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마가복음 2장 주일 성경말씀] 금식, 안식일, 죄인을 부르심(막 2:1-28)

기혼샘 2021. 9. 1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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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가복음 2장 주일 성경말씀 중에서 금식, 안식일, 죄인을 부르심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도 고쳐주시지만 영혼의 죄도 사해주셔서 구원받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금식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금식은 신랑을 빼앗겼을 때 하라고 말씀합니다.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을 때 금식해야 합니다.

금식, 안식일, 죄인을 부르심(막 2:1-28)

 

1-12,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

[1-4]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는 모여온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는 주로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셨다. 구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죄인을 구원하신다. 교회의 중심적 사역은 말씀사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또 풍성하고 힘 있게 전파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인도되었다. 중풍병은 뇌혈관이 터지거나 막혀 팔이나 다리 등의 기능이 손상되는 병이다. 세상에는 많은 병들이 있고 많은 불행한 일들이 있다. 그것들의 궁극적 원인은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그 모든 불행의 해결책이 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사람은 모인 무리를 인하여 그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그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그들은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하였다. 이것은 상당한 비용 지출과 집주인이나 거기 모인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방법 외에는 그 병자가 고침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또 그 기회를 놓치면 다른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대가(代價)도 중풍병의 치료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행위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믿음과 열심은 본받을 만했다. 이제 우리는 병고침을 위해 그런 열심을 내지 말고 영혼 구원과 전도를 위해 그런 열심을 내어야 한다. 병고침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필요한 일이지만, 영혼 구원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시간과 돈과 힘을 써야 한다.

[5-7]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죄와 질병이 관련이 있음을 보인다. 욥이나 바울의 경우와 같이, 어떤 특정한 병이 특정한 죄의 결과가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병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죄가 없었던 세상에는 병도 없었다. 질병의 원인이 그러하다면 그 해결책도 분명해진다. 죄사함이 그것이다. 죄사함은 실상 사람의 병뿐 아니라 모든 불행의 해결책이다. 그것은 모든 인생의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다.

어떤 서기관들이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점에서 정당했다. 입법자와 재판자이신 하나님 한 분 외에 죄를 사할 권한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의 신적 영광을 보았더라면, 그들은 그를 참람하다고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8-12]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그의 영으로]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께서는 그 서기관들이 속으로 품은 생각을 그의 영으로 아셨다. 그의 인성(人性)은 신성(神性)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신적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사람의 속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은 일상적인 말이며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보다 쉬운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원적 해결책을 주시고 또 가르치시기 위해 그것보다 더 어려운 말을 택하셨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 사역이 있다. 그것은 죄사함이다. 죄사함은 인생의 근본 문제의 해결이요 그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었다. 그는 이 권세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이 구주 예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이다.

그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는 일어나 곧 자기가 누웠던 상을 들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에 근거하여 그 병자의 중풍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을 행한 자는 없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유의 기적들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영적으로 중풍병자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정상적인 생활, 곧 경건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게 하신다. 죄인의 구원은 병자의 치료보다 훨씬 더 큰 일이다. 죄인들의 구원은 더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의 삶에 관계된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놀라운 일을 쉬지 않고 행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자.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제 죄인들은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는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3:2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며, 예수님 믿는 자들은 이미 죄사함을 받았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자. 중풍병자를 데려왔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중풍병보다 더 불행한 죄로 인해 상한 영혼들을 구주 예수께로 인도하자. 우리는 다른 이들, 즉 가족이나 친구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자. 우리는 천하보다 더 귀한 한 명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힘과 시간과 돈을 아끼지 말자.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13-17, 많은 죄인들이 따름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집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말씀을 증거하시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말씀사역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죄인들을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이 레위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마태일 것이다(9:9-13). 세리 즉 세무공무원은 부정과 불법이 많은 직업이었고 죄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주목하셨고 사역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의 관심, 그의 생각, 그의 의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그 일을 위해 사역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레위는 주님의 부름을 받자 곧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복음의 일꾼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 곧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는 자이어야 한다.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예수께서는 늘 바쁘셨겠지만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를 피하지 않으셨다.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은 세리들과 죄인들은 레위의 친구들로서 레위의 전도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많은 죄인들은 그를 따랐다.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은 믿음의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전통본문)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서기관들은 보통 바리새인들 중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의인이라면 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가? 그들은 이것을 죄인들과의 교제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영혼 구원과 전도의 차원에서 그들과 함께 잡수신 것이었다. 우리는 교제의 차원과 전도의 차원을 구별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 자들이었다. 회개하고자 하는 진실한 죄인들이 실제로 악을 행하면서도 의인인 척하는 위선자들보다 구원에 가깝다.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서기관들의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전통사본) 왔노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5:32, 예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나 병원이 필요치 않다. 의사나 병원은 병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병자는 고침을 받을 것이나, 건강한 척하는 자는 그 병으로 죽을 것이다. 병자는 병원 가기를 싫어하거나 자기 병을 속이지 말고 병원에 가서 바른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고침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 병 때문에 죽고 말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죄에서 건져내시는 구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구주는 죄인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우침 받고 그 죄를 인식하고 그 죄의 씻음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은 구원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의인인 척하는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죄가 인생의 근본 문제요, 죄사함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가장 놀랍고 감사한 선물이며,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보다 더 복되고 감사하고 감격적인 사건은 없다.

우리는 예수께서 죄인들의 구주이심을 확신하자. 우리는 과거에 다 죄인이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해주셨다. 그는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다. 오늘날에도 죄인은 누구나 그에게로 나아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죄인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엎드려 간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또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심정을 본받아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하자.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 이방종교인들, 그 어떤 죄인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을 하나님께로, 구주 예수께로, 또 바른 교회로 인도하자.

