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사사기 6장 성경 주석말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사 기드온(삿 6:1-40)

기혼샘 2024. 1. 2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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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6장 성경 주석 설교말씀은 하나님이 사사 기드온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소명을 받으면 표징을 구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바알 제단을 부서뜨렸습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사 기드온(삿 6:1-40)

 

1,2,3,4,5,6-----------------------------------------------------------

이스라엘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 (1) "미디안"족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자손이다(25:1-4). 이 민족은 유목민(遊牧民)으로서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에는 모든 가축을 몰고 간다. 따라서 이들의 침략을 당하는 지역의 곡초(穀草)는 모조리 파멸된.

미디안의 침략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산으로 피난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 - 을 만들었다. 범죄 한 그들을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을 때에 그들은 겁약해져서 전쟁하여 침략군을 물리칠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이렇게 굴 속으로 도피하게 된 것이다.

7,8,9,10-----------------------------------------------------------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 고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 (7-8 상반) "한 선지자"란 말의 히브리어"한 사람, 선지자"란 뜻이다. 선지자 앞에 "사람"이란 말이 부가된 목적11절의 "여호와의 사자"와 구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그때에 이스라엘에 선지자 한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의 죄를 꾸짖게 하셨다. 그들의 죄는 전세대(前世代)와 다름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가나안의 우상을 수입하여 섬김이었다. 그들은 저희를 애굽에서 구출하실 뿐 아니라 아모리 사람들("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 9)의 압제에서 구출하여 주신(2:18, 4:14)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겼다. 이것은 배은 망덕한 큰 죄악이었다. 배은 망덕하는 자의 죄 때문에 억울함을 당한 이는 기가 막혀서 말을 못 할 처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시 109:4에 말하기를,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무지해도 자기의 배은 망덕의 죄가 지적될 때에는 변명할 말이 없는 법이다.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 모든 미신 종교는 사람에게 구원과 평안을 주지 못할 뿐더러 언제나 두려움과 번민을 일으킬 뿐이다. 사람이 그것을 섬기면 섬길수록 어두워 질뿐이다. 그러므로 우상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허무한 것을 두려워하는 어두운 자가 되었다.

11,12-----------------------------------------------------------

"여호와의 사자" - 는 일반 천사나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시다. 14절 참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중에게는 선지자직을 가진 인간을 보내어 말씀하셨으나(8), 기드온 개인에게는 그가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그가 자기 백성을 회개시켜 구원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실 때에는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화육(化肉)하여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는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1:1-2).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 "포도주틀"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서 시설된다. 그런데 기드온이 거기서 밀을 타작한 이유는, 그 때에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의 밀 타작하는 것을 보기만 하면 빼앗아 가기 때문에 은밀히 하기 위함이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 여호와의 사자께서 기드온을 가리켜 "큰 용사"라고 한 이유는 기드온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그것이 곧바로 그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15-16참조. 기드온 자신은 고백과 같이 "제일 작은 자"였다(15절 끝).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약한 자를 통하여 강력한 역사를 이루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하셨고(고후 12:9),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하였(고후 12:10).

13,14,15,16-----------------------------------------------------------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 (13) 기드온은 자기에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12)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다. , 그는 초자연적 사실에 대한 남의 증거를 얼른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는 믿기에 앞서 정직한 의심(honest doubt)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정직한 의심을 거쳐서 진리와 사실을 받아들이는 확신에 이르기도 한다.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 (14절 상반) 여기 이른바"이 네 힘"이란 무엇인가? 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힘이니,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 라는 말씀이 설명해 준다(13절 하반). 여기 ""란 말, 그 힘이 무슨 힘인지 지적해 주는데, 그것은 바로 그때에 여호와의 사자께서 기드온에게 제공해 주신 그 힘이다. 그것은 그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수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보내시는 사신(使臣)과 함께 해 주신다(16). 울은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였(4:13).

