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원문 성경강해

[헬라어 성경 말씀 마태복음 강해] 살인에 대한 예수님의 새 법(마 5:21-26)

기혼샘 2022. 2. 1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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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이 살인에 대한 새로운 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약의 십계명 말씀을 더 강화하여 말씀하고 계시는데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살인에 대한 법을 강화하셨습니다.

 

살인에 대한 예수님의 새 법(마 5:21-26)

 

21절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토이스 아르카이오이스 우 포뉴세이스 호스 드 안 포뉴세 에노코스 에스타이 테 크리세이

성 경: [마5:2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9:6; 21:12; 24:17;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9:6). 그리고 '심판', '크리시스'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16:18; 대하 19:5;Jos, Antig. IV, 214;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 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 너희가 들었으나 -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19:5;21:16,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간접 전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12:34).

22절 에고 데 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오르기조메노스 토 아델포 아우투 에이케 에노코스 에스타이 테 크리세이 호스 드 안 에이페 토 아델포 아우투 하카 에노코스 에스타이 토 쉬네드리오 호스 드 안 에이페 모레 에노코스 에스타이 에이스 텐 게엔난 투 퓌로스

성 경: [마5:2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은 심판(크리시스;21)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 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 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Carson).

󰃨 지옥불(게엔나 투 퓌로스). -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33:6; 7:31; 16:20;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 것이었다(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꽉 찬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골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하게 되었다. 지옥과 음부(11:23;16:18)는 각각 영원한 지옥과 심판 이전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가능한 구절은 거의 없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가 같고 '지옥'을 뜻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 라가(라카) -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 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 미련한 놈(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는 '모레''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 역 77:8>;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23절 에안 운 프로스페레스 토 도론 수 에피 토 뒤시아스테리온 카케이 므네스데스 호티 호 아델포스 수 에케이 티 카타 수

성 경: [마5:2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생각나거든 -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유한 것(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 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11:25)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체 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 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 없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때는 죄책이 비난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은 인간 상호 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力)해야 할 것이다.

24절 아페스 에케이 토 도론 수 엠프로스덴 투 뒤시아스테리우 카이 휘파게 프로톤 디알라게디 토 아델포 수 카이 토테 엘돈 프로스페레 토 도론 수

성 경: [마5:2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예물을 드리라 -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는 제 2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 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타'가 아닌 '디아'('',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9:13;12:7;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 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25절 이스디 유노온 토 안티디코 수 타퀴 헤오스 호투 에이 엔 테 호도 메트 아우투 메포테 세 파라도 호 안티디코스 토 크리테 카이 호 크리테스 세 파라도 토 휘페레테 카이 에이스 퓔라켄 블레데세

성 경: [마5:2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너를 송사하는 자...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 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은 마지막 기회'의 장()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 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 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 재판관이 관예에게 - 여기서 '관예'(휘페레테스)란 배의 노를 젓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중된다. 한편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불붙는 게엔나'를 묘사한다(22). 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Lange).

26절 아멘 레고 소이 우 메 엑셀데스 에케이덴 헤오스 안 아포도스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성 경: [마5:2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22:13;24:51;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각했다(Schweizer).

󰃨 호리라도(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의 '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신약 히브리어 성경말씀 마태복음]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마 5:31-32)

 

[신약 히브리어 성경말씀 마태복음]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마 5:31-32)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혼에 관하여 새로운 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했습니다. 음행 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간음하게 하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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