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2장에서는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새 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적그리스도를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은 빛 안에 사는 증거(요일 2:1-29)
1-6절,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 . . .
요한은 말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은 본 서신에서 그가 편지를 쓰는 교인들을 ‘자녀들아’라고 자주 불렀고(2:12, 28; 3:7; 4:4; 5:21) 본절에서도 ‘나의 자녀들아’라고 친근히 불렀다. 그의 말투를 보면 그는 나이가 많이 든 것 같고 교인들에 대한 사랑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본 서신에서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도 여러 번 불렀다(2:7; 3:2; 4:1, 7, 11).
그는 본 서신을 쓰는 목적을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1:4에서는 “우리가 이것을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하였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목적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다. 죄 짓지 않는 삶, 죄 없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도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하므로,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변호자가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앞에서’라는 원어(프로스 톤 파테라)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며, ‘대언자’라는 원어(파라클레토스)는 ‘변호자’라는 뜻이다. 범죄하는 문제는 성도의 현실적 문제이며 그 대책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 현재적 효험이다. 구주 예수께서는 죄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현재적 변호자가 되신다.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화목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모스)는 ‘유화(宥和)제물’(propitiation), 즉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제거시키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유화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유화’라는 것이 성경적 속죄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한 유화제물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만 위할 뿐 아니고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유화제물이 되셨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성도들을 위하여 계속 변호하시는 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3-4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한은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로서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할 것과 그 첫 번째 증거로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었다(1:5-10). 이제 그는 주의 계명들을 행하는 일에 대해 강조한다. 그것도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이다. 본절은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면 주를 아는 자임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의 계명들은 곧 하나님의 계명들이다. 그것들은 구약성경이며 그 요약은 십계명이고 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주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자라고 간주된다. 하나님을 아는 자이냐, 모르는 자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같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 곧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5-6절]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 . . .
요한은 또 말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나님의 계명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과거에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육신적 쾌락을 사랑했던 우리들은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킬 때 성취된다. 주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하셨다(요 14:21, 23).
요한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주 안에 있음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의 생각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며 주의 특권을 함께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장). 그러나 그는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정말 주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주의 행하시는 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무엇보다 우리는 죄 짓지 않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것이 사도 요한이 서신을 쓴 목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무엇보다 우리가 죄 안 짓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한 유화제물이시며 그것에 근거하여 우리의 지난 죄를 다 씻으셨고 현재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
셋째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이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 안에 거하는 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일 것이며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계명들을 힘써 지키자.
7-11절, 형제 사랑과 빛
[7-8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 . . .
요한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형제들아](전통사본),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처음부터](전통사본)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한은 앞에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하였는데, 이제 그가 말한 계명이 어떤 새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 그들이 처음부터 들었던 말씀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것은 십계명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이 말하는 새 계명은 분명히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남겨두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 계명은 주님 자신에게와 우리에게 참된 계명이다. 요한복음 13:1에 보면, 주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주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으심으로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쓰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다(엡 5:2, 25).
새 계명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행하고 있었던 터이었다.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물질적 유무상통으로 드러난 서로 사랑함은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의 표시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때에 무지와 죄악이 우리를 지배하였었다. 그러나 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왔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가 우리에게 찾아 왔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렇게 구원받은 증거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새 계명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참된 것이다.
[9-11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 . . .
요한은 또 말한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그 형제를 미워한다’는 말은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성도는 거짓된 구원과 헛된 확신을 조심해야 한다. 비록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 구원을 받았다, 빛 가운데 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거짓된 구원이요 그의 확신은 헛된 확신이다. 그는 구원받은 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고백과 구원의 확신은 형제를 사랑하는 그의 삶을 통해 확증되어야 한다.
형제 사랑은 빛의 증거요 구원의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왔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자이다. 그는 자기 속에 걸림돌 혹은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다. ‘거리낌’이라는 원어(스칸달론)는 ‘걸림돌, 걸려 넘어질 원인’이라는 뜻이다. 빛은 우리의 길을 밝게 비춘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자신의 행위의 잘못을 밝히 본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잘못된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삶을 살기를 힘쓴다.
