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사천 명을 먹이시는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율법적인 교훈을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막 8:1-38)
1-10절, 두 번째의 떡 기적
본문은 두 번째의 떡 기적 사건으로서 떡 일곱 개로 약 4천명을 먹이신 일이다. 이것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인다. 마가복음 7:31은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로 오셨음을 증거하였고, 마태복음 15:29는 마가복음과 같은 사건을 증거하기 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오셔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고 많은 무리가 그 앞에 모였고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떡 기적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났다고 보인다.
[1-3절]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그때에 심히 큰(팜폴루)(KJV) 무리가 주 앞에 모여 있었고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 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에게 물질적 유여함이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그곳은 광야이었고(4절) 그들은 이미 사흘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주님 말씀을 듣는 일에 대단히 열심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그들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염려하셨다.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딱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떡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떡 기적은 무리를 불쌍히 여김에서 나왔다.
[4-7절]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도무지 인간적으로는 대책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많은 무리를 위해 떡을 살 돈도 없었겠지만, 돈이 있다 하여도 그 많은 분량의 떡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것은 떡 일곱 개뿐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며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들 앞에 놓게 하셨다. 그는 작은 것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제자들은 그 떡을 무리들 앞에 놓았다. 또한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었는데, 주께서는 축복하시고 그것도 그들 앞에 놓게 하셨다.
[8-10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4천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그 날, 놀라운 기적이 다시 일어났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나 거두었다. 그 떡을 먹은(호이 파곤테스) 사람들은 약 4천명이었다. 마태복음 15:38은 먹은 사람이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약 4천명’이라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마태복음 15:39의 전통본문은 그들이 ‘막달라’ 지경으로 가셨다고 증거한다. