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복음 안에 자유함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도 책망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원래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율법적인 행위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식사를 해도 괜찮습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했다는 것을 예루살렘 총회에 보고할까 봐 그 자리를 피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생활을 하면서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유해져야 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갈 2:1-21)
1-10절, 우리가 가진 자유
[1절]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사도 바울은 14년 후에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을 말한다. 이 일은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가리킨 것 같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수리아 안디옥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크게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고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냈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이 변론한 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등의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아마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고 또 디도를 데리고 갔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에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원사도들에게 소개한 자이며(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이며(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이며(11:25-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자이었다(13:2-3). 디도서의 수신자인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3절)과 그레데에 남아서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딛 1:5) 외에는 성경에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2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안디옥 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논쟁 때문이었지만(행 15장) 또한 하나님의 계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 논쟁 중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직접 지시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받은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그가 그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예루살렘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 즉 예수님의 원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같은 지를 대조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일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잘못된 내용을 전파하고 있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믿고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바로 그 복음, 임을 확인하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규례이었다. 그것은 남자의 생식기를 덮은 피부(foreskin, 양피, 포피)의 끝을 잘라내는 의식이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만 했다. 이것은 율법에 규정된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이었다. 율법을 따른다면, 디도도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새 언약 아래서 모든 사람은 할례와 관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의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하기 원했던 것 같다. 특히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그 논쟁의 시점에 바울은 디도를 데려감으로써 행동으로 그 진리를 증거 하려 했던 것 같다.
[4-5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던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이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비밀 첩보원처럼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킨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속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그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들어온 목적은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함이었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드러낸다.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와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 의식들, 제사 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이다.
물론 그 자유가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게 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 하지 말고 거짓 증거 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의를 이루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가만히 들어와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거짓 형제들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유대교인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이었다. 그들은 주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 거짓 형제들을 알아차렸고 그들에게 한 순간이라도 복종치 않았다. 잠언 25:26은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말한다. 진리를 가진 자는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 앞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6-9절]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8절은 문맥상 삽입적 의미를 가지며 어떤 영어성경들은 8절을 괄호 안에 두었다(KJV, NASB). ‘유명한 이들’은 예루살렘의 원사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자보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자매이며 한 식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원사도들은 사도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계시로 주신 복음은 충족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사도들에게 주셨던 그 동일한 복음 진리를 바울에게도 주셨다. 사도 바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출한 그 복음의 내용은 바로 열두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바로 그 복음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으로써 그의 복음에 어떤 수정이나 보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이 증거되었을 뿐이다. 그들 상호간에는 교리적 일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고 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이 교제의 악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과 사도 베드로의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다른 말로, 이 교제의 악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것을 증거 한 것이다. 이렇게 확인된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이 세상에 없으며, 그 후 시대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복음만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과 소망이 된다.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다면 단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1:29에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들어 유대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보내는 일이 있었다. 사도행전 15장 때에도 유대에는 가난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구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전부터 자신도 그 일을 힘써 행하여 왔다고 증거한다.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며(신 15:7-11)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이다(고후 9: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오늘 본문의 요점은 사도 바울이 증거 한 복음의 내용이 사도 베드로가 증거 한 복음의 내용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제의 악수’로 상징되었다. 오늘날 불신앙적 신학자들은 성경 안에 다양한 신학들이 있고 그 신학들 간에는 때때로 갈등과 심지어 모순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결코 사도 베드로의 복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복음 진리, 그들이 전파하고 가르쳤던 복음 진리는 동일하였다. 이 성경적 복음만이 오늘도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이 된다.
또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다. 그것은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한 바울의 행동에서 증거되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모든 율법주의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물론 이 자유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자유는 아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주신 참 자유, 곧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누려야 한다.
11-16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
[11절]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그를 책망할 일이 있었다. 안디옥은 이방인들을 위해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던 교회가 있었던 수리아 지방의 한 도시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한 목표는 책망받을 일이 없는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화의 목표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단번에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격적 성숙은 예수님 믿기 전에 그가 살아온 상태와 관계가 많은 것 같다. 성화는 매우 더디게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히 믿는 자들 속에도 인격적 흠과 결함이 많이 있다. 대체로 사람이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알고 있지만, 종종 자기의 부족을 모르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참 큰 문제이다.
인격적 결함 중 대표적인 것은 말의 실수이다. 인격의 온전함은 말의 온전함으로 나타난다(약 3:2). 사람이 말을 안 하면 실수도 없을 것이지만 괜히 말을 함으로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말에 대해 많이 가르쳤는데, 그것은 우리가 말의 온전함으로 인격의 성숙함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잠언 10:19-20,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베드로의 실수는 말의 실수가 아니고 행동의 실수이었다. 3년간이나 주께 직접 배웠고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복음 진리를 밝히 이해하고 고난을 무릅쓰고 증거 했던 베드로는 인격적으로 상당히 성숙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게 실수가 있었다. 땅 위에 온전한 인격자는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부족이 있다. 지상에서 완전 성화란 없다. 성도의 성화가 심히 더딘 것이 현실이다. 베드로에게 책망할 일이 있었을 때 바울은 그의 앞에서 그를 책망하였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 앞에서 아부하고 뒤에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지만, 사람 앞에서 바른 충고를 아끼지 않고 뒤에서 그를 존중하고 함부로 그를 비난치 않는 것이 좋은 인격의 모습이다. 사람 앞에서 그를 공의와 겸손으로 책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훌륭한 행동이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잠 27:5-6).
