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누가복음 17장 강해설교말씀]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눅 17:1-37)

기혼샘 2022. 3. 2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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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에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는 마지막 심판이 있습니다. 지금도 종말의 때입니다. 종말의 때에 많은 사람이 복음을 싫어하고 세상으로 갑니다. 죄를 짓기를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돈을 더 사랑합니다. 이럴 때 성도는 주님을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눅 17:1-37)

 

1-10, 죄와 용서, 믿음과 의무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범죄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사람은 악하고 무지해서 남을 범죄케 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생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죄는 사람을 멸망케 하는 악이다. 자신이 범죄하면 멸망하듯이,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면 그를 멸망시키는 것이니,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범죄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는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 하나를 가리킨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주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있다. 그런 자는 작은 시험이 와도 잘 넘어진다. 주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작은 신자 하나를 범죄케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연자맷돌’은 ‘당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뜻한다. 사람이 그런 맷돌을 목에 걸치고 바다에 던지우면 살아 나올 가망이 없다. 그것은 그런 죄를 짓는 일이 그만큼 나쁘다는 것을 증거한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시고 강하시다. 그는 또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5:29-30). 범죄하는 일은 이렇게 중대하다.

주님의 표현이 강한 만큼, 이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서 죄가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여준다. 죄는 사람을 죽음과 지옥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사함을 주는 구원이다. 그는 이 구원을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사람으로 보내셨고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 인간의 죄악들로 인한 대가는 이처럼 매우 컸다. 우리는 범죄가 큰 문제이며 자신의 범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것도 큰 죄악임을 깨닫자. 우리에게 있어서 죄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서가 아니고서는 씻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죄를 씻는 길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린도전서 6:9-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요한일서 1:7-10,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계시록 1:5,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씻으시고](전통본문).”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네게](전통본문)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우리는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의 회개를 거절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면, 우리는 신앙적, 도덕적 방종과 해이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형제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제의 회개를 받아주지 않고 거절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한다면 우리는 그를 책망해야 한다. ‘경계하다는 원어(에피티마오)책망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회개한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만일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범한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용서와 그와의 교제의 회복을 보류할 수 있다는 뜻도 내포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만일 우리에게 범죄한 자가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고 회개치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18:17). 용서는 상대방의 회개 즉 상대방이 자신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을 전제(前提)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씀은 인간의 부족과 연약을 증거한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죄와 실수도 자주 하고 회개도 자주 하며 용서도 자주 해야 한다. ‘하루 일곱 번이라도라는 표현은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상대가 언제든지 회개하면 그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뜻이다(18:22).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이라는 말은 회개하는 자의 중심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거나 판단하려 하지 말고 단지 그의 사과의 말에 근거하여 그를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라는 뜻이라고 본다.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에서 매우 요긴한 한가지는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서로 사랑하며 일치 단합하여 주를 섬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그들도 서로의 실수와 부족을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5-6]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깨닫고 더 큰 믿음이 필요함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의 작은 믿음은 날마다 성장해야 한다.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다면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큰 믿음은 큰 역사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실상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에게 좀 있다고 생각되는 우리의 믿음도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이라는 것, 즉 심히 작은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심히 작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만 바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주여, 우리의 믿음이 심히 작사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주님께 아뢰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 꽤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믿음이 심히 작음을 인정하며 주님을 향해 또 사람들을 향해 항상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7-9]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감사]하겠느냐?

종들은 주인의 밭을 갈거나 양을 쳤다. 그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 밭에서 돌아와서도 금방 편안히 상에 앉아 음식을 먹지 못했고 주인의 상을 준비하고 수종들었고, 주인이 음식을 먹은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또 주인은 그의 명령을 다 행한 종들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옛 시대의 주인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 이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이며, 더욱이 우리는 그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었다.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것은 신약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이다. 우리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하고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봉사의 직무를 행할 때도 우리의 힘과 재능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주의 주신 은혜와 힘으로 했고 그때에도 우리에게는 많은 부족과 흠이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이런 정신과 태도가 오늘날 목사들과 제직들과 주일학교 교사들과 찬양대원들 등 모든 봉사자들이 가져야 할 봉사의 정신과 태도이다. 우리 모두는 종의 정신으로 겸손히 주님을 섬기며 일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의 중요성을 깨닫자. 죄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범하는 자를 멸망으로 이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6:23) 지옥 형벌이다(21:8). 그러므로 소자 한 명을 범죄케 한 자는 차라리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그를 책망해야 한다. 그가 위험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면 용서해야 한다.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18:22). 죄는 반드시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한다(요일 1:9).