반면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람이 어두운 밤에 산속을 헤맨다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이,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갈 곳’이라는 원어(푸 휘파게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라는 뜻이다. 그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다. 어두움 가운데, 즉 무지와 죄악들 가운데 사는 자들이 갈 곳은 오직 한 곳, 곧 지옥뿐이다. 만일 그가 그의 갈 곳이 지옥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7절부터 11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임을 증거한 후에, 형제 사랑이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는 잣대가 됨을 말했다. 형제 사랑은 다른 말로 참 구원과 거짓 구원을 구별하는 표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온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어야 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이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걸림돌이 없는 자이다.
12-17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2-14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 . . .
요한은 말한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얻었음](원문)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교인들을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로 구별하여 언급한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을 따라 구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앙적 상태를 따라 구별한 것 같다. 교인들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믿음의 기본적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다 성도들의 과거의 체험들이며 현재의 증거들이다.
첫째로, 자녀들 혹은 아이들은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교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요한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상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보혈(寶血)로 죄씻음을 받았다. 우리는 세례 의식을 통해서나 천주교 신부(神父)에게 하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해서나 마리아를 통해서 죄씻음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씻음을 받았다. 성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둘째로, 아비들은 믿은 지 오래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연령도 많은 자들이었을지 모른다. 요한은 그들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참된 신앙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곧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이다.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 17:3).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생활의 여정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를 점점 더 아는 과정이다.
셋째로, 청년들은 믿음이 강하여 주를 위하여 일할 만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다. 악한 자는 사탄과 악령들과 그의 종들이다. 청년들이 그들을 이긴 방법은 그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였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강해지라고 교훈한다.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에베소서 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 에베소서 6: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는 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38; 신 6:4-5). 또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만 전심전력하여 사랑하려면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집이나 돈이나 직장은 우리가 감사하게 사용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애착을 두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 아내, 자녀들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교훈 안에서 그들을 사랑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없는 이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실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하는 것들이며, 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 즉 음란한 욕망으로 더러워져 있고, 안목의 정욕 즉 눈으로 보는 육신적 아름다움의 추구로 더러워져 있다. 그러나 실상 육신적 아름다움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못된다. 그래서 잠언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잠 31:30). 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생의 자랑 즉 명예나 권세 등 이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더러워져 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헛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헛되고 죄악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 수 없는 것이다.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참으로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고 만다. 또 이 세상과 함께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다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헛됨을 반복적으로 증거하였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에는 ‘헛되다’는 말(헤벨)이 38번이나 사용되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외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했다(사 40:6-8).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성경말씀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12절부터 1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씻음을 받았는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는지, 이 신앙의 기본적 사실들에 대해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교회에는 주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 악한 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인 청년들, 좋은 군사들이 필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헛되고 죄악됨을 깨닫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참으로 허무하고 죄악되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며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8-23절,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남
[18절]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 . . .