17,18,19,20-----------------------------------------------------------

기드온은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밝히 확인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시는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 라고 하였다(17). 그리하여 그는 이제 그 분에게 "예물"(제물)을 가져와 보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확실성과 진실성을 찾아본 것이다. 그의 이 태도는 불경건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당면한 문제를 신중히 취급하는 신앙에서 취해진 것이다. 요일 4:1에서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라고 하였다.

"염소새끼 하나", "가루 한 에바" - (45파운드)(19) 등은 한 사람 몫의 식물로는 너무 많다(C.F, Burney). 그러므로 기드온이 준비한 이 음식물은 제물로 준비된 것이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 전병을 살랐고 - (21) (1) 여호와의 사자께서 기드온의 드린 제물을 초자연적인 불로써 태운 것은 그가 하나님이신 증표이다(9:24; 왕상 18:38; 대하 7:1). (2) 제물을 불로써 태움은 그 제물 드린 신자의 헌신을 상징하는 것인데 아무것도 남김없이 다 바친다는 것이며, 그렇게 바친 결과로 그 자신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인격이 된다는 뜻도 가진다(1:9). 이렇게 신자로 하여금 헌신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불이 반석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일찌기 광야에서 모세의 지팡이가 반석에서 물을 내었다는 말씀(21:11)과 대조된다. 반석에서 물을 내신 하나님은 반석에서 불도 내셨다.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그 역사가 어떤 한 가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그것과 정반대 되는 것도 이루신다. 나님은 자기밖에 있는 객관 세계의 형태에 지배되지 않으시고 그것을 없는 것 같이 보시기도 한신다. 그는 없는 가운데서 있게도 하시고(4:17), 있는 것을 없는 것 같이 여기기도 하신다(40:17).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 (21절 하반)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언제나 그의 하시는 일과 함께 하신다. 우리는 언제나 그의 행하신 일을 봄으로 그를 깨닫게 된다. 그가 목적 없이 이 세상에 나타나 계시는 법은 없다. 그의 보이지 않으시는 속성이 그 본질이고, 그 본연이고, 또 그의 완전성이다. 11:3; 딤전 6:16 참조.

22,23,24-----------------------------------------------------------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고였다(33:20). 32:30; 20:19, 24:11; 4:33, 5:25-26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지 않으심도 그의 자비의 덕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인류의 욕심은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사자" - (하나님)를 눈으로 본 사실로 인하여 죽을까 두려워하며 근심하였다.

"슬프도소이다" -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아하"라고 개역되어야 옳다. 이것은 놀람과 또 근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 (23절 하반)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생각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일찌기 경고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기드온에게는 그 경고대로 시행하시지 않음이 무슨 이유일까? 이 때에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란 이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우리가 알 때에 문제는 해결된다. 그가 그리스도이시니 만큼, 그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를 체휼하시는 목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그 때에 나타나셨다. 그의 인간적 모습은, 그가 기드온의 돌아오기까지 그 만나 주신 자리에 그대로 기다리신 것과 같은 것이다(18). 어떤 한 장소에 머무는 행동은 신성(神性)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원리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모습을 지니지 않으신 신성(神性) 자체를 보는자(사실은 그를 볼 수도 없지만)는 왜 죽게 되는가? 만일 신성의 계시(啓示)가 제한성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통하지 않고 우리 인간(죄인)에게 임하신다면 그의 절대 완전하신 성결(聖潔) 때문에 그 인간은 죽는다. 12:29 참조.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면, 만일 태양의 열이 공기층을 경유하지 않고 땅 위에 직사(直射)한다면 이 지구는 온통 타버릴 것이 명백함과 같다.

"여호와살롬" - (24절 상반)은 여호와께서 평화롭다(Jehovah is peaceful)는 뜻이다. 하나님으로서 죄 많은 인류에게 오셔서 평화를 전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하신다고 하였다(12:20). 그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선포하신 것은 "평강"이다(24:36; 20:21).2:14에 말하기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하였다. 2:16-18; 16:33 참조.

