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빌립보서 2장 성경 좋은 말씀]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빌 2:1-30)

기혼샘 2022. 1. 4. 11:49
반응형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빌 2:1-30)

 

1-11, 겸손한 마음으로

[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있을진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또 그의 은혜를 참으로 받은 자들이라면 그들 속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어떤 권면이나 격려나 위로가 있을 것이며 그들은 바울의 권면을 유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이 권면을 유념해야 한다.

바울은 우선 일심 단합하라고 권면한다. ‘같이하여,’ ‘같은 사랑,’ ‘합하여,’ ‘한 마음등 같은 뜻의 말이 네 번 반복되었다. 그는 에베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강조했다. 분열은 육신의 일이며 천국의 모습이 아니다. 분열하는 자는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물론 교회의 일치는 진리 안에서의 일치이다. 이단과 정통이 하나 되는 것을 말하거나 교회와 세상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붙들지 않기 때문에 옛날 노아 시대 홍수 심판 후의 바벨탑 운동과 같다. 형제 사랑을 강조한 요한일서도 바른 신앙과 이단을 구별하고 형제 사랑이 바른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교훈했다.

바울은 또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권면한다. ‘다툼이라는 원어는 당파심 혹은 이기적 야망이라는 뜻이다.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경쟁심은 좋지 않다. 또 우리는 다툼과 허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받들며 이루기를 소원해야 한다. 또 사람이 겸손하려면, 자기 자신의 부족을 알고 자기의 자기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사람은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우리는 남의 약점만 보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로 주신 장점을 보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또 성도들이 자기 일만 돌아보지 말고 다른 이들의 일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다른 이들의 일이란 다른 이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일을 가리킨다. 그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이타적 마음가짐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겸손히 일치 단합하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 힘쓰는 것을 봄으로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한다. 목회자들의 기쁨은 성도들이 성경의 진리대로 바로 믿고 바로 사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요한도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니 심히 기쁘며 그런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말했다(요이 4; 요삼 3-4).

[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로 여기지 않으셨으나](원문 직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들어 겸손을 교훈하였다.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 그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얻으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말은 그가 그의 신성(神性)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그의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일시적으로 보류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비천한 마구간에서 사람으로 출생하셨고, 인간 부모 밑에서, 목수인 요셉의 돌봄 아래서 30년 동안 조용하게 순종하며 사셨고, 공적 전도 사역을 하실 때에도 죄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이다(1:14).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놀라운 겸손이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겸손하게 복종하셨던 것이다.

[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인간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다. 주 예수의 신성(神性)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신 성육신 이전이나 이후나,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그의 인성(人性)은 부활 전과 후에 큰 변화가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후 지극히 크신 영광 곧 신성의 영광을 받으셨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11-12에서,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일심 단합하고 다툼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다른 사람의 신앙적 유익을 위하는 자가 되라고 교훈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겸손의 본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에 죽으심의 겸손을 깊이 깨닫고 그를 본받아 겸손한 마음으로 일치 단합하여 하나님의 일, 곧 복음 전도의 일과 다른 성도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 힘쓰는 자들이 되자.