요한은 말한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한은 사도 시대 말기를 말세라고 보았다.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대적하는 이단들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세상의 종말의 징조들로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악한 질병들, 바른 신앙의 핍박 등을 예언하셨다. 그 중의 하나가 적그리스도들의 출현이었다. 마태복음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종말의 징조들은 이미 사도 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신약성도들은 종말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종말의 징조들은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 가장 큰 징조는 천주교회 교황이 바른 진리를 대적하고 참된 신자들을 핍박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성경이 예언한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이 더욱 많이 이루어짐을 보고 느낀다. 우리는 특히 많은 개신교회들의 배교(背敎)와 타락을, 그리고 다수의 사이비 기독교 종파들의 나타남을 보았고, 또 1, 2차 세계대전을 지나 이제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의식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 속에 항상 있어 왔지만, 오늘 시대는 참으로 말세인 것 같다.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을 확인하면서 더욱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예언하신 바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바르게 살아야 할 것이다.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단들은 처음에 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어느 날 교회를 떠나갔다. 교회 역사상 이단의 초기 형태는 분파적이었다. 교회에서 나간 소수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전체적으로 부패하여 배교적이게 된 때가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때가 그러하였다. 성경 진리를 깨닫고 믿었던 참된 성도들은 소수파가 되어 교회에서 정죄되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이후의 교회의 상황은 더욱 그렇게 되고 있다. 세계 교회는 전체적으로 부패하여져 있다. 경건한 선조들이 가졌던 성경적인 신앙, 바른 신앙, 보수 신앙, 옛신앙은 오늘날 소수파가 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다양성을 좋아하며 넓은 길을 가고 있다.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을 책망하는 목소리는 극단적 입장이라고 무시와 배척을 당한다. 포용주의 시대에는 비타협적 보수 신앙만 유일하게 배척을 받는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항상 비타협적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이고 비타협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과 달리, 초기의 이단들은 분파적이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나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처음부터 참된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참 성도들과 함께 거하였을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이지만(고전 12:13, 27), 외형적 교회 속에는 참된 신자들 뿐만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섞여 있다.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섞여 있었던 것과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으며 주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은 자들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이며(요 6:64),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적이었고(요 12:6), 예수님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한 몸이지만, 이단은 그렇지 않다. 실상 그들은 처음부터 소속이 달랐다. 그들은 믿지 않은 자들이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요 하나님과 천국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20-21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 . . .
요한은 또 말한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구원받은 성도는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곧 성령을 받았다. 성령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그는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다. 요한은 성도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편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진리를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편지한다고 말한다. 그가 또 이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고 믿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단에 대해 논하며 이단을 배격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2-23절]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 . . .
요한은 또 말한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없느니라.]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우리가 적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교리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이 있다. 이단들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고 음란하고 탐욕적이다(벧후 2:1-3). 특히 그들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거짓말 중에서도 큰 거짓말이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못한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적그리스도적인 이단은 천주교회이다. 천주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마리아를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하고 찬미하고 그에게 기도한다. 또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믿고 따르지 않고 교황의 무오(無誤)한 권위를 주장한다. 또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완전함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믿지 않고 공적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정죄한다. 또 그들은 신부들이 집행하는 미사가 그리스도께서 계속 죽으시는 의식이라고 말하고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작은 죄’가 있으면 연옥(煉獄)에 들어가 불의 시련을 통과한 후에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런 점들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참 뜻을 부인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부인하는 이단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천주교회보다 더 심각한 적그리스도적 이단이 있다. 그것이 기존 교회들 속에 들어와 있는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들, 그의 진노와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대속 사역, 그의 부활, 그의 승천과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부인하는 사상이다. 그것은 실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적 사상인 것이다.
18절부터 23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 종말의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말세 의식을 가져야 한다. 많은 적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20세기에 인류가 경험했던 그 참혹했던 1, 2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 알고 있고, 현재 3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사는 현 시대는 참으로 말세지말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지자.
둘째로, 우리는 말세의 한 징조로서 나타나는 이단들의 소속을 바로 알자. 많은 이단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었다가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 교회가 전체적으로 배교적이게 되었으므로 이단들이 건전한 교회인 양 행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천주교회가 기독교의 한 중요한 파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고 있다. 또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대교단들의 목사 양성원인 신학교들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단들은 교회 밖에 있든지 교회 안에 있든지 간에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사탄의 왕국에 속한 자들이다. 우리는 이단의 소속을 바로 알자.
셋째로, 우리는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해야 한다. 이단들은 교리적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며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자들이다. 우리는 그 두 면을 생각하며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적 지식을 가지고 이단들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천주교회가 적그리스도적이며 이단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2천년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적그리스도적 이단 사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우리는 윤리적으로도 이단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을 항상 구하며 행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부패해진다면 우리는 이단들을 분별할 수 없고 배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24-29절, 주 안에 거하라
[24절]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 . .