25,26,27-----------------------------------------------------------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전쟁을 수행해야 되는데, 그 일을 착수하기 전에 먼"큰 용사" 답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번제"를 드리게 되었다.

칠 년 된 둘째 수소 - 70인역(LXX)의 한사본(GAL)은 이 문구를 "그 살찐 수소"라고 하였고, 월겟역(Vulgate)은 그저 "너의 아비의 수소"(taurum patristui)라고 번역하였다. 현존 히브리어 성경대로 번역된 우리의 한역에 "둘째 수소"라고 한 것은 햇수로 보아서 7년 된 것이 둘째로 간주되는 수소란 뜻이다(Delitzsch).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상을 찍고...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 (25 하반-26) 기드온이 헌신하는 번제를 드리기 위하여는 그 부친의 집에 있는 바알신의 단()과 아세라 신상()을 파괴해야만 되었다. 이것 역시 신앙의 용사만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니, 그 일을 단행하는 데는 우상 숭배자들의 박해를 각오해야 된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란 말을 미루어 보아 기드온은 우상 숭배하는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상 숭배에 휩쓸리지 않았으니, 그것은 "네 아비에게 있는"이란 말"네 아비에게 속한"이란 뜻임을 보아 밝혀진다. 그렇다면 기드온 자신은 그 바알 제단과는 상관이 없었다. 한 가정의 주장자인 부친의 우상 숭배에 그 아들 된 자로서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난관을 잘 돌파하였던 것이다.

"바알""아세라"에 대하여는 2:13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바알"은 소유자란 뜻인데 주로 농신(農神)을 가리킨다. "아세라"는 베니게의 여신상(女神像)으로서 골짜기에서 섬긴 우상이었다.

● 28,29,30,31절 -----------------------------------------------------------

이 부분에는 우상들을 파괴한 기드온의 처사에 대한 "오브라" 사람들의 박해가 기록되어 있다.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 (30) 오브라 성읍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려고 그의 부친에게 그를 내어 달라고 강요했다. 이에 대한 그의 부친 "요아"의 말은 매우 지혜로웠다.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 고 하였다(31). 여기 "죽음을 당하리라"고 한 그의 강한 말은, 그가 이미 바알을 위하지 않고 그 아들의 신앙에 가담하였음을 나타낸다. 그의 이 말은, 바알을 위하는 자는 참되신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을 것이고, 또 회개하였다고 추측된다. 기드온을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부친의 마음을 돌이켜 주셨다고 생각된다.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 이 말은 사실상 바알도 인정하는 중간주의가 아니고 하나의 풍자(諷刺)이다. 이것은 엘리야의 풍자식 변론과 같은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하였다(왕상 18:21). 왕상 18:27 참조.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였으니 - (32) 이 문구의 히브리어, "그 날에 그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으니"라고 개역돼야 한다. 여기 이른 바 "여룹바알", 바알은 싸워 보라, 혹은 바알은 싸울지어다(Let Beal fight.)란 뜻이다. ,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파괴하였으니 만큼 바알은 기드온을 대적하여 싸워보라는 뜻이다(C. Vonk De Voorzeide eer Ie, De Heilige Schrift, Richteren, 1973, p. 497). 이 이름은 영구히 바알에게 도전하는 의미가 있다. 기드온의 부친이 자기 아들에게 이런 이름을 준 것은, 자기들(父子)이 영구히 바알과 투쟁할 것을 선포함이다. 진정한 신앙의 용기는 정복력이 있다(요일 5:4).

33,34,35-----------------------------------------------------------

미디안과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에 기드온은 구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 구원 운동은 영적으로 올바른 순서를 취하였으니, 곧 이스라엘의 육신 구원 운동보다 먼저 자기 가정에 종교 개혁을 가져온 것이다(25-32).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러 가기 전에 그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과 같다(4:24-26).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 (34) 여기 "기드온에게 강림"이란 말은 기드온을 옷입혔다는 뜻인데, 곧 성령이 기드온을 완전히 점령하셨다는 뜻이다. 대상 12:18; 대하 24:20; 24:49 참조.

