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젖으로 먹이지 않고 밥으로 먹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육체에 속한 자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과 시기와 다툼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서로 분파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아직도 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육체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자랑치 말라(고전 3:1-23)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코이)[육신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이 말하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육신에 속한 자’ 곧 ‘육신적인 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은 3절에도 두 번, 전통사본에는 4절에도 또 한 번 나온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의 용어에서 ‘육신’(사르크스)은 로마서 7, 8장에서 많이 사용된 바대로 사람의 본래 타고난 죄악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 육신적인 사람이란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는 하지만 아직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본성의 죄악성에 지배를 받는 자, 즉 영적으로 어린 성도를 가리킨다.
[2절]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밥’은 ‘딱딱한 음식’을 가리킨다. 갓난아기는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은 듣기 쉬운 교훈만 받고 어려운 교훈들을 받지 못한다(히 5:12-14).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자랄수록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연구하고 배우며 믿고 행하며 지식과 인격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2:6에서 ‘온전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영적으로 자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성경은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야 함을 가르친다. 에베소서 4:13-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히브리서 5:12-14, “장성한 자.” 베드로전서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3절]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영적 어린아이라고 취급하는 까닭은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악들 가운데 시기, 분쟁, 분열을 언급했다(갈 5:19-21). 그러므로 성도는 그런 죄들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하고 그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4절]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한](전통본문)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지도자들에 대한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에서 나타났다. 바울은 그 교회를 개척하여 설립한 자이었고 아볼로는 바울 후에 그 교회에 와서 성경말씀을 가르친 목회자이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육신에 속한 증거이었다. 교회에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들은 사람에게 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파당과 분열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에 불과하다.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교회에 나아와 사람을 바라보면 시험에 떨어지고 실망하고 실족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나아와 오직 주님만 믿고 바라며 섬기고, 오직 성경말씀만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으로 일치 단합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육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다. 둘째는 영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 그의 지배를 받는 자이다. 셋째는 육신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아직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본성의 죄악성의 지배를 받는 자이다.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5-15절, 교회의 바른 건립
[5-7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사역자(使役者)’라는 원어(디아코노스)는 ‘섬기는 자, 일꾼, 봉사자’라는 뜻이다.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 믿음에서 자라게 한 복음의 일꾼들이었다. 일꾼들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복음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하시다. 그러므로 일꾼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그를 보내신 주인, 곧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하며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으로 일치 단합해야 한다.
바울은 복음 사역을 씨를 심는 것과 물을 주는 것에 비유하였다. 씨를 심는 것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가리켰고, 물을 주는 것은 세워진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가리켰다. 씨를 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초로 뿌리는 것이요, 물을 주는 것은 그 뿌려진 씨가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도록 가꾸는 일이다. 농사에서 심는 일도 가꾸는 일도 다 중요하듯이, 복음 사역에서는 전도도 목회도 다 중요하다. 그러나 씨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시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고 한 영혼도 성장시킬 수 없다. 개인의 구원과 성장이나, 교회의 설립과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복음의 일꾼 자신이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구원 사역에 무엇을 대단히 기여한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자를 사용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을 뿐이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복음 사역자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복음 사역자 자신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무익한 종에 불과함을 항상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눅 17:10).
[8-10절]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복음 사역자에게 상이 있을 것이다.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성경은 상에 대해 종종 말한다. 상은 구원과 다르다. 구원은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말한다.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죄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상은 다르다. 상은 선행과 봉사, 특히 복음 사역에 대해 약속된다. 구원에 차등이 있다고 말할 것은 아니나, 상에는 차등이 있다. 상은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즉 자신의 선행과 봉사와 충성의 정도에 따라서 주어질 것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을 농사나 건축에 비유한다. 복음 사역은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과 같고, 터를 닦고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성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나 하나님의 집과 같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기초를 닦아야 한다. 바울은 터를 닦은 자요 그의 뒤에 일하는 사역자들은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이다. 그는 터를 잘 닦아 놓았기 때문에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은 조심스럽게 건축해야 한다. 목회는 집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물론 복음 전파를 통해 죄인들이 계속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고 속죄 신앙을 가진 자들은 충실한 가르침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구원의 시작이요 성화(聖化)는 구원의 진행이다. 믿는 자는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자라고 훈련되어 그리스도의 형상, 곧 거룩하고 선한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 외에 다른 터는 있을 수 없다. 만일 다른 터를 닦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다른 집단이 될 것이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반석은 베드로가 조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을 의미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교회의 기초이다. 속죄 신앙은 그 믿음의 핵심이다.
