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장에서 예수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회의 상황에 따라서 칭찬과 책망을 듣게 됩니다. 일곱 교회는 현재 우리가 믿음 생활하고 있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상황에 따라서 주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책망받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 말씀(계 2:1-29)
요한계시록 2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들의 목사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그것은 첫사랑을 회복할 것, 죽도록 충성할 것, 순결성을 지킬 것 등을 강조한다.
1-7절,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3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 . . .
요한은 주의 말씀을 계속 전한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케크메카스)[피곤하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3장에 일곱 번 나오는 ‘편지하기를’이라는 원어(그랍손)는 ‘편지하라’는 명령법이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각 편지는 그 교회의 사자, 즉 목사에게 보내졌다. 목사는 교회를 인도하는 자이다. 마치 목자가 양무리를 인도하듯이, 목사는 하나님의 양무리인 교회를 인도한다. 장로들은 이 일에 목사와 협력한다. 그러므로 목사가 바로 서면 교회는 바로 설 것이고, 목사가 잘못되면 교회가 잘못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신다. 그는 목사를 세우실 능력도, 폐하실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주권적 섭리자이시므로 자기의 원하시는 바를 다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잠잠히 그의 하시는 일을 보며 오직 그를 의지해야 한다.
전지하신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선한 행위들을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주께서는 그의 믿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 때때로 다른 이들은 우리의 중심을 모를지라도 주께서는 아신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목사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였고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은 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하는 힘든 일이요 낙심하기 쉬운 일이지만, 그는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잘 참고 피곤하지 않았다. 주께서는 그의 선하고 충성된 행실을 기억하고 계셨다.
[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잘 한 일도 인정하시지만, 현재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책망하신다. 그것은 그가 처음 사랑을 버린 일이었다. 그가 처음 사명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주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의 복음 진리를 전하고 지키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참고 성실하였으나, 지금은 처음에 가졌던 그 사랑과 그 열심과 그 성실함을 버렸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지금 주를 진실히 사랑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의 일을 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
주께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물론 근본적 회개는 사람의 일생에 한 번만 있다.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던 사람이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가 그것이다. 그것은 단회적 성격의 회개이다. 이것이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이다. 아직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눅 13:3, 5), 곧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이런 회개를 한 자도 어떤 구체적 죄 가운데 빠졌을 때 그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이런 회개는 반복적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는 죄인 속에 반드시 회개와 믿음을 일으킴으로써 구원하는 은혜인 것이다.
주께서는 그에게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네게 임하여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촛대를 옮기는 것은 교회를 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의 교회, 그러나 그 도시에서 신사 참배를 가결했던 그 교회를 폐하신 것과 같다. 그것은 무서운 경고이다.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선한 점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이었다. 니골라당은 14-15절에 있는 대로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자유를 왜곡하고 남용하였던 것 같다. 주의 참된 종들은 이단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주 예수의 말씀은 곧 성령의 말씀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교회들에게, 즉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사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탄과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된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은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지는 자, 곧 죄에 지고 사탄과 세상에 지는 자는 영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영생을 얻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요한일서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편에서 성실히 노력하는 것을 통해 된다. 진실히 믿고 순종하는 자는 이긴다. 우리는 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1절부터 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래 참고 선한 일을 힘쓰고 수고하고 피곤해지지 말자. 다른 사람은 우리의 중심을 몰라주어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고 낙심치 말고 선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 충성하자.
둘째로, 우리는 범죄한 일을 깨달으면 즉시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어떤 특정한 죄를 지으면 그 죄를 고백하고 버리고 바른 길에 서야 한다. 우리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사탄과 세상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버려야 하고 멀리해야 하고, 사탄과 악령의 시험과 장난을 분별하고 대적해야 하고, 세상의 악하고 음란한 풍조를 배격해야 하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특히 처음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에는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 우리의 사랑과 열심이 식어져 있다면 주님의 큰 책망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일에 힘쓰자.