모여서 그를 좇고... 모여서 그를 좇고 - (34,35) 여기 이른 바 "모여서"란 말"전쟁에 불리움"(called to battle)을 가리킨다(Burney). 이 때에 전쟁에 불리운 자들은 다 기드온의 보낸 사자들을 좇아 그에게로 집합되었다. 우상주의가 팽창하던 그 때에 이같이 순조롭게 하나님의 종을 중심하여 모이게 된 것은, 기드온에게 충만히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일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서 강단을 맡은 종들이 먼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말씀을 선포할 때에 뭇 심령은 그리로 모여든다.

36,37,38,39-----------------------------------------------------------

기드온이 다시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였는데 그것은 아직 그의 믿음이 약한 증거이.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장점도 알려진다. 그것은, 그가 그 전쟁에 하나님만 믿고 나서겠다는 결심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 청원은 의심이 아니고 그의 육적 심리의 연약을 고치기 위하여 초자연적 표적을 요구함이다. 이렇게 더 잘 믿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간섭으로써 그의 믿음을 견고케 해 주신다.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 (37) ""은 성경에서 생기와 위안을 주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능력을 상징한다(Delitzsch). 이때에 기드온의 기도대로 이슬이 양털에만 흠뻑 내리고 그 주위의 땅에는 전혀 내리지 않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이스라엘에게만 주시고 그 때 다른 나라에는 주시지 않을 것을 상징한다.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 (39) , 이스라엘은 약하고 힘도 없는데 주위의 다른 나라들은 강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된 것도 하나님의 행사였다. 사실상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 그런 때에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었고(3:9, 15, 4:3, 6:7), 그는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기드온의 표적을 구한 기도는 잘못일까?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의 기원은 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아보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2) 표적을 보고자 하는 그의 기원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3) 그의 기원이 허망(虛妄)이 아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기적으로 응답해 주신 사실이 증명한다.

이와 같은 기적적 역사는 사람마다 기대할 것이 아니다. (4) 그의 기원의 목적은 하나님의 존재나 능력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받은 사명에 대하여 더욱 확신을 얻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계시 시대(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일어나던 시대)에는 신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신 일이 있었다. 그가 히스기야왕에게 나타내신 기적도 그와 같은 것이었다(38:7-8). 이적은 비교적 드물다. 특별히 교회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다. 만일 이적이 흔하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생긴다. (1) 사람의 뜻대로 이적이 얼마든지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적이 아니고 상칙(常則)이 됨. (2) 이적이 흔하게 되면 인간의 고난이 적어질 터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이 아님. 죄 많은 이 세상에 고난이 적으면 공의(公醫)의 법에 맞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이적으로 인하여 고난이 적어지면 신자의 신앙 인격이 연단 받을 기회가 별로 없게 된다. (3) 게으른 인간들은 무슨 일이나 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여 욕심으로 구하게 됨. 욕심과 허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응답을 받지 못 할 뿐 아니라(4:3), 마귀가 틈 탄다. 하나님의 기적은 결단코 인간의 게으름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진실인데 그 진실은 노력으로 증명된다.

하나님은 영적 이적을 많이 행하시기 원하신다. 영적 이적은 그가 말씀을 가지고 성령으로 은밀히 사람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여 그 심령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몸보다 영혼을 더 사랑하시는 참되고 영원하신 사랑이다.

[열왕기하 성경 좋은 말씀] 히스기야 왕의 생명 연장 하나님 말씀(왕하 20:1-21)

 

[열왕기하 성경 좋은 말씀] 히스기야 왕의 생명 연장 하나님 말씀(왕하 20:1-21)

열왕기하 20장 성경 좋은 말씀은 히스기야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주시고 15년의 생명을 연장해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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