[12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자 그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은 율법과 유대인의 관습에 젖어 있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말아야 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행 10:28).
이것은 구약의 율법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일을 금한 곳이 없다.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 유대인의 관례법은 음식에 대한 법이나 우상숭배를 금한 계명, 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한 법(신 7:3-4) 등에 근거한 것 같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이 왔을 때 그들을 두려워해 떠나 물러갔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공격할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드로가 떠나 물러간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약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두려워함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받기를 싫어하고, 싸움과 갈등보다는 평안과 안정을 좋아한다.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뿐 아니라,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바울의 동료인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다.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외식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이 정당한 일이었다면, 그는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다. 반대로, 그것이 유대인들 앞에서 할 수 없을 정도로 옳지 않은 일이었다면, 그는 그들이 없었을 때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과 충성을 원하시지만, 연약한 인간은 때때로 외식의 죄에 빠진다.
베드로의 연약함은 그 혼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물러가자 함께 먹던 유대인들도 같이 물러갔다. 거기에 함께 있었던 바나바까지도 그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임자의 역할이 큼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만일 베드로가 그때 외식하지 않고 담대히 처신하였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연약하여 외식하므로 다른 사람들도 외식에 빠졌다. 신앙생활에는 앞선 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계가 혼란한 시대에는 바른 사상과 분별력과 인격을 구비한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지교회 안에서도 목사와 장로의 역할, 교사와 권찰의 역할, 각 회 회장의 역할이 크고 중요하다. 그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모범이 되면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만, 그들이 본이 되지 못하면 해를 끼친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말하며, 부덕한 것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일꾼들은 믿음에 바로 서서 덕을 세우는 자, 즉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14-15절]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베드로]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도 베드로의 외식적 행위는 복음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실수이었다. 복음 진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이방 죄인’이라는 표현은 이방인들이 본래 죄인이었음을 보인다. 이방인들은 본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우상들을 섬기며 살았고 도덕적으로도 여러 가지 더러운 죄악들 가운데 파묻혀 살았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옛날부터 관리들은 탐욕적이고 부패하였고 가난하고 비천한 상민들은 고통과 눈물과 서러움이 컸다. 또 아내들이나 종들은 구타와 학대를 당하여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고 며느리들은 종들처럼 가정 일을 해야 했다. 이방 사회에 참으로 진실과 공의와 정직, 사랑과 선이 지배한 때는 한번도 없었을지 모른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본절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이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이 모든 죄악된 처지 곧 죄인의 신분과 법적 책임, 그리고 죄성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본래의 의롭고 선한 모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을 말한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그러나 세상에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참된 의인은 하나도 없다. 바울은 로마서 3:11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했고, 로마서 3:20에서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본절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과 같다.
또 로마서 3:21-22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다.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없이’라는 뜻이다.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과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 곧 구약시대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에서 암시된 바이었다. 또 이 구원의 방법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방법이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왜 예수님만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은혜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제사제도를 통해 암시되었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3:24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는 말씀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바로 아는 자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복음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해야 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고 예수님 믿는 모든 사람은 형제자매이며 한 식구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모든 믿는 성도들을 존경하고 사랑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바로 깨닫고 우리의 삶의 새로운 동기를 발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수치와 참혹한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에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고, 또 모든 악을 버리고 거룩과 의, 선과 진실을 지키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7-21절,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의(義)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킨 것을 의미한다. 의는 무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완전이다. ‘의롭게 한다’는 원어(디카이오오)는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뜻이다. ‘의롭게 되려 하다가’라는 말은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라는 뜻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이라는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만 믿고 그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줄 알았다가 그것이 아니었다면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은 진리이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계시해주신 내용이며 만일 이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죄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 될 것이다.
[18절] [이는]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것임이니라].
‘내가 헐었던 것’이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생각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것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세우면’이라는 말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면’이라는 뜻이 된다. 만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하면, 그는 죄인이 될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고 그 주장이 틀린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절] [이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죽었음이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향해,’ ‘율법을 향해’라는 말은 원문에서 관계성을 나타낸다(데오, 노모--관계의 여격).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과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기 위하여”라는 뜻이며, 또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 곧 율법의 계속된 정죄, 누적된 정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정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뭇박혔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가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이며 곧 우리의 죽음이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에서 ‘나’는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속했던 나, 곧 옛사람 나를 가리킨다. ‘산 것’이라는 말은 ‘사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제 나는 죄로 인하여 정죄되었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므로 옛사람 나는 이미 끝났다. 그것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정죄되었던 나, 곧 옛사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을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했다. 1930년대에 황국주 씨는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 . . . 전부가 예수화하였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모습을 흉내 낸다고 머리를 기르고 수염도 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판명되고 정죄되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도 개개인의 인격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옛사람 나는 이미 죽었고 나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속에 거하시므로, 이것은 마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것을,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물론, 믿음은 참된 회개를 동반한다.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또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고(요 1:12) 영생을 얻는다(요 3:16). 또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성도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아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디카이오쉬네)[의(義)]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죽으셨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인을 구원하심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였고 지금 그것을 변증하고 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써이다.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게 즉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될 수 없다. 성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또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다. 의 혹은 도덕적 완전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올 수 없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써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의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는 의,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성도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도에게 복음 신앙이 없다면 성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도리는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주시는 영생과 내세와 천국을 확신케 하는 근거이다. 이것은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며 기쁨과 평강을 준다.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할 것이다. 성도는 이런 확신과 담력, 이런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한다.
[시편 2편 히브리어 강해설교말씀] 하나님이 세우신 왕 예수님(시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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