8-11절,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8-9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처음이요 나중[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전통사본)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
주께서는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만 참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 분만 온 세상을 주관하신다. 또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인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 우리가 그를 위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다시 살리실 수 있고 참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활의 주께서는 고난 받는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큰 힘과 위로와 소망이 되신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 목사의 계명 순종과 충성의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아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계명 순종과 충성을 아신다. 또 주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궁핍을 경험할 것이다. 사도행전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디모데후서 3:14,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비록 서머나 교회의 목사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평가하셨다. 인생의 참된 부요는 물질적인 데 있지 않고 영적인 데 있다. 물질적인 가치는 일시적이지만, 영적인 가치는 영원하다.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었다(눅 12:21). 또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영적으로 부요한 경우가 많다.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위로로 삼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며 사는 자이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을 받았다. 구약 교회는 매우 타락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또 주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핍박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구약 교회인 유대인들의 모임은 실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사탄의 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죽이고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이 어떻게 참 교회에 속하겠는가? 그들은 분명히 사탄의 회에 속한 자들이었다.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아야 하였다. 고난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신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자.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서머나 교회에는 장차 10일 동안의 환난이 있을 것이며 마귀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다. 그 교회의 목사가 견고히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시험과 환난이 있을 것이다. 10일 동안의 환난은 서머나 교회에게 닥칠 문자적으로 10일간의 환난이든지 혹은 상징적으로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은 영속적이지 않고 지나가는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 ‘충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참 충성은 죽기 전까지는 증명될 수 없을 것이다. 충성은 죽음을 통해 참으로 증명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구원받은 성도들]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사탄]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순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확실한 표이다. 물론 참 하나님, 곧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그의 뜻을 위한 순교와 충성만이 의미와 가치가 있다.
주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종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생명의 면류관은 면류관의 종류 중 하나라기보다 생명의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생명이라는 뜻일 것이다. 죽기까지 참된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는 자는 영광스러운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 충성치 않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지 않는다.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에게는 영생의 영광이 약속되지 않는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주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주의 음성 곧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기는 자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는 지옥 형벌을 말한다(계 20:14; 21:8).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해 충성치 않고 순종치 않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구원은 반드시 믿음과 인내, 그리고 순종과 충성의 삶을 동반한다.
8절부터 11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구하지 말고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구하자.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일시적 가치를 가질 뿐이며, 영적 부요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 영생은 백 년의 세상 생활과 비교할 수 없이 복되고 영광스럽다. 천국은 온 세상과 바꿀 수 없는 보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과 믿음, 천국 소망, 그리고 하나님과 교회 사랑에 부요한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환난과 순교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자. 충성은 참 믿음의 증거이다. 그것은 이기는 자가 되는 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다가 죽으면 우리는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세상은 단지 우리의 육신적 목숨만을 위협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자.
12-17절,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2-13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께서는 자신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묘사하셨다. 1:16에서는 그 검이 입에서 나온다고 표현되었다. 그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예리한 말씀, 즉 죄를 지적하여 영혼을 회개시키는 말씀을 가리킨 것 같다. 물론 그 말씀이 악인을 죽이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칼과 같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주께서는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영적 전쟁에서 그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진리 운동은 영적 전쟁과 같다. 마귀와 불신앙과 비진리를 대항하여 싸울 이 전쟁에서 우리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주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셨듯이, 오늘 우리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버가모는 사탄의 위가 있는 곳, 곧 우상숭배의 총본부와 같았다. 거기에는 제우스 신의 신전과 아테네 여신의 신전과 디오니소스 신의 신전 외에, 뱀 모양의 의술의 신 에스큘라피우스 신의 신전이 있었고, 로마 황제 아구스도를 숭배하는 신전도 있었다고 한다. 황제 숭배는 초대교회 시대에 보편적 풍조이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회를 혼란시켰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믿음과 순종의 행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에 굳게 선 사람이었다. 그는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았고 주의 충성된 증인 혹은 순교자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순교자 못지않게 충성된 자일 것이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사람이었고 주께서는 그의 믿음과 행위를 아셨고 그를 인정하셨고 칭찬하셨다.
