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백부장의 종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또한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려 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시몬의 집에서는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서 예수님께 붓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죽었던 자들을 살려주셨습니다.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적들을 행하심(눅 7:1-50)
1-17절, 죽을 자와 죽은 자를 살리심
[1-3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 . . .
예수께서는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기를 마치신 후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과, 시몬의 집에서 중한 열병으로 아파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과, 해 질 때 집에 모여든 여러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하였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었다. 그는 로마 사람이었다. ‘사랑하는’(엔티모스)이라는 원어는 ‘소중히 여기는’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이다. 충성된 종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병이 들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 종은 결국 고침을 받았다.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다. 물론 그 종도 주인에게 충성했겠지만, 그 주인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이 백부장은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5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 . .
4-5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였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두 번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과 사랑이 가는 곳에 돈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돈을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 . . .
예수께서 함께 가실 때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그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고백한 것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네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뜻이 있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는 원문의 전통본문은 ‘말씀만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이다. 자기가 군인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면 그가 순종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씀만 하소서’라는 그의 말은 결국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칠 수 없다. 병을 지배하고 병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 한마디로 빛을 창조하셨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치실 수 있다.
[9-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 . . .
예수께서는 들으시고 그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셔서 따르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이만한 믿음’이라는 원어는 ‘이렇게 큰 믿음’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외적인 영광을 보고 경탄하신 적은 없으셨지만, 백부장의 이 큰 믿음을 보고는 놀라셨다. 더욱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렇게 큰 믿음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말씀을 보면, 그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인 그가 이렇게 큰 믿음을 소유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주기를 원하시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은혜를 주시는 것이 분명하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아팠던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다.
본문이 증거하는 중심 인물은 백부장이나 그의 종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백부장이 가진 지식과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바로 그 주님이시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병에게 명령하실 수 있고 병을 고치실 수 있고 과연 고치셨던 신적 구주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집에 가시지도 않았다. 그는 그의 소원대로 단지 말씀만 하셨다. 그러나 그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은 그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그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하여졌다.
[1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 . . .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때 그의 많은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였다. 나인성은 갈릴리 지방 남부 이스르엘 평원의 한 작은 마을이다. 가버나움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이다.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을 ‘그의 많은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로’ 표현한 것은 그 둘을 구별하는 뜻이 있어 보인다. 예나 오늘날이나 예수님 곁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그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의 진리를 구하는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단순한 호기심을 가지고 따르는 무리이다.
[12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 . . .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 있었다. 그는 그 어머니의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는 과부이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도 그와 함께 나왔다. 이 장례는 매우 슬프고 불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외로운 과부에게 위로와 소망과 의지이었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장례식이었기 때문이다. 긍휼과 능력을 지닌 예수께서 그 광경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다.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장례식에 참여하여 죽은 자를 묻기 위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인간의 일들 중에서 장례식은 큰 일이며 엄숙한 일이다. 이 불행스런 장례식에 사람들은 동정하는 마음으로라도 더 많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실 놀라운 기적을 볼 것이며 그 기적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기적은 한적한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서 저자인 누가가 예수님을 ‘주’(호 퀴리오스)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행하실 기적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 ‘주’라는 말은 세상의 주권자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진 주님이시다. 주께서는 슬프게 울고 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이다. 죽음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형벌로 왔으나, 예수님은 죽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는 그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말로만 그를 위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그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인간들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수 있다. 오직 신적 구주께서만 그렇게 할 수 있으시다.
[14절]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 . . .
그는 가까이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셨다. 당시의 관은 오늘날의 것과 같은 관이 아니고 일종의 침대 같은 것이었을 거라고 한다. 주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 관 혹은 침대에 손을 대시자 그것을 멘 자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낸다. 구약시대에 엘리야나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린 적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그 기도의 응답으로 기적을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로, 말씀 한마디로 기적을 행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15절]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 . . .