둘째로,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다. 주께서는 우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큰 일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한 믿음도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 성경을 주셨다(20:30-31). 믿음은 성경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며(10:17) 견고해진다(1:1-4). 또 믿음은 기도로 나타난다(눅 18:8).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견고한 망대에 안전히 사는 것과 같다(18:10). 믿음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방패이며(6:1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요일 5:4-5).

셋째로, 하나님의 종의 자세는 겸손히 충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보상이나 칭찬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무익한 종임을 인식하고 자기가 한 일은 단지 당연한 의무를 수행한 것뿐이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했고(고전 15:10) 또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로 고백하였다(3:8).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중에 24장로들은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던져 드렸다(4:10-11).

11-19, 한 나병환자의 구원

[11-13]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는 유대 땅의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중부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 남부 유대 지방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시는 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을 지나가고 계셨다. 그때 그는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쳤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동네 밖에서 살아야 하였다(13:46). 그래서 그들은 아마 멀리 서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 얼마큼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자기들의 나병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긍휼히 여기심 받기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도우심을 얻을 것이다.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가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하였다. 레위기 14: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문둥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살아있는]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살아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 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일을 거할 것이요 칠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주의 말씀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뜻을 포함하였다.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에 있으므로 그 나병환자들은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하여 예루살렘까지 가야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어떤 때에는 나병환자를 즉시 고쳐주기도 하셨으나(8:3),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즉시 고쳐주시지 않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옛날 엘리사 선지자가 자기에게 나병의 고침을 얻기 위하여 온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였다(왕하 5:10). 이런 말씀들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한다. 참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열 명의 환자들은 주의 말씀대로 갔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그들은 믿고 순종하였고 그때 그들은 병고침의 은혜를 받았다.

예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그는 말씀으로 그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의 말씀의 능력은 그의 신성(神性)의 능력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예수께서는 옥에 갇혀 있었던 세례 요한의 보냄을 받고 온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었다(눅 7:22).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어주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5-16]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으나, 그 중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께 감사하였다. 다른 이들은 기쁨과 들뜬 마음으로 제사장에게 갔다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자기가 병 고침받은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던 걸음을 돌이켜 예수께 와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과 피가 섞인 족속이었다. 주께서는 그를 이방인이라고 부르셨다(18).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며 배척하였었다. 그러나 주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오늘날 신약교회의 교인들인 이방인 신자들은 이 사마리아인과 같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지 못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 구원을 감사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다른 아홉 명의 환자들은 유대인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병 치료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몰랐다. 그들은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할 줄 몰랐다. 인간은 참으로 무지하고 부족한 존재이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감사도 돌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치를 나타낸다. 또 이 말씀은 그가 나병 치료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받았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많은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인류 역사에서 예수처럼 병자들을 고쳐주신 자가 누구인가? 그가 행하신 병고침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충분히 증거한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이보다 더 잘 증거할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유대인 청년 예수가 과연 인류의 구주가 되실 수 있는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할 사건이 될 수 있는가? 2천년 전의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시대의 많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달려 있다.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는 많은 사람들의 구주가 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크다. 실상, 그가 지상에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과 병고침의 일들은 그의 신성을 충분히 증거한다. 더욱이,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신성을 확증하셨다.

둘째로, 우리는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다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오직 한 명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돌아와 예수께 감사하였다. 사람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의 사랑과 수고를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이웃에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세상을 주시고 우리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지혜와 건강, 가정과 직장, 일용할 양식과 사회적 안정, 특히 우리에게 폭력적인 공산주의 독재정권이 아니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주신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북한에는 자유와 인권이 없다. 거기에는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없다. 거기에는 거짓과 폭력이 가득하다. 우리는 자유 대한민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주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흘리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본문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을 증거한다. 주께서는 그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병의 치료가 믿음으로 이루어졌다. 영혼의 구원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은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의 선행은 누더기 옷과 같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0-37, 하나님의 나라와 인자의 날

[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고 가난과 질병에서 구원을 얻는 나라를 바랐던 것 같다. 오늘날도 자유주의적 교회는 경제적 평등 사회를 추구하고, 오순절파 교회는 병의 고침과 물질적 복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그런 개념들과 달랐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보이지 않게, 영적으로, 내면적으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선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교회 속에서 시작된 중생(重生)과 구원과 같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3:3, 5). 골로새서 1:13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심령 속에 임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통치하심을 부정하고 있으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믿는 신자들 속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믿고 순종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산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속에 이미 시작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중생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전도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 운동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현재의 하나님의 나라는 불완전한 모습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지식과 인격과 삶이 불완전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 곧 우리의 성화도 완전케 될 것이다. 다시는 죄성이 없고 흠과 부족이 없는 완전 성화된 개인과 완전케 된 사회와 세상이 될 것이다.

