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마태복음 성찬 주일설교말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 9:14-17)

기혼샘 2021. 7. 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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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성찬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합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이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하는 날을 정해 놓고 금식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그때는 금식을 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금식하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 안에 없다면 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말씀도 먹지 못하고 기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금식은 육적인 것을 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졌을 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에 신랑이 없을 때 금식하게 됩니다. 지금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목: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마 9:14-17, 창 35:1-8

 

요 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 9:17)

주제: 새로운 진리를 담는 새로운 그릇이 준비되듯이 마음을 새롭게 하여 매일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자

 

오늘은 세계 성찬주일(World Communion Lord’s Day)로 지킵니다.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월 첫 주일 성찬주일로 성수하고 있습니다. 성만찬 혹 주의 만찬은 사실 매 주일에 해야 합니다. 기독교 예배의 핵심은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매 주일 기념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취하여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Take, eat; this is my body.)’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계약의 피니라 (Drink ye all of it; For this is my blood of the new testament, which is shed for many for the remission of sins.)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마 26: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1-22) 예수님의 뜻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안에 통일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3-6) 같은 주, 같은 믿음, 같은 세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초대교회는 성찬예배가 중심이었습니다. <디다케>, <디다스칼리아>, <변증서>, <사도전승> 등 고대 예배자료를 근거로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너무 “설교 중심”의 예배인데 성찬 중심의 예배를 자주 실시함으로 균형을 맞춰야 하며, 전형적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초기에는 세례[밥티스트] 요한도 사역을 하고 있었기에 요한의 제자들 주님께 나아와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 가운데 안드레와 요한(세베대의 아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제자가 된 이들입니다. 세례[밥티스트] 요한은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사해문서와 요세푸스 역사책에 의하면 신약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 사두개파(정치 참여파), 바리새파(종교인들), 에세네파(종말론자들), 그리고 열혈당(Zealot,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려 한 운동가들) 네 당이 있었답니다. 이 중에 에세네파에 대해서는 쿰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는데 이들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정기적으로 금식기도와 금욕생활을 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메뚜기가 살지 않습니다. 여기서 메뚜기란 가난한 자들이 먹는 쥐엄 열매(husks)를 말합니다(히브리어 글자가 유사함). 부부관계도 할 수 있으나, 자녀 생산을 위해서만 허용되었습니다. 옷도 약대 털옷, 염소 털옷으로 되도록 자연 그대로 살아가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선과 악의 투쟁을 믿었고, 어둠의 자식은 곧 멸망당하고 의로운 교사들이 출현하여 백성들을 종말의 나라로 이끈다고 믿었습니다. 세례[밥티스트] 요한이 베푼 세례의식[밥티스마]도 쿰란 공동체에서 정결 예식으로 하던 의식이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교리를 지켜야 하며, 경건한 생활 수칙을 따라야 했습니다.

 

세례[밥티스트] 요한이 쿰란 공동체의 일원인지 아닌지 기록에 없지만 그의 생활의 모습과 회개 운동을 일으킨 것을 보면 그는 에세네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틀림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제일 마지막 부분인 말라기서 4장 5-6절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듯이 바로 세례[밥티스트] 요한은 오시고마 하신 엘리야였습니다(마 11:14).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회개였습니다. 새로운 창조의 질서를 공포하는 공동체의 첫 번째 제의가 바로 회개 의식임은 당시 쿰란 공동체와 같은 맥락입니다 (마 3:1-6, 막 1:1-6, 눅 3:1-6, 요 1:19-23). 회개와 선행은 벌 앞의 방패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례의식을 베푸는 것도 회개의 표시로 물로 씻는 의식입니다. 당시 회당 예배에서 늘 드렸던 ‘18조 기도문’의 다섯째 항목에서 ‘회개를 원하시는 주님은 찬미받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회개 운동을 일으켜서 바알로 오염된 이스라엘을 청소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다시 올 엘리야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땅이 저주를 받겠다는 말씀은 철저한 회개를 말합니다. 돌아온 탕자처럼 말입니다.