12-18,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라는 원어(카도스 판토테 휘페쿠사테)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라는 뜻이다. 원문대로 다시 읽어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었고 항상 복종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복종이 지금 그가 떠나 있는 때에도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께 항상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저주가 선언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지만, 죄 가운데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 믿는 이들은 의()와 거룩함을 얻었다(3:24; 10:10, 14). 우리가 받은 의와 거룩함은 완전하다. 그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됨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의를 이루셨고 그 의는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행하여 얻거나 무슨 공로를 쌓을 필요도 없고 쌓을 수도 없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감사히 받고 그 의를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할 뿐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밝히 증거한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 곧 이미 받은 의()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라는 뜻이라고 본다. 즉 순종의 생활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우리의 성화는 비록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의 요구이며 성도들의 마땅한 길이다. 우리는 완전을 목표로 한 성화를 위해 소극적이거나 게으르지 말고 날마다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13]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후에 즉시 우리의 순종 생활 즉 성화의 노력과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거하신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교통하심과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런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자발적 소원과 노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따라 행한다. 경건해지려는 소원, 거룩해지려는 소원, 의로워지려는 소원, 선해지려는 소원,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이며 성령의 감동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남은 죄악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건하고 선한 소원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구원을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낸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예를 들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원망과 시비 즉 불평과 다툼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일보다 우리의 성화된 인격을 더 원하신다. 원망, 불평, 분쟁, 다툼은 인격의 흠과 결함이다. 그것은 죄악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런 흠과 결함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주를 위해 봉사할 때 원망, 불평, 분쟁, 다툼을 버리고 항상 사랑과 단결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성화의 목표는 한마디로 흠 없는 인격과 삶이다. 이 세상은 항상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바른 표준에서 볼 때 언제나 비뚤어져 있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다. 세상은 경건 대신 불경건을 좋아하고, 거룩 대신 더러움을 구하며, () 대신 불의를, () 대신 악을 따르며, 진실 대신 거짓을 택하는 세상이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에 부패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사회개혁을 부르짖지만, 그것이 정말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성도들은 이런 어그러지고 거스르는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답게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성화는 바로 실제적인 경건과 거룩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기대되는 삶은 이렇게 흠 없고 순전한 삶, 즉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이다. 그런 삶이 바로 세상에서 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고 부도덕한 세상을 어두운 세상이라고 부른다(1:5; 벧전 2:9).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원은 빛이다. 그것은 지식과 도덕성의 회복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도들의 구원받은 삶, 성화의 삶, 흠 없는 삶을 가리키신 것이다.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밝힌다는 원어(에페코)드러낸다, 나타낸다는 뜻이거나(Thayer, KJV, NIV) 붙든다(BDAG, NASB)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다. 그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했던 영혼들을 새롭게 하는 말씀이다. 구원은 새 생명이며 새 생활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죄악된 옛 습관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한 새 생활을 하지 않고 옛 생활에 계속하여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흠 없는 생활을 할 때, 생명의 말씀의 참됨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만일 성도들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고 그들의 사역은 결실 없는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빛의 생활을 하게 될 때,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그 성도들은 전도자들의 기쁨과 자랑이 될 것이다. 바울은 본서신의 끝부분에서 성도들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4:1). 데살로니가전서 2:19-20에서도 그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했다. 참된 성도들은 목회자의 기쁨과 자랑이다.

[17-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믿음의 제물과 봉사믿음으로 하는 희생과 봉사를 가리킨다. 빌립보 교인들은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였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주께 드리며 주의 일을 위해 즐거이 봉사하였다. 그것은 사도 바울을 기쁘게 한 일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희생과 봉사 위에 자신을 쏟아부을지라도 기뻐하겠다고 고백한다. ‘자신을 관제(灌祭, 붓는 제사)로 드린다는 말은 그의 순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불평스런 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의 헌신과 봉사이었다. 옥에 갇혀 있는 그는 죽을 각오를 하며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 빌립보교회여, 참된 믿음과 믿음의 삶만 나타내라. 나는 나의 생명을 그대들 위에 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

구원은 기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시다. 다윗은 시편 16:11에서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하였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5:22). 천국은 기쁨의 세계이다(14:17). 사람이 행복하지 않고는 기뻐할 수 없다. 구원은 행복한 일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은 기쁨의 사도이었다. 그는 옥 중에서도 기뻐하였다. 또 그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였다. 이 기쁨은 오늘 우리의 것이다. 어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구원으로 인해, 천국 소망으로 인해, 성령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느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새 생명을 얻고 구원에 합당하게 주께 순종하며 흠 없는 삶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항상 이 기쁨을 체험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법적인 구원, 곧 완전한 의()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성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를 우리의 삶 속에서 흠 없는 인격과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얻은 의를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실천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의 성화는 이 세상에서 불완전하다. 구원받은 우리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다. 이것은 과거의 죄악된 습관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 세상은 악하며 마귀의 시험은 도처에 있다. 성도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영적 싸움을 하며 이 싸움에서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누릴 영화는 우리의 성화의 정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의존한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도의 성화의 삶, 곧 순종의 삶은 결코 무겁고 엄숙한 일만이 아니고 매우 기쁜 일이다. 구원에 합당한 삶, 곧 흠 없는 삶을 살고자 순종하며 애쓰는 자들은 이 기쁨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항상 기뻐해야 한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19-30,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19-20]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귀한 동역자(同役者)이었다. 그는 바울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자이었다. 주의 일,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고 생각과 정신을 같이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복이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同行)하겠으며.” 또 디모데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정, 곧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이었다. 참된 일꾼은 교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필 수 있는 자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꾼들은 많으나 충성된 일꾼은 드문 것 같다. 옥에 갇힌 사도 바울에게는 지금 뜻을 같이하여 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디모데 외에는 없었다.