[22-24]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날들](원문)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人子)의 날[날들](원문)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보라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전통본문)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人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인자(人子)의 날들은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활동하시는 날들, 곧 메시아 시대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우시므로 사람들은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의 때에 그는 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저편까지 비췸같이 온 세상이 다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은 세계적 사건이 될 것이다. 사실, 오늘날 세계는 이미 인터넷망과 인공위성 전파들로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한 지역의 일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임하고 있고 또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지만, 이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일이 있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시작될 나라이므로 이 일을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이 있어야 했다. 그는 실상 이 일을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 20:28에 보면, 그는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26-30]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人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人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주의 재림의 날은 노아의 때와 비슷할 것이다. 노아의 여덟 식구는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등 세상일에 분주하다가 홍수 심판의 멸망을 받았다. 오늘날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고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죄 가운데 낙을 누리고 살며 세상의 일들에만 분주하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 형벌의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은 또 롯의 때와도 비슷할 것이다. 롯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등 세상일에 분주했고 심히 음란하고 죄악되었다. 오직 롯과 그의 두 딸들만 소돔성에서 구원을 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늘로서 내리는 유황불비로 다 멸망하였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도 비슷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악되며 육신의 쾌락을 구하며 세상일에만 분주하게 살다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영원한 멸망의 심판, 곧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주의 재림의 날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게 심판과 멸망의 날이다. 그 날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다 불타버릴 것이다. 베드로후서 3:10-11,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불타버리리라](전통본문).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그러므로 주의 재림의 날에는 사람이 지붕 위에 있다가 집안 물건을 가지러 내려갈 필요가 없고 밭에 있는 자는 집에 돌아가려 할 필요가 없다. 이제 모든 것이 불태워질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상의 물건들을 챙길 필요가 없는 때가 왔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태워질 것이다.

[32-33]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구원하고자](전통본문)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세상과 세상의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버림을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적 목숨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신앙의 절개를 저버리고 육신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주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인데, 우리는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만 소망하며 하나님의 진리만 붙잡고 육신의 생명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3:8, 10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 .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말하였고, 또 요한계시록 14:9-12에는,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 . . .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고 했다.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믿음을 지켜야 한다.

[34-35]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24:40-41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주의 재림의 날은 대분리의 날이 될 것이다. 그 날 밤 함께 자던 사람들 중에서 데려감을 당할 자도 있고 버려둠을 당할 자도 있으며,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에도 그러할 것이다.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들림을 받는 것을 가리키며,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 남겨져 두려운 심판을 받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데려가심 즉 하나님께서 취하여 가심을 휴거(携去, rapture)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24:30-31,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죽은 자가 살아나고 산 자가 변화되어 지남철에 끌리듯이 하늘로 올려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37]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소마)[]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주여, 어디오니이까?”라는 질문은 들림을 받은 자들의 집결지를 물은 것 같다. 주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 일반적 사실로 대답하신 것 같다. “몸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이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몸들을 위해서는 심판의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지만, 영적으로 살아 있는 몸들을 위해서는 영광의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도록 성도들을 돕는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라는 뜻 같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가 우리 자신을 점검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사람들 속에서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과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뜻에 복종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그에게 이루어진.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며 중생(重生) 즉 거듭남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임하였는지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는지, 거듭났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으라.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대비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은 두 부류로 분리될 것이다. 하나는 들림을 받을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상에 남겨질 것이다. 지상에 남겨질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 심판과 지옥 형벌이 예비되어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1:7-9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불의](전통본문)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말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로 오신다(딤후 4:1). 우리는 죄를 회개함과 예수님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대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자. 주의 재림 때에 들림 받는 자들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위로와 영광을 누릴 것이다. 주의 재림의 때는 만유를 회복시키는 때이며(3:19-21) 영광의 천국이 이루어지는 때이다(14:1-6). 또 그때 주께서는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이 영생할 몸으로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3:20-21). 우리는 세상 애착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랑을 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거기에 합당한 순결하고 선한 삶을 힘쓰자.

[여호수아 6장 주일설교말씀] 여리고 성을 정복함(수 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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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6장에서는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을 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함(수 6:1-27) 여호수아 6: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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