이 의를 받는 자는, 세상 끝날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벌써 심판을 받았다. 인자(人子)가 땅 위에서 사죄(赦罪)하는 권세가 있다고 한 대로(9:6), 신자들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칭의(稱義)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 사죄와 칭의를 못 받은 자는 내세(세상 끝날 심판 때)에도 그것을 받지 못한다(3:18).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은 그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감취었던 것이라는 뜻을 내포함(엡 3:11), 이 감취었던 것이 나타난 것을 보는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감사히 그것을 받아야 된다. 3:5 참조. 나타나서란 말이 현재사로 되었으니, 그것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 그 현재에 하나님의 의와 접촉되고 또 받아지는 상칙(常則)을 말함이다. 이와 달리 3:21에는 나타났으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적 실현(歷史的實現)의 완료를 보여 준다.

󰃨 믿음으로 믿음에. - 칼빈은 말하기를 이것은 불완전한 믿음으로부터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 신앙적 장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해석은 옳지 않다. 하찌(Hodge), 이것이 역설체(力說體)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받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마태복음 예수님 말씀] 회개한 아들과 회개하지 않은 아들 비유 (마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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