[12절]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바울은 집을 짓는 건축 자재에 대해 말한다. 건축 자재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금과 은과 보석 같은 내구성(耐久性)과 영구성(永久性)이 있는 것이요, 둘째는 나무와 풀과 짚 같은 내구성과 영구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종류의 목회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목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집을 짓는 목회이다.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크고 웅장하게, 또 빠르게 지을 수 있으나,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고 기술도 많이 필요해서 집을 짓기가 힘들고 그렇게 웅장하지도 못하고 또 더딜 것이다. 그러나 금과 은과 보석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참 목회요 그렇게 지어진 교회가 참 교회가 될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교훈을 가리키며, 나무와 풀과 짚은 거짓된 교훈을 가리킨다고 본다. 참 교회는 바른 교훈을 통해서 세워진다. 세상적인 생각이 섞이지 않은 바르고 순수한 설교는 바른 교회 건립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나무와 풀과 짚은 거짓된 교훈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전하기보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들은 회개를 외치기보다 거짓된 평안을 선포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선포된 평안은 오지 않았다. 참 평안은 죄를 버릴 때에만 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거짓 목사들이 이루어 놓은, 외적으로 거창하게 보이는 일들은 환난의 바람이 불어닥칠 때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본문은 목회에 대해 말한다. 칼빈은 말했다. “그는 주의 참된 목사들이 그날에 대한 눈을 가지도록 권면한다,” “항상 그 기초를 가지고 있지만 풀과 금, 짚과 은, 나무와 보석을 섞는 자들, 즉 그리스도 위에 짓지만 육신의 연약성의 결과로 어떤 인간적인 것을 용납하거나,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엄격한 순수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 자들에 대해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목사들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것이다.” 촬스 핫지도 말하였다. “전체적 논의는 설교자들과 그들의 의무에 관한 것이다,” “사도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비록 복음의 기본적 교리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에 오류를 섞는 교사들에 관한 것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일반 신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목사들과 그들의 교훈들에 관한 것이다.”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공력’이라는 원어(토 에르곤)는 ‘일, 일한 바, 성과’라는 뜻이다(BDAG). 복음 사역자들의 사역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 날이든지 그 전의 대환난 날이다. 그때 그들의 사역이 바른 사역이었는지 아니면 겉보기에만 굉장한 것 같은 사역이었는지, 혹은 참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고 양육한 사역이었는지 아니면 생명 없는 사역이었는지 판별될 것이다.
[14-15절]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해를 받는다’는 원어(제미오오)는 ‘손실을 당한다, 잃는다’는 의미이다. 칼빈과 핫지가 말하였듯이, 이 부분은 일차적으로 목회에 관해 말한다. 복음 사역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들에게 상을 약속하신다(8절).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의 일한 바가 불 시험을 통과하면 상을 받을 것이다. 즉 그가 목회했던 교인들이 불같은 환난을 잘 통과하면 그는 성공적 목회를 한 자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록 그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 하여도 그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의 목회 사역에 대한 상을 잃게 될 것이다.
목회 사역은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과 같고 기초를 닦고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하나는 전도이며 다른 하나는 목회이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목회자는 그 기초 위에 나무와 풀과 짚 같은 거짓된 교훈으로 교회를 세우지 말고, 금과 은과 보석 같은 바른 교훈으로 세워야 한다. 전도자나 목회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나 각 복음 사역자는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또 성도는 바른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 바른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받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6-17절,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사도 바울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도 개인도 그러하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그러하다.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은 거룩한 곳, 곧 성전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구약시대의 성막이나 성전은 신약시대에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예표하였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2:19). 요한복음 2:21은 이 말씀이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을 뿐 아니라,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심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성령께서는 성도 개개인 속에 계시고 또 온 회중 가운데 계신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19에서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2:20-22에서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 성전이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성도 개개인 가운데 그리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 거하신다. 이것은 성도 개인과 신약교회에 지극히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다.
[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은 큰 복이지만, 그 사실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고 거룩하게 보존해야 하는 중요한 의무를 보여준다.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범죄하는 것과 교회적으로 범죄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 개인의 몸을 더럽힐 뿐 아니라, 또한 교회 안에서 범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사람의 생각과 주관과 감정대로 하는 모든 것이 죄이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다. 특히 당시에 고린도교회에서 볼 수 있었던 바처럼, 교회 안에서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쟁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더럽히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께서 멸하시리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개인이 죄짓는 것을 미워하신다. 죄를 짓는 자는 평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징벌과 징계의 채찍이 그의 뒤를 따를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그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그의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죄에서 떠나 거룩한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교회적으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서로 미워하고 분쟁과 분열을 일으킴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자들을 반드시 징계하실 것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경고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며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의 전인 줄을 알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게 지키며 또 교회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게 지키자. 우리는 교회의 단합과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18-23절, 사람을 자랑치 말라
[18-20절]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국한문--‘궤계’)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사람의 사상들과 철학들은 실상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것들은 진리 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진리를 논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 세상의 가장 지혜로운 자의 지혜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스스로 속게 하시며 그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참 지혜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자기 꾀에 빠지고 자기모순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헛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의 사상들의 헛됨을 알고 스스로 속는 데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참된 것을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참 지혜와 지식으로 돌아와야 한다. 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는 지혜와 지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 가운데 자신을 똑똑하고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는 참 지혜가 아니고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21-23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사람을 자랑하는 데 있었다. 지도자 중심의 파당과 분쟁이 그들의 문제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중요한 교훈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들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자와 섭리자와 구주이신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해야 한다.
[22-23절]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다 교회를 위한 일꾼들이요 교회의 공동적 소유물과 같다. 그들은 교회의 한 파당의 당수가 될 수 없고 모든 교회의 공동적 봉사자들이다. 온 세상도 교회의 것이요 생명도 죽음도 그러하다. 현재 있는 것들이 그러하고 장차 올 것들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들은 다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고 다 성도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파당에 속하지 말고 교회 전체에 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넓혀 교우들 간에 시기와 분쟁을 버려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들은 누구의 것인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물이다.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기에 확실히 교회의 일체성, 교회의 하나 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세상의 참 교회가 하나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며 일치 단합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를 다 버리고 또 그런 지혜가 자신을 속이는 헛된 것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사모하자. 또 이단이나 오류가 있는 자들이 아닌 참된 사역자들에 대해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사람들 중심의 파당과 분쟁과 분열을 조심하자. 모든 진실한 사역자들은 다 하나님의 종들이며 또 교회의 공동 소유이다.
[욥기 34장 강해설교말씀]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심(욥 3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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