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열왕기상 17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기적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때문에 북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신을 숭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가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비와 이슬이 3년 동안 내리지 않습니다. 영적 육적으로 가뭄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한 과부를 준비하시고 엘리야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사르밧에 있는 과부는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한 끼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 엘리야를 만나서 가뭄에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니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영적 가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먹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여호와의 기갈이 있는 시대입니다. 육적으로는 풍성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곤핍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먹을 때 우리의 영혼이 곤핍해지지 않습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기적 사건(왕상 17:8-16)
왕상 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왕상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왕상 17: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왕상 17: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 17: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왕상 17: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왕상 17: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왕상 17: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왕상 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의 가감도 없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큰 위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말에 실수가 없고 그 말이 헛되이 돌아오는 법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에 대해 그 구체적인 예를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두 사람을 통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 시돈에 속한 사르밧 땅으로 가라 =
엘리야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9절)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에게 전하면서 그 사르밧 시돈에 속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본문이 그 점을 밝히고 있습니까? 시돈이 어떤 땅이었습니까? 시돈 땅은 이세벨의 친정아버지 엣 바알이 다스리고 있는 땅입니다. 이 사르밧은 시돈의 교외에 해당하는 땅입니다. 시돈이 있는 페니키아 전체를 이세벨의 친정아버지 엣 바알이 강력하게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엘리야를 보고 그런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약 5:17). 우리가 엘리야를 생각할 때 엘리야는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이 굉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갈등이나 의심 없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그대로 순종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성경 인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괴로워할 만한 대목에서는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괴로워할 만한 대목에서는 엘리야도 괴로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주저할만한 상황에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사르밧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 명령이 엘리야에게 대단히 어려운 명령이었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릿 시내는 숨어 있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릿 시내가 말라버리자 사르밧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그 복잡하고 어려운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릿 시내에 물을 공급을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말라버린 시냇물이지만 까마귀가 계속 음식을 가져다주면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다음 명령을 좀 평안하게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사르밧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로서는 순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 가는 길은 100km가 넘는 먼 길입니다. 2900년 전이라 길이 제대로 없던 때였습니다. 길이 있어도 북 이스라엘과 시돈까지 쉽게 왕래할 수 있는 큰 도로는 이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아합의 군사들이 깔려 있었으므로 쉽게 그 길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산길을 돌아서 가든지 아합의 비밀 정보원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택하여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100km의 여행이지만 보통 어려운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릿에서 사르밧까지 가는 길에는 사막도 끼어 있습니다.
그런 길을 걸어서 가야 하고, 정보원들의 눈을 피해서 가야 했습니다. 그곳에 가더라도 편안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엘리야가 가는 곳은 이세벨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런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사르밧에서 만난 과부 =
말씀에 순종하여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마음에 부담과 어려움을 안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르밧으로 갔던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그 사르밧 성문에 도착했을 때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 가지를 줍는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과부가 거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때 당시에 과부라는 말은 거지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여권이 신장되어 많이 달라졌습니다. 2900년 전의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편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거지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과부는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과부와 고아라는 말을 거지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쓰고 있습니다. 이 과부는 남루한 옷을 입은 여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를 받아 갔던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서 만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서 사르밧으로 가라고 했으면 거기는 최소한 몸을 의탁하고 거처를 정할 만한 그런 곳이어야 하는데..." 엘리야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서 만난 과부는 당장 땔감 몇 개를 주어다가 한 움큼 있는 밀가루를 끓여 그것을 반죽하여 먹어야 하는 상황임을 보았습니다. 이 음식이 다하면 죽으려고 작정을 한,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여인에게 가서 몸을 의탁하라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이 명령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엘리야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장면을 바꾸어서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2,000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청년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2,000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저 평화를 외치다가 로마의 무참한 말발굽에 밟혀서 죽은 무저항, 비폭력주의를 외치던 청년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죽음은 곧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청년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함으로 그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죽음보다 더한 인생의 짐이라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 과부를 보고 있는 엘리야나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에게 몸을 의탁하여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엘리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아갔던 사도 바울이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야가 보았던 보잘것없던 과부처럼, 우리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그 외모나 인물이 잘난 것도 아니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칠 수 있음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죽음의 권세를 극복할 수 있는 그 축복과 능력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하나님, 사르밧으로 가라고요? 사르밧 말고도 숨을 데가 많습니다. 왜 하필이면 엣 바알이 다스리고 있는 이세벨의 친정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따라가란 말입니까? 이런 하나님과 일을 같이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지"라고 생각하고 자기 길을 갔으면 그는 시돈 왕이 다스리고 있는 땅에서도 자신의 종을 몇 년씩 먹이시는 그런 하나님의 권능과 보호하심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매듀헨리는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는가'하는 질문에 "그것은 교만한 이세벨의 아버지가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고 있는 땅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을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라도 보호하고 먹이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 특히 이세벨에게 가르치고 싶어 시돈 땅에 보내셨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 사르밧 여인의 순종 =
또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엘리야뿐 아니라 또 한 사람 사르밧 여인의 순종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 그리고 거기에 있는 과부를 만나서 그에게 몸을 의탁하라. 그가 너를 공궤 할 것이다"(8,9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왜 하필이면 사르밧입니까? 지금 이 무렵이면 남북 이스라엘에 250만 하나님의 선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북왕국 이스라엘은 바알 숭배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남쪽 유다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백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이라 해도 바알 앞에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 그대로 있다고 나중에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일러주셨습니다(왕상 19:1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 먼길을 여행해서 그 어려운 땅에 와서 한 과부를 만나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이 여인에 대한 소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엘리야가 이 여인을 보았을 때 얼굴과 외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남편이 누구였는지 전혀 없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과거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갖고 소개하는 것은 이 여인이 보잘것없는, 모든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여인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보잘것없는 여인이어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른 순종의 태도를 보일 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이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점을 이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런 것 저런 것 좀 얻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비밀을 알고 그 말씀 앞에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자 할 때, 그런 사람이야 말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총각을 볼 때 딸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 나야 하고, 그런 처녀를 볼 때 학벌이 시원치 않고 인물이 좀 못나도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집 장가를 갈 때 여자가 얼마나 예쁜가, 남자가 얼마나 멋있는가를 생각합니다.