 

이런 회개운동을 전개한 요한은 에세네파처럼 바리새인처럼 정기적으로 금식을 하였습니다. 당시 경건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일 년 내내 금식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어느 일을 정해놓고 금식을 했는지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정기적으로 금식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으니 이상하게 여겨 주님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저희와 바리새인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 9:14)

 

이에 대해 주님의 답변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하나님 나라를, 신랑은 예수님을, 손님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말합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천국 비유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고, 첫 번 기적도 가나 혼인집에 하셨고, 종말 비유인 열 처녀 비유에서도 주님은 신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교회는 신부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이사야 62:4-5에 보니,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Hephzibah)라 하며 네 땅을 쀼라(Beulah)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고 함으로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신랑-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2:16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서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호 2: 19-22)

아가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교회(신부)를 지극히 사랑해 주셔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 1:13-15)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아 2:1-2)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아 3:1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아 4: 10-12)

엡 5:22-30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전에 방지일 목사님께서 제가 시무하는 프린스톤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실 때, ‘목회자는 미용사다’라고 하신 말씀을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신랑 되시는 예수님 앞에 성도들을 잘 신부 화장하여 신랑의 마음에 꼭 들도록 미용하는 것이 바로 목회임을 이해했습니다. 신부 화장을 하는 것을 보니 며칠 동안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부 파마, 피부관리, 전신 마사지, 기초화장, 그리고 여러 가지를 하는데, 목회자도 교인 한분 한 분을 잘 화장시켜 가장 예쁜 신부의 모습으로 꾸며야 하는 것입니다. 재림 찬송인 175장(통 162장)에서

 

1.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밝은 등불 들고나갈 준비됐느냐

그날 밤 그날 밤에 주님 맞을 등불이 준비됐느냐?

4. 그날 밤에 영화로운 혼인 잔치에 기뻐하며 할렐루야 찬송 부르리

그날 밤 그날 밤에 주를 맞을 등불이 준비됐느냐?

(후렴) 예비하고 예비하라 우리 신랑 예수 오실 때

밝은 등불 손에 들고 기쁨으로 주를 맞겠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렸다면 당연히 금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빼앗길 때도 금식해야 합니다. 절대로 주님을 빼앗기지 맙시다. 혹 주님을 잃어버렸다면 당연히 금식하며 내 심령 가운데 예수님을 회복해야 합니다. 찬송가 289장(통 208장)을 불러 봅시다.

 

1.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2.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 보다 더 희어졌네

3. 내 맘에 소망을 든든히 가짐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버림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다가 밝은 빛 홀연히 보고

저 멀리 하늘 문 환하게 보임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5. 나 이제 천성에 올라가 살기는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천성을 향하여 내가 곧 가리니 그 기쁨 비길 데 없네

(후렴) 주 예수 내 남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이런 말씀 끝에 주님께서 새것과 헌것에 대한 두 가지 예를 드셨습니다. 첫째는 옷과 생베 조각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 9:16), 둘째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 9:17) 하셨습니다. 헌 베 조각을 헌 옷에 붙이는 것을 요즘 아이들은 잘 보지 못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옷이 귀했고 양말이 귀했습니다. 닿아서 구멍이 나면 다른 베 조각을 붙여서 바늘과 실로 꿰매어 입고 다녔습니다. “빵구 난 내 양말 빵구가 안 난 것은 내 양말 아니죠” 노래를 부르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겨울 내복은 여기저기 꿰매어서 누더기 옷입니다. 부잣집 아이들에게 그런 내복을 보이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9장 16절 말씀을 잘 이해합니다. 헌 옷에 구호품 새 베 조각으로 기우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부대도 찢어지며 새 포도주도 쏟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넣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요즘도 베두인 사회에서는 병을 사용하지 않고 가죽 부대를 씁니다. 안 쪽이 염소 가죽의 거친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스페인어로 보따(bota)라고 하는데 ‘가죽 부대’, ‘장화’를 의미합니다. 스페인에서는 지금도 포도주를 돼지가죽에 담아 시장으로 팔린다고 합니다. 만약 새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가죽부대를 발효시켜 터질 위험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귀한 새포도주가 쏟아져 버립니다. 이것은 비유로 유대교의 가르침은 헌 베 조각, 헌 포도주 부대와 같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 포도주와 같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예수님의 천국 말씀을 새로운 마음속에 담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말씀처럼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요 3:5) 하늘나라의 비밀을 담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새것과 옛것을 구별하는 영적 분별력이 생깁니다. 마태복음 13장은 비유의 장인데 결론 부분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군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 13:52)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실 때에 우리는 새로운 세계관이 열리며, 새로운 역사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생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옛 성품은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이렇게 새로워진 성도의 생활윤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우리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정신으로 새 사람이 됩시다.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에 보니

(1) 정직한 사람 (25절):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2) 분노를 절제하는 사람(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3) 성실하며 구제하는 사람(28절):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4) 경건한 입술의 소유자(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5) 성령님을 근심하지 않게 하는 자(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6) 경건한 언행 (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7) 서로 용서하는 생활(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결심, 새로운 생각, 새로운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에베소 4장 말씀은 적어서 여러분의 책상, 냉장고, 자동차 핸들, 컴퓨터에 붙이고 다닙시다. 이런 새로운 생활을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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