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장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원죄 가운데 죽어 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살 수가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셔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엡 2:1-22)
1-5절, 다시 삶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도의 과거의 상태는 한마디로 ‘죄로 죽었던’ 상태이었다. 여기에 ‘허물과 죄’란,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소위 ‘원죄’(原罪)와, 또 이 원죄의 죄악성 때문에 각 사람이 실제로 짓는 ‘자범죄’(自犯罪)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롬 6:23). 죽음이 죄의 형벌로서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처음 명령에 포함된 경고에서 이미 언급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6-17).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은 영적 의미이다. 구원받기 전의 모든 사람들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라도, 영적으로는 다 죽은 자이었다. 영적인 죽음이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 상태는 한마디로 무지와 부도덕의 상태이었다. 영적으로 죽은 모든 영혼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의와 선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영적인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므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다.
[2절]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구원받기 전에 에베소 교인들은 허물과 죄 가운데 살고 있었고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이 세상은 죄악된 세상이며, 세상의 삶의 방식은 곧 죄악된 삶이다. 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이다. 그는 세상을 주관하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 임금’이라고 표현하셨고(요 12:31) 바울은 그를 ‘이 세상 신’이라고 했고(고후 4:4) 요한은 온 세상이 악한 자[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증거하였다(요일 5:20). 사탄은 지금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서 활동하고 있다. 바울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어둡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하였다(고후 4:3-4).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믿음과 순종을 주시지만, 사탄은 사람들 속에 불신앙과 불순종을 일으키며 이 세상에 죄악된 풍조를 번성케 한다.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 가운데서’라는 말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에베소 교인들만 과거에 그러했던 것이 아니고, 바울의 일행도 그러했다. 우리 모두가 과거에 그러했다. 우리가 다 과거에 몸의 욕심을 따라 살았었다. ‘육체’라는 원어(사르크스)는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악된 욕심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돈에 대한 욕심, 이성에 대한 욕심, 세상 권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이다. 이것들은 다 세상적이요 죄악되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다른 죄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하나님의 진노! 요한복음 3:36도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이 왔다. 우리가 구원받은 원인과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었다. 다른 원인과 이유는 없었다. 우리 속에는 어떤 원인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무능력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했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렘 13:23). 사도 바울은 로마서 3:10-12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표현되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다(롬 5:8).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확증되었다.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구원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에게 영적 생명, 곧 새 생명을 주신 사건이다. 이것을 중생(重生, 다시 남)이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 생명이 되는 사건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었다. 우리의 부활은 먼저는 죽었던 영혼의 살아남 곧 중생(重生)이고, 그 다음에는 장차 주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우리의 몸의 영화로운 부활 혹은 변화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우리의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의미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다. 그것은 무지와 부도덕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의 낙을 누리던 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성경 읽고 기도하며 의와 선을 구하는 삶으로의 변화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을 인식하고 확신하고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의 권세 아래서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았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원인에 기인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기인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결과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고, 사탄과 악령들의 이끌림을 받지 말고, 몸의 죄악된 욕심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만일 우리가 계속 범죄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모든 죄를 버리고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고 선하게 드리기를 힘써야 한다.
6-10절, 은혜의 구원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5-6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신 것은 중생(重生)의 새 생명을 주시고 미래의 부활을 확증하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하시고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게 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은 우리의 구원과 그 특권에 대한 상징이요 성취요 확증이었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은혜를 나타내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피 흘리신 죽음은 순전히 죄인들을 대신하신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대속물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가 제거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큰 희생과 손실이며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는 여러 시대 동안, 벌써 2천년이나 온 세상에 전파되어 왔다.
[8절] [이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얻었으며]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선물임이니라].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하신 이유를 설명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기인한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도 되셨다. 로마서 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구원의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은 전 인격적 신뢰이다. 그것은 지식과 찬동과 의지를 다 포함한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요 1:12)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이다(요 6:35, 37).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믿음은 입술의 고백으로 표현된다.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물론 참 믿음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참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어떤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분명히 율법 순종의 행위와 대조되는 어떤 것이다(롬 4:5). 그래서 믿음은 마치 빈손과 같다고 자주 비유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선 빈손이 필요하지만, 빈손은 자랑할 만한 어떤 공로가 될 수 없다. 회개하는 상한 심령과 진실한 믿음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회개와 믿음이 공로가 될 만한 무엇은 아니다. 그러나 여하튼 우리는 믿어야 한다(요 3:16).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정상적이고 정당한 수단이며,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며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구원을 얻었다’는 원어(세소스메노이)(완료 수동태 분사)는 믿는 성도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것은 법적인 구원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더럽고 결함 있는 인격이 거룩하고 완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미래적 표현도 있으나(롬 5:9-10), 그것은 성도가 마지막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을 의미한다. 또 ‘구원을 이룬다’는 현재적 표현도 있으나(빌 2:12), 그것은 성도가 받은 구원에 합당하게 사는 것, 곧 성화(聖化)를 의미할 뿐이다.