그러나 우리는 교회적 교제, 즉 성도 간의 교제의 선은 지키고 원칙은 지켜야 한다. 우리는 교제와 절교(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불신자들이나 이단자들이나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을 말씀의 바른 교훈으로 성실히 훈련시키고 적절한 권징도 시행해야 한다.

18-22, 금식 문제에 대하여

[18-20]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의 오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습관을 따라 금식을 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오셨으나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록 금식하지 않았지만, 참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종교적 형식만 지키는 자가 되지 말고 참 생명, 즉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기쁨과 즐거움의 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동안에 금식할 일이 아니었다. 금식은 비상한 기도, 결사적인 기도의 형태이다. 지금은 그들이 그리스도로 기뻐할 때이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금식할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에 그들은 금식할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날을 가리킨다. 그때 제자들은 금식할 것이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며 이후에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간구할 것이다.

신약시대에 금식이 불필요하거나 폐지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한 간질 환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데려와 고쳐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갔고 그 아이는 나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음을 지적하신 후에 전통 본문에 보면, “이런 유의 것은 기도와 금식으로 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17:21). 주께서 금식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었다(13:1-3).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였고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신약교회에서도 특별한 경우에는 금식기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금식 기도는 율법적 규례에 의한 것이 아니고, 또 경건 생활의 규칙으로 규정할 것도 아니다. 규칙적 금식이 더 경건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신약 성도는 언제든지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생겼을 때 자원함으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21-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율법 아래서의 옛 생활방식을,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 가죽부대와, 또 암시된 바, 새 옷은 복음 아래서의 새 생활방식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신약 아래서 우리가 어떤 법적 규정에 얽매여서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유함과 자원함으로 섬겨야 함을 암시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율법의 속박과 공포로부터의 자유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7:6; 5: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3:24; 10:10, 14). 그러므로 우리는 또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자유는 율법의 속박과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얻음을 통해 얻게 된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원함으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했고(5:13),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명백히 구별됨을 증거하였다(갈 5:19-23). 사도 베드로도,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고(벧전 2:16), 성도가 선한 행실로 자신의 구원을 견고케 해야 하며 또 흠과 점 없는 인격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벧후 1:5-11; 3:14). 또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곧 중생한 자들은 계속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의를 행함과 형제 사랑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명확히 구별된다고 교훈하였다(요일 3:9-10).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으나 이제 자원함으로 계명을 힘써 지켜야 한다.

23-28,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자름

[23-24]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다. 그때는 맥추절 즈음이었던 것 같다. 마태복음 12:1은 그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말한다. 그때 당시 매우 경건하고 보수적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남의 밭을 지날 때 이삭을 자른 것은 율법이 허용하는 것이요 죄가 아니었다(23:24-25). 단지 안식일에 행한 그 행위가 문제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었다.

[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한 사건을 들어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답하셨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할 때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간 때가 있었다.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로서 성경 역사에서 그 부친보다 더 알려져 있으므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신 것 같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몹시 고팠으므로, 제사장은 그들에게 성전의 거룩한 떡을 주어 먹게 하였었다. 이 일은 구약의 의식법에 저촉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 비상한 때에 부득이한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큰 죄로 여기지 않으셨고 다윗과 그 일행들을 용납하셨다. 이와 같이, 이 경우에도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삭을 잘라먹었겠는가 하고 이해한다면 큰 비난거리가 될 것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디아)[때문에]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디아)[때문에]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안식일 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의 목적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씀이다. 모든 율법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며(10:12-13), 안식일 계명도 그러하다. 안식일은 사람의 육신적 휴식과 영적 성장을 위하여 주신 규례이다. 출애굽기 23:12, “너는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7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물론, 사람이 안식일에 자기 마음에 원하는 바를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매우 엄격하여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은 큰 죄로 여겨졌다. 또 안식일에 매매 행위나 육신을 위한 오락은 중지되어야 하였다(13:15-17; 58:13). 그러나 안식일의 본 정신은 사람을 위하는 데 있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믿음의 성장을 위해 중요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들에게는 복이 약속되어 있었다(58:14). 실상,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과 행복, 평강과 건강이시다. 다른 날 할 수 있는 일을 안식일에 허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나, 우리가 안식일의 참 의미를 이해한다면, 상대의 사정을 고려치 않고 그의 행위를 단순히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생명을 구하는 일이나 의식주에 관한 부득이한 행위는 정죄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에도 주인이 되신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지킨다. 수 그리스도 안에는 참 안식과 자유가 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의 복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다. 주일은 휴식과 예배의 날이다. 우리는 이 날 오락과 세속적 일을 금하고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우리는 주 안에서 안식일을 즐거이 지키지만, 남의 어려운 형편을 동정함이 없이 그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안식일의 참 목적을 이해하자.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날이다. 구약 율법의 모든 내용이 결국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다. 안식일 없는 자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산다. 그러나 안식일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고 그를 소망한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키고 우리의 구원을 견고케 하고 우리로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한다. 또 우리는 이 법을 지킴으로 영적인 복은 물론 육적인 복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안식일을 자발적으로 지키자. 신약시대에는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날이요 거룩한 날이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예배의 날로 받았다. 사도시대로부터 교회는 주일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에 세속적 일들과 육신적 오락을 피하고 휴식하며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며 듣자. 또 이런 일들을 가장 귀히 여기자.

[예레미야 애가 히브리어 원어강해]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애 1:10-22)

 

[예레미야 애가 히브리어 원어강해]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애 1:10-22)

안녕하세요. 오늘은 예레미야 애가 히브리어 원어 강해 중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을 보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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