요한은 또 말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들은 것’은 교회가 사도들을 통해 들은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였고 그를 믿음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고(요 3:16)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요 1:12). 이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들은 바이었다.
요한은 이 내용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한다.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는 것은 그것을 믿고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깨닫고 굳게 믿고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옛신앙이며 보수신앙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신비적 영적 연합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으로 대속의 은택들을 누리며,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게 된다. 이러한 연합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성도가 이러한 정상적 생활을 하려면, 사도적 복음 진리의 내용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믿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25절]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 . . .
요한은 또 말한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관한 것이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로 인한 죄씻음은 영생을 가져올 것이다. 이 영생은 현재 충만히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미 받았고 장차 충만히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요 5:24; 11:25-26).
[26-27절]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 . . .
요한은 또 말한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사도는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적그리스도들과 그들의 나타남에 대해 말함으로 성도들을 조심시키려 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들, 즉 이단자들은 속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영생의 복음을 부정한다. 그 불신앙은 결국 사람을 죄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에게는 ‘기름 부음’ 곧 성령의 거하심이 있다. 고린도후서 1: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께서는 완전하시고 참되신 교사이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간 교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인간 교사들을 주셨다.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에베소서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그러나 우리는 어떤 교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배우고 깨닫고 확신할 수 있다. 또 그의 진리는 참되고 거짓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들은 교회가 처음부터 배운 내용과 일치한다. 성령님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라는 말씀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동일하다. 신약성도들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통해 듣고 배운 복음 진리, 곧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그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야 하며,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표시가 된다.
[28-29절]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은 우리가 주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께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15:3-5).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믿음과 경건과 순종의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요한은 우리가 이렇게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주께서 재림하실 때 담대함을 얻고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림 소망은 우리의 최대의 소망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의 부활과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거기에 있다.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생활의 목표는 바로 그 날 주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러나 그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고 순종치 않았던 자들이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우리가 주의 의로우심을 안다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도 알 것이다. 여기에 중생(重生)의 증거가 있다. 여기에 신앙과 행위의 일치된 증거가 있다. 중생한 자는 바른 신앙, 역사적 기독교 신앙, 옛신앙을 가질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해,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24절부터 2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도들에게서 처음부터 들은 바,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파악하고 보수해야 한다. 거기에 영생의 약속이 있다. 거짓 교사들이 왜곡시키려는 것이 바로 그 신앙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그 신앙이다. 우리는 그 내용을 믿고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은 실상 우리가 중생했을 때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바른 말씀을 붙들고 믿고 그것을 순종함으로써 주 안에 거함을 확실히 증거해야 한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할 때만 우리는 주의 재림의 날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 참된 믿음과 순종이 없는 자는 그 날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들은 다 주의 재림을 영광 가운데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 성경 좋은 말씀] 백마 탄 자의 심판(계 19:1-21)
'기혼샘 신약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찬송가 2장 성경말씀] 성부 성자 성령께-삼위의 하나님을 찬양(계 4:1-5:14) (0) | 2022.06.29 |
---|---|
[히브리서 10장 강해 설교말씀] 담대히 서로 격려함(히 10:1-39) (0) | 2022.06.25 |
[사도행전 히브리어 성경말씀] 산헤드린 공회에 세워진 베드로(행 4:5-8) (0) | 2022.06.21 |
[히브리어성경말씀 요한복음] 예수님의 세례식 장면(요 1:32-34) (0) | 2022.06.21 |
[요한계시록 19장 성경 좋은 말씀] 백마 탄 자의 심판(계 19:1-21) (0) | 2022.06.20 |
[사도행전 14장 좋은 성경 말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함(행 14:1-28) (0) | 2022.06.20 |
[누가복음 19장 예수님 말씀] 삭개오의 목마른 신앙(눅 19:1-10) (0) | 2022.06.09 |
[야고보서 4장 강해 설교말씀]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약 4:1-17) (0) | 2022.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