그 죽었던 청년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고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주셨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그 후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 살아난 청년이 ‘말도 하였다’는 것은 그가 확실히 살아났음을 증거한다. 이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으셨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그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16-17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 . . .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말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했다. 그 과부의 기쁨과 받은 위로는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백부장의 죽을 병이 든 종을 고쳐주셨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면, 이런 병고침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또 그는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다. 그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 살려주셨다. 이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우리의 부활의 보장이 되셨다. 그는 죽은 그 청년에게서 죽음을 내쫓으시고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 사건은 장차 주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보장이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죽은 자를 살리셨을 뿐 아니라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장이 되셨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그 백부장이나 그 과부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셔서 영광스런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그는 죄와 슬픔,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셨고,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자.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이다. 또 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었다. 그는 예수께서 한 마디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나을 것을 믿었다. 또 그는 예수께서 누추한 자신의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겸손히 생각하였다. 물론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믿음을 사모하자. 오 주여, 우리에게도 이런 큰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셋째로,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배우자. 예수께서는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이런 마음을 품고 살기를 원하신다. 백부장도 자기의 종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고 그 종이 병고침을 받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예수께 보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한다(엡 4:32).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배우자.
18-35절,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심
[18-20절]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 . . .
요한의 제자들은 이 모든 일들, 즉 예수께서 백부장의 종의 죽을병을 고쳐주신 일과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 일 등을 그에게 고하였다. 그때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힘을 들으시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었다(마 4:12).
세례 요한은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을 듣고(마 11:2) 그의 제자들 중 둘을 불러 예수께 보내어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께 나아가 말했다.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오실 그이’는 메시아를 가리켰음이 확실하다.
세례 요한이 왜 제자들을 보내어 이런 의심 어린 질문을 하게 했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주석가들은 요한이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려고 한 것뿐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질문의 내용이 두 번이나 반복된 것과, 22절에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고하라’는 말씀과, 23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보다 요한에게 주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요한은 옥중에서 예수님에 대해 일시적으로 의심이 생겼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하여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21-23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 . . .
마침 그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셨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들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것들 외에도 많았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요한복음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에 소경의 눈이 밝으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하였었다(사 29:18; 35:5-6). 예수께서 중풍병, 나병,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등의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한다. 그의 행하신 기적들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확신을 줄 만한 증거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치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
[24-25절]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 . . .
요한의 보낸 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들판의 갈대를 가리킬 수도 있으나 마음에 믿음이 없이 의심하는 사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곳으로 나아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었다. 그때에 요한은 확신이 없거나 의심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확신에 넘친 자이었다. 또 그는 외모를 치장하거나 남의 칭찬을 구하는 자도 아니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옥중에서 잠시 연약하여져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고난의 현실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다.
[26-28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큰 선지자](전통본문)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요 큰 선지자라고 증거하셨다. 요한은 구약 말라기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께서 메시아 앞에 보내실 그 사자이었다. 세례 요한은 구약 선지자들 중에 가장 큰 선지자이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하였고 그에게 세례까지 베풀었고 백성들에게 그가 어떤 분인지 소개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특권을 가진 자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연히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마태복음 11:12-13,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여기의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다니엘 2장의 예언이나 예수님의 천국 비유 등에 비추어 볼 때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분기점에 서 있었다. 신약교회의 지극히 작은 성도가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신약 성도들은 이 점에 있어서 구약 성도들보다 그리고 세례 요한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고 있다.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충분히 듣고 배우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9-35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 . . .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였으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하였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대 사람들을 장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셨다. 그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부는 데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는 데 너희는 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심히 자기중심적인, 주관적인 판단과 불평과 원망이며 부당한 비난이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세례 요한에게나 예수님에게 그런 부당한 판단과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불평과 비난만 일삼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지혜는 잠언 8:22-31의 비유처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그의 모든 자녀들은 신약교회의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과 평가를 가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오실 그이,’ 곧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 있는 동안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겼던 것 같고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묻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마 1:1)이시며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신 증거는 그의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하심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소경과 앉은뱅이와 나병환자와 귀머거리 등을 고치시는 것을 언급하시며 대답을 대신하셨다. 그것은 그것들이 그 증거라는 뜻이다. 또 그의 부활하심은 그의 메시아이심의 마지막 확증이다. 그것들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그는 의심하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된 특권을 감사하며 성심으로 주 예수를 따르자.