헤밍웨이는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도 일주일만 보면 따분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은사 한분은 "데이트를 할 때 여자가 영어 단어를 하나 좀 더 아느냐 모르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얼굴이 좀 예쁘냐 콧대가 좀 섯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음식을 준비할 줄 아느냐, 얼마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가정을 꾸려 갈 줄 아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늘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고 이야기할 때 바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늘 살피며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만"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하실 때 그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과 불신의 문턱을 드나들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정말 그런가'하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런 고민이 전혀 없이 믿음으로 들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믿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관문을 다 통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진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만'하는 단서를 포기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경험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 생명을 내어놓는 순종 =
오늘 이 본문의 여인을 보십시오.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말합니다.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만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10절). 물이 그냥 돌아서서 그냥 뜰 수 있는 것이었다면 물한 그릇 주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중동 지역은 그런 지역이 아닙니다. 물 한잔 주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그냥 '물 한잔 주십시오'해서 주는 것과 다릅니다. 찬물을 그냥 마실 수 있는 나라가 이 지구 상에 그리 흔치 않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맥주 많이 만들어 마시고 프랑스 사람이 포도주 많이 만들어 마시는 이유가 물이 나빠서 그런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지금 이 중동지역은 가뭄이 들어서 그릿 시냇가도 물이 말랐던 그런 시기입니다. 그러니 물 한잔 달라는 나그네의 청이 상당한 수고를 해야 하는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어떤 여자입니까? 인생의 귀찮고 만사가 귀찮은 여자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즐겁게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에게 물 주기 전에 '내가 죽겠소'라는 생각을 품을 만큼 이 여인의 상태는 비참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 한 끼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조금 남겨 놓고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 전에는 배불리 먹었을 것 같습니까? 먹을 게 없으니 아끼고 아꼈을 것입니다.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으니 그 한 끼를 안 먹으려고 몇 날 며칠을 허리띠를 졸라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나뭇가지를 주으러 나온 것입니다.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을 피우고 밀가루 반죽을 마지막으로 구워 먹고 나면 이젠 끝인 것입니다. 그런 고달픈 여자를 향하여 물을 좀 달라고 엘리야가 청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르밧의 과부처럼 인생의 짐이 다 한 짐씩 되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움이 좀 있으면 나 하나만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피곤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나그네가 '물을 좀 주십시오'하는데 '아이고 귀찮소, 나 하나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내가 당신한테 물을 준단 말이요'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물을 가지러 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 이 여인의 태도를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물을 좀 갖다 달라는 말을 듣고 순종하여 물을 가지러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11절에 이런 말씀이 또 나옵니다.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이 요청은 이 여인에게 참 고통스러운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먹고 죽으려고 조금 남겨 놓은 밀가루 한 움큼 밖에 없는데 이 사람이 그걸 달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 그걸 조금 나눠 먹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찬 요청입니까. 생명을 내놓으라는 요청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 여인에게 주어집니다. 13절 14절에 그 말씀에 나옵니다. "두려워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을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에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에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 앞에서 여인은 순종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이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므로 '내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리라' 하고 떡을 구워 엘리야에게 먼저 갖다 주고 그리고 자기들이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이 권능을 발할 것을 믿고 내가 그 말씀을 의지 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에 기회를 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결단하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행하고자 하는 결단을 가지고 이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참 좋은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에게 그렇게 행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며, 나로 하여금 무엇을 고치기를 원하시며, 무엇을 포기하기를 원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가를 배우지 못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순종의 삶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로마서 8장 주일설교말씀] 구원의 서정(롬 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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