[8-9절] . . .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것’이라는 원어(투토)는 ‘구원받은 사실’을 말한다. 구원은 우리 속에서 나오지 않았고 나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으로 인하여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핏값으로 사신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이다(롬 3:24; 8:30).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들을 위해서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에서도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2:14). 선한 일이란 경건하고 선한 삶이며, 영혼 구원의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깨닫고 감사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우리의 죽음과 부활과 영광을 상징하고 성취하고 확증하였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나타난 구원의 은혜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고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자. 구원은 조금이라도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와 긍휼에 기인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 믿음은 구원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빈손과 같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는 이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셋째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선한 일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와 구원을 말하면서 자신의 나태와 불성실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들과 교훈들에 대한 순종으로 구원의 증거를 나타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과, 영혼 구원의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1-18절,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
[11-1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살았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과거의 신분과 상태가 어떠하였으며 거기로부터 어떻게 현재의 신분과 상태로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에 구원받기 전에 어떤 신분과 상태에 있었는가? 본문은 그들의 구원받기 전의 신분과 상태를 일곱 가지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들은 ‘육체로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지식과 소망과 생명이 없는 영적 어두움과 절망과 죽음이 들어 있다. 우리는 과거에 다 이방인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전에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다. 무할례당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무할례는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과거에 다 무할례자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그리스도는 구약 백성들에게 율법에 암시된 구주이었다. 구약 백성은 율법 중 제사법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밖에’라는 원어(코리스)는 ‘상관없이’라는 뜻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상태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구주가 없었다. 그들은 구주를 알지 못하였고 그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과거에 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넷째로,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그의 언약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셨고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 나라에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들을 체험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규례 밖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복과 상관이 없고 그 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과거에 그러하였다.
다섯째로, 그들은 과거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外人)’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에게 약속하셨던 복을 말한다. 그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창 17:7-8; 렘 30:22; 31:33; 겔 11:20; 14:11; 36:28). 그것은 또 영생과 평안의 복을 포함한다(신 5:33; 잠 3:16-18). 할례는 그 하나님의 약속의 표이었다. 할례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었다.
여섯째로, 그들은 구원받기 전에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늙음과 쇠잔함, 질병들과 죽음 등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할 소망이 없다. 과거의 우리들은 이와 같이 슬픔이 많은 인생, 허무한 인생일 뿐이었다.
일곱째로, 그들은 전에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다. 그들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신(神)에 대한 약간의 의식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헛된 우상들을 신(神)인 줄 알고 섬겼다. 그들은 그 헛된 우상들을 의지하고 바랐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식의 시작이지만, 이전의 그들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 무지와 흑암 속에 살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돌보심도 받지 못했다. 과거의 우리가 바로 그러하였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는 구원받은 후를 가리킨다. ‘전에 멀리 있었다’는 말은 구원받기 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평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로 이루신 대속(代贖)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오늘 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이 구원을 받았다.
[14절] [이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화평이심이니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방인이었던 에베소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가까워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 이제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영적 특권의 차이는 없다. 하나님을 진실히 부르는 자들은 누구나 차별 없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것이 신약교회이다. 신약교회는 참 이스라엘이다.
[15절]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방인은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므로, 과거에 유대인은 이방인에 대해 정죄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적대 관계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특히 구약의 의식법들, 예를 들어, 성막이나 제사들이나 절기들 그리고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들 등에 대한 법들은 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시키는 법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식법들은 다 성취되었고 따라서 그 법들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로 자신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신약교회는 이렇게 구성되고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는 다 이 교회에 속한다. 이제는 유대인의 교회가 따로 없고 이방인의 교회가 따로 없다. 이제는 둘을 다 포함하는 한 교회가 있을 뿐이다. 신약교회는 어느 한 민족의 독점물이 아니고, 각 나라, 각 민족, 각 언어를 다 포함하는 세계적 단체가 되었다.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용납되는 일은 구약시대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평케 하시는 일을 하셨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 신자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적대 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된 관계이다.
[16-18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사람들은 원수된 상태에 있었다.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경 역사의 증거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못지 않게 우상숭배적이었고 부도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셨고 죄를 지은 인간들도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를 꺼려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케 하신 것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케 하셨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셨다(롬 5:10).