36-50절, 많은 죄를 사함 받은 한 여인
[36-39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 . . .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음식 드시기를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것 같다. 남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앉으셨다’는 말은 ‘기대어 누우셨다’는 뜻으로 옛날에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는 것을 가리킨다. 식사 초청을 받을 때에 거절하지 않고 응하는 것도 사랑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다. ‘죄인인 한 여자’라는 말은 그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인물이었음을 보인다. 그는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온 것은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고 부끄러워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가 무슨 죄를 지은 자인지는 모르나, 그는 양심에 거리끼는 죄를 많이 지었고 사람들의 지탄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기적 행하신 일들과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신 일 등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심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가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신 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는 표이었다. 또 눈물로 적신 예수님의 발을 자기의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고 예수님을 지극히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행동이었다. 그 여자가 자기 죄를 철저히 뉘우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즉 신적 구주로 믿고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이 광경을 보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 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은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그 여자가 어떤 자인지 모르고 계시다고 생각하였다.
[40-4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 . . .
식사 초청을 한 그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신적 구주이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 대해서도 또 시몬의 속마음도 다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그가 말하였다. “선생님, 말씀하소서.”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깨닫지 못하고 선생님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다고 하셨다. 그는 사람의 죄를 빚에 비유하셨다. 어떤 이는 500데나리온의 빚을 졌고 어떤 이는 5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는 것은 사람들의 죄의 크기와 정도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보인다. 모든 죄가 사람을 지옥에 들어가게 할 만하지만, 죄의 크기와 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으며,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다(창 13:13; 요 19:11). 죄들 중에는 무지해서 실수로 짓는 죄가 있고(레 4:2, 22) 고의로 뻔뻔스럽게 짓는 죄도 있다(민 15:30).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큰 죄이다. 죄들 중에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나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마 12:32; 요일 5:16).
[42-43절]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 빚진 자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였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주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다. 물론 죄의 크기에 따라 용서의 크기도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죄 용서의 크기에 따라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기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죄가 본질상 지옥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일진대 우리의 죄 용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그의 긍휼의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 던지워 고통을 당해야 마땅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커야 하겠는가! 영원한 지옥 불못으로부터의 구원의 값을 그 무엇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44-47절]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 . . .
예수께서는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는 그를 식사 자리에 초청한 시몬과 그 여자를 비교하셨다.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 초청하고도 당시의 예절대로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눈물로 주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시몬은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의 표로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주께서 들어와 앉으셨을 때부터 그의 발에 계속 입맞추었다. 시몬은 예수님께 그 흔한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그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주의 발에 부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한 시몬과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그 여자의 행위는 너무 차이가 컸다.
예수께서는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적게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주님을 향해 극진한 존경과 사랑을 보인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표시이었다. 그러나 죄 용서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주님을 적게 사랑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죄사함의 원인은 아니나 증거는 된다.
[48-50절]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 . . .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죄사함의 선포는 주님의 가장 은혜로운 사역이다. 죄는 사람을 고생과 불행, 죽음과 영원한 멸망으로 이끈다. 또한 죄인이 가지는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고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죄사함의 선포는 죄인에게 가장 큰 복이다. 죄사함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 즉 성화(聖化)의 기초와 원동력이다.
함께 앉은 자들은 속으로 말하였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람의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일이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그는 전에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5:24). 예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지신 구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여자가 받은 죄사함의 구원에 대해 증거하셨다. 사람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여자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나아와 회개와 감사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고 자신을 낮추도록 했고 하나님과 구주를 극진히 높이며 사랑하게 했다. 또 죄는 사람에게 슬픔과 불행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죄사함의 구원은 참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참 평안은 주께로부터만 온다(마 11:28; 요 14:2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죄인으로 알려진 그 여자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있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구주가 필요치 않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자는 구주께로 나올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죄를 사하시는 구주이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구주이시며 구원의 핵심은 죄사함이다. 예수께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셋째로, 죄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의 크기는 죄사함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의 심각함을 깨달아야 한다. 불순종은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이며, 탐심도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며 마음으로라도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이다. 또 우리는 죄의 형벌이 죽음이요 영원한 지옥에 던지움이라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죄사함의 크기를 깨달을 수 있고, 또 이럴 때 저 여인과 같이 주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예수님의 말씀]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움(마 1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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