[21-24] [이는]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수고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본문은 디모데가 바울에게 둘도 없는 귀한 동역자인 이유를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복음을 전파하고 변호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성도들은 다 자기 일에 바쁘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에는 생각과 마음과 시간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다. ‘디모데의 연단이라는 표현을 보면, 디모데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통해 인격의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이제 디모데의 신앙 인격은 진실한 교인들에게 알려졌고 인정을 받았다. 디모데는 마치 자식이 아비에게 행함같이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다. 오늘날에는 누가 사도 바울과 디모데처럼 복음을 위해 수고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으므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의 수족(手足)이 되어줄 사람이 디모데이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디모데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어 자신의 소식을 전하며 그 교회의 형편을 살피게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사도 바울에게는 에바브로디도라는 동역자가 또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빌립보교회의 사자로서 사도 바울의 쓸 것을 돕기 위해 파송되어 왔던 자이었다. 그는 주 안에서 사도 바울의 형제이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한 자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를 함께 군사된 자라고 표현한다. 개인의 신앙생활과 영혼 구원의 전도는 마귀와 죄와 세상과의 영적 전쟁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군병들이다. 특히, 주의 종들과 전도자들이 그러하다.

군인들은 전쟁 때를 위하여 잘 훈련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훈련은 성경말씀들을 읽고 듣고 배우며 그 말씀들을 실천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생활이다. 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성도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훈련과 죽음을 각오한 정신이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죽음의 싸움터에도 용기 있게 나가야 한다. 성도들과 주의 종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사도 바울에게 왔던 에바브로디도는 병이 들었다. 그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빌립보교회에 전해졌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고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자기의 병든 소식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할까 봐 심히 근심하였다. 사랑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며,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해 염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해 염려하는 것이다. 에바브로디도에게 바로 그런 사랑의 심령이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도들을 위한 이런 진실한 사랑이 필요하다.

[27]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사람의 육신은 참으로 약하다.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 근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 사도라 하더라도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주셨던 병 고침의 은사는 사도시대 말기에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겨주셨다. 병의 치료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달려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기만 한다면, 고치지 못할 질병이 무엇이랴? 그러므로 우리가 병들었을 때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것밖에 없다. 야고보서 5:14-16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우리는 병들었을 때 먼저 우리 자신을 살피고 혹시 마음에 거리끼는 실수나 부족이나 죄가 있으면 다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의약적 치료도 감사히 사용할 수 있다.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함이니.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하나님의 긍휼로 병이 낫고 건강을 회복하자 그를 급히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냈다. 그것은 그를 봄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상심할까 봐 염려했던 바울의 근심도 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표현된다.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라고 부탁한다. ‘모든 기쁨으로라는 말은 마지못해 하는 영접이 아니고 진심에서 나오는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의 자세로 영접하라는 뜻이다. 그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만 국한하여 말하지 않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충성된 일꾼들을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들을 존귀히 여겨야 한다. 군대에서 좋은 장교들과 지휘관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듯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위해 진실하게 자신을 바친 충성된 일꾼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만일 그런 자들이 없다면, 교회들은 참된 인도자들을 가지지 못할 것이며 주의 일들은 매우 쇠약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종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그런 자들을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30]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에바브로디도는 죽을병에 걸렸어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참으로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자이었다. 그는 참으로 후대의 교회를 위해 희생적 봉사의 모범이 되었다. 주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오늘날도 주를 믿고 따르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시는 명령이며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성하라고 명하신다. 무엇이 충성인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바르게 살다가 바르게 죽는 것이 참된 충성이다.

본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복음의 참된 동역자가 되고 또 함께 군사 된 자가 되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그런 자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좋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에도 사도 바울 같은 올바른 종들이 필요하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같은 좋은 동역자들과 복음의 좋은 군사들이 필요하다. 오늘날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누가 그런 사역과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사모하자.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변호하고 그 복음을 믿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이 일을 위하여 수고했다. 또 많은 성도들이 자기 일에 바쁘고 주의 일에 관심이 적거나 없었을 때,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주를 위해 진실하게 바쳐졌다. 또 에바브로디도는 주님의 일을 하다가 병들었고 죽기에 이르렀으나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날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 복음을 전하고 참 교회를 세우는 일을 사모하며 그 일을 위해 바쳐진 진실한 종들과 일꾼들이 필요하다.

셋째로,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과 일꾼들을 온전한 기쁨으로 영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오늘날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위해 바쳐진 충성된 종들도 필요하지만, 그런 자들을 온전한 기쁨으로 영접하고 귀하게 여기는 성도들도 필요하다. 교회는 주의 진실한 종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또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0:40).

[아가서 5장 히브리어 성경말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위기(아 5:1-8)

 

[아가서 5장 히브리어 성경말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위기(아 5:1-8)

아가서 5장에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이 결혼을 했는데 사랑의 위기가 오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속사 관점에서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베소 교회처럼 첫사랑을 잃어버리는

kihonsam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