[14-15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책망도 하셨다. 우리에게 칭찬거리가 있으면 주께서 우리에게 칭찬하실 것이지만, 우리에게 책망거리가 있으면 그는 우리에게 책망도 하실 것이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책망은 그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발람의 교훈은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미혹하는 한 방책을 일러준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며 그 신들에게 제사한 제물을 함께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민 25:1-3). 그 범죄는 발람의 조언에 의한 것이었다(민 31:16). 이와 비슷한 교훈이 버가모 교회 안에 들어온 니골라당의 교훈이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자들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가 경계해야 할 우상숭배는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와,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 숭배와, 종교다원주의의 이방종교 관용이다. 우상숭배의 용납은 하나님께 책망받을 큰 잘못이다. 오늘날 교회는 또 음행을 경계해야 한다. 현대 사회와 문화는 심히 음란하다. 오늘날 교회에는 심지어 동성애와 동성애자 결혼, 그리고 동성애 목사까지 용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목사는 바른 교훈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인들을 그 교훈대로 살도록 지도하고 관리해야 한다.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교회 안에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는 자들을 용납하는 것은 교회의 목사가 회개할 죄이었다. 만일 목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께서는 그 교회에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교회가 권징을 회피한다면 주께서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교인들 중에서 죄지은 자들에게 직접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주께서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신다는 말씀을 보면 주의 입의 칼은 심판의 칼인 것처럼 보인다. 주님의 직접 개입은 목사에게 큰 수치가 될 것이다. 그의 목회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목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상급은 크게 감소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전에 그는 교인들을 바르게 관리하고 필요할 때 적절한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만나는 천국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시편 78:24-25,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주님과 누릴 사랑의 식탁 교제를 가리킬 것이다. 또 흰 돌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옛 시대에 흰 돌은 운동 경기에서 이길 때에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 시에나, 큰 잔치에 입장할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과연 장차 우리가 받을 흰 돌은 그런 의미들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그 흰 돌은 세상에서의 영적 싸움에 승리한 자들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無罪) 혹은 의롭다 하심의 판결을 받을 자들과,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 잔치에 참여할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기록될 것인데, 그것은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새 이름은 천국에서 사용될 우리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릴 복된 신분과 영광을 나타낸다.
12절부터 1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탄의 위가 있는 곳,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곳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장차 임할 대환난 시대에 대비하여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악을 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교리적인 혹은 윤리적인 악을 분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악을 정죄하면서 악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며 주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8-29절,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8-19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행위]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의 날카로움을 나타내시며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한 것은 그의 심판의 엄위함을 나타내신다고 본다.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이런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주께서 그 목사의 문제점을 통찰하시고 그가 포용한 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시며 우리의 행위들을 판단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먼저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셨다. 그 목사는 주께 칭찬 들을 일을 많이 했다. 그는 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고 주를 사랑했고 믿었고 섬겼고 인내했다. 이것들은 다 좋은 점들이었다. 우리도 주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주를 참으로 사랑하고 믿고 섬기는 자 되기를 원하며 또 환난 중에도 오래 참는 자 되기를 원한다. 또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나중 행위가 처음 것들보다 많았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꾸준히 주를 믿고 섬겼으며 점점 더 열심히 주를 믿고 섬겼다.
[20-21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네 아내]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진실히 주를 믿고 섬기는 목사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 그의 문제점은 버가모 교회 목사의 문제점과 같이 잘못된 자를 포용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그의 아내 이세벨을 용납하였다.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의 아내는 선지자로 자처하였을 뿐만 아니라,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자이었다. 그 여자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제물을 먹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이 죄악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 성경을 믿는 많은 주의 종들도 포용주의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많은 목사들이 자유주의 신학들과 천주교회를 포용하거나 심지어 동성애 같은 악을 포용하고 있다. 주께서는 동일하게 그들에 대해서도 책망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믿을 기회를 주신다. 그들은 그 기회에 지체하거나 고집을 부리지 말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었을 것이다. 교회 속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회개치 않는 죄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들을 보면 낙심할 것이 아니고, 힘써 권면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그런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22-23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그[그 여자]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께서는 두아디라 교회 목사 사모에게 징벌을 선언하셨다. 첫 번째 징계는 그를 침상에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병상에 눕게 하심을 가리킨다. 두 번째 징계는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징계는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공의의 징벌이다. 이로써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죄는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신다. 주 앞에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모든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는 오늘날에도 공의로운 징계의 채찍을 드실 것이다.
[24-25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셨다. 오늘날에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안에 사탄의 은밀한 활동들이 많은 줄 안다. 현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 속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끝까지 속죄 신앙과 개혁신앙을 지키고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기를 원한다.
[26-29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심판 권세이다. 요한계시록 12:5에는 예수님 자신이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주께서는 이 권세를 성도들에게도 어느 정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고린도전서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또 주께서 약속하신 새벽별은 주님의 영광의 빛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표현하셨다(계 22:16).
18절부터 2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의 선한 행위와 사랑은 처음 믿었을 때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자라고 풍성해져야 한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앞으로 전진하는 신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가족들 중에 있는 악이라도 용납하지 말고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음행과 우상숭배를 경계해야 한다. 모든 악의 포용은 교회를 부패시킨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셋째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굳게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밝히 계시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키자.
[갈라디아서 2장 성경 좋은 말씀] 복음 안에 있는 자유(갈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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