‘먼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막론하고 모두들에게 평안의 복음, 화목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들은 한 성령을 받고 한 성령 안에서 그의 위로와 격려와 권면을 받는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었고 오직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10:19).
에베소 교인들이 구원받기 전 신분과 상태로부터 어떻게 구원받은 신분과 상태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였듯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구원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에 이방인이며 무할례자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중생하고 세례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과거에 그리스도 밖에 살았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던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영적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이 되었는지, 과거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 들어와 언약 백성이 되어 영생과 평안과 하나님 자녀 됨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는지, 과거에 세상에서 소망 없던 우리가 어떻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산 소망, 곧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지, 또 과거에 하나님 없이 살았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받으며 살게 되었는지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 신약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들의 모임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루신 속죄사역의 결과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19-22절, 신약교회의 구성원, 기초, 목표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은 유대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곧 동료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다. 믿는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한 가족이며 신약교회의 구성원이다. 여기에 신약교회의 세계성이 있다. 구약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의 교회이었지만, 신약교회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을 다 포함하는 세계적인 교회이다. 그것은 모든 민족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로 구성된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신약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해설한 자들이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분이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었다. 교회는 그들이 증거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위에 세워졌다.
이 말씀은 교회의 기초를 증거하는 마태복음 16장과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신 후,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18절). 주께서 교회의 기초로 언급하신 ‘이 반석’이란 문맥상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그가 고백한 진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한편,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은 자이며 다른 사역자들이 그 터 위에 집을 건축하는 자들이라고 비유하면서, 그가 닦아 둔 교회의 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터 외에 다른 터가 없다고 말했다(11절).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기초이심을 증거한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신약성경은 그 내용을 증거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 건물의 ‘모퉁이 돌’은 모퉁이에 놓여지는 기초석으로서 건물을 구성하는 모든 돌들의 기준점이 된다. 그것은 한 건물의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돌이다. 그것은 건물을 지탱하고 결합시키는 역할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모퉁이 돌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의 머리이시며 그들의 믿음과 생활의 기준이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그들 모두를 결합시키시고 온 교회를 붙드시는 주님이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본문은 신약교회의 목표를 보인다. 신약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이다. ‘건물마다’라는 말(파사 오이코도메)은 단수명사로서 여러 건물들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의 건물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다(엡 4:4). 교회는 하나이다. 그것은 성전과 같다. 구약의 성전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지만, 또한 신약교회를 가리켰다. 신약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곧 교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신약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듯이 큰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 ‘성전이 되어 간다’는 표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전도요, 둘째는 개인의 성화이다.
교회는 아담 이후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한 명의 영혼을 더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다(요 10:16). 전도는 성전 건립의 일이다. 한 명의 택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은 건물의 벽돌 한 장이 쌓이는 것과 같다. 모든 영혼들이 다 돌아올 때 이 성전은 완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전 건립은 예배당 건축이 아니고, 한 명의 영혼을 회개시키고 주 앞으로 인도하는 전도의 일이다.
성도 개인의 영적 성장 혹은 성화(聖化)도 필요하다. 성도는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을 때 이미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를 받았다(고전 1:30; 롬 3:23, 24; 10:4).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제사로 거룩케 되었고 완전케 되었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러나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구원을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경건과 의와 선함의 도덕성을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내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성과 구원의 참됨에 합당하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복음은 허상에 불과하며 구원은 이론뿐일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성전, 곧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된다는 사실은 실로 신비한 일이다.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원히 모시고 살겠는가? 그러나 그 일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셨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함을 증거한다(요 15:1-8; 고전 6:17).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는 자들이 된다(롬 8:1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세계성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는 온 세상의 각 민족, 각 나라, 각 방언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다. 교회는 한 민족이나 사회의 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종족, 모든 언어, 모든 나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기초가 사도들과 선지자들, 곧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한 글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바로 그 글들이다. 교회는 결코 이 기초를 떠나지 말고 이 기초를 다시 닦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제시된 십자가 속죄의 은혜만 붙잡고 진행해야 하며 오직 신구약성경 66권의 말씀만 읽고 묵상하며 배우고 믿고 소망하고 복종하고 실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의 목표와 임무가 영적 성전 건립임을 인식하고 그 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 영적 성전 건립이란, 전도와 영적 성장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영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임무요 사명이다. 또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지식과 경건, 그리고 의와 진실과 선함의 도덕성을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내기 위해 성실해야 한다. 그것이 성화(聖化)이다. 성도의 영적 성장 또는 성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하지만, 우리는 그 은혜에 의지하여 성실히 힘써야 한다.
[사사기 4장 복음 설교말씀] 사사 드보라와 바락(삿 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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