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 것을 지키려다가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것을 소유하려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움(마 19:1-30)
1-12절, 이혼에 대하여
[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 .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으로 올라가셨다. 그의 갈릴리 중심의 사역이 끝났다. 그에게 남은 사역은 유대 지방에서,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일들이다. 큰 무리가 그를 좇았고 예수께서는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
[3-6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 . .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말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주께서는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답하셨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셔서 결혼시키셨다. 결혼은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제도이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라는 말은 결혼이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뜻함을 보인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으로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부부간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심지어 부모-자식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7-8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 . . .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이혼법을 들어 반문하였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 법에서 ‘수치되는 일’(some uncleanness, 에르왓 다바르)이라는 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솸마이파는 그것을 부부관계의 불성실, 즉 외도(外道)와 음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르게 해석하였으나, 힐렐파는 그것이 남편 마음에 상하거나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하였다고 한다. 후자에 의하면, 아주 하찮은 구실로도 이혼이 가능하였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혼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결혼 제도의 뜻과 다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관계이다. 결혼 서약은 영속적 성격을 가진다. 사람이 그 서약을 파한다고 파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부당한 이혼들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혼란한가?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 . . .
주께서는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합당한 이혼은 상대방이 결혼 서약을 저버리고 음행한 경우이다.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정(情)을 통한 것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가장 참을 수 없는 일이며, 그 분노는 정당성을 가지며 그 경우 이혼이 허락된다. 그러나 부당한 이혼은 하나님 앞에 간음죄에 해당한다.
전통사본에 보면, 예수께서는, “또 그 버리운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부당한 재혼을 정죄한다. 즉 부당한 이혼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될 수 없으므로 부당하게 버린 자나 버리운 자와의 재혼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 후에는 재혼이 가능하다고 본다.
[10-12절]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 . . .
제자들이,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독신(獨身)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는 말은 “그것이 주어진 자들 외에는”이라는 뜻이다. 그들 중에는 날 때부터 고자(鼓子)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결혼이 불가능하거나 심리적으로 결혼을 원치 않는 자들이다. 또는 궁중의 내시들과 같이 사람들이 만든 고자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고전 7:7).
그러나 이 말은 받을 만한 자들만 받을 수 있다. 독신주의는 강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보통 결심을 넘어선다. 뿐만 아니라, 독신생활이 결혼생활보다 더 나은 생활방식이라는 생각도 잘못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결혼도, 독신도 복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 주지 않으시면 그 어느 쪽도 복되지 않을 것이다.
13-15절,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심
[13-14절]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 . . .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려왔다. 누가복음은 사람들이 ‘자기 어린 아기’를 데려왔다고 말했다(눅 18:15).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기 아이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기 아이들을 데려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오늘날도 믿는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을 예배 모임에 참석시킬 뿐 아니라,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받게 해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을 귀찮게 여겨 그들을 꾸짖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분히 여기셨다고 증거하였다(막 10:14).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는 어른들의 행동은 주님의 분노를 일으키고 책망을 받을 만하다. 주께서는 또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모든 어린아이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나, 믿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그러하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자들의 아이들은, 아직 신앙고백을 못하기 때문에 예수께 나올 수 없고 천국과 상관없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용납되고 환영을 받는다. 그들은 참으로 천국 백성으로 간주될 만하다. 여기에 구약시대로부터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했던 언약의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보인다. 믿는 가정의 아기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외인들이 아니고, 언약 안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간주된다. 그들이 커서 하나님을 배반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15절]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셨다. 마가복음에는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증거되어 있다(막 10:16). 그는 이처럼 실제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 된 우리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있고, 우리 믿는 어른들이 어떻게 교회에 나온 어린 생명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천국에서와 교회에서는 어른이나 어린 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아이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요 부족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를 귀히 영접하자.
16-22절, 한 부자 청년의 질문
[16-17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 . .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누가복음은 그를 ‘한 관원’이라고 말했다(눅 18:18).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달려와 꿇어앉아 말했다(막 10:17). 아마 많은 사람이 있는 길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진지함과 열심을 보인다. 전통 본문에 보면, 그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영생은 인간에게 가장 관심 있는 문제일 것이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전통본문에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과 같다.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선하지 않고 하나님만 선하시기 때문이며, 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단순히 한 선한 선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선한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의 내용을 반복하신 것뿐이다. 레위기 18:5는,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상 계명들을 지켜 영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계명들은 우리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롬 3:19-20).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된 후 그리스도께로 인도된다(갈 3:24).
[18-22절]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 . . .
그 사람이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는 십계명 중에 인간 관계에 대한 계명들을 주로 말씀하셨다. 사람의 죄성은 계명을 지키려 할 때, 또 지키려 할수록,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의(義)가 필요함을 깨닫게 만든다.
그 청년은 말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전통사본에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릴 때부터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되어 있다. 이 청년은 상당히 착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막 10:21).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요청은 그 청년의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이었다. 그의 문제는, 그가 그의 물질적 여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또 그가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는 비교적 정직하고 선하게 살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가난할 때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본문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말한다. 그는 겉으로는 착하고 진지하고 유망해 보였지만, 속에는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의 말씀을 참으로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물질적 애착의 극복 없이는 사람에게 온전함이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순종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들었지만,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돌아섰다.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는 영생의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섰다.
23-30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23-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동의어(同義語)로 쓰였고 그것들은 ‘영생’(16절)과 ‘구원’(25절)과도 동의어로 쓰였다. 주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으나, 그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것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보인다. 물질이 그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니다.
[25-26절]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 . . .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놀라며 말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욥도 부자이었지만(창 13:2; 26:12-14; 욥 1:3)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스스로 물질에 대한 애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예’ 하고 대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한 일에 쓸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물질적 부요는 신앙과 영적 성장과 성화에 걸림돌이 된다.
[27-29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 . . .
그때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백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마 4:20, 22). 오늘날도 전도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야 한다. 주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세상이 새롭게 될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를 그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그들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렸다면, ‘백 배’를 받고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백 배를 받는다는 말씀은 현세와 내세에서 받을 것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씀은 이런 헌신의 대가로 영생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이런 헌신이 영생을 얻는 확실한 표가 된다는 뜻일 뿐이다. 주님께 자신을 드린 자는 확실히 영생에 이를 것이다.
[30절]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주께서는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첨가해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먼저된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 되고 나중된 이방인들의 다수가 먼저 될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가 이방인 교회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신자에게는 믿은 연도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어떻게 믿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비록 늦게 믿기 시작한 자라도 믿음생활에 앞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하고 높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살며 계명들을 지키며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16-30절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뜻이며 어느 시대나 변함 없는 하나님의 뜻이다. 레위기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그의 계명들을 순종하자.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순종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 계명들을 순종치 못한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율법은 우리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셋째로, 우리가 참으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자라면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끊어 버려야만 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자신을 부정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고(마 10:24-26), 모든 소유를 버려야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다(눅 14:33). 주의 말씀대로, 재물의 욕심은 영생의 길을 방해하는 가시떨기와 같다(마 13:22).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성도의 바른 삶이다.
[역대상 10장 주석 성경말씀] 사울의 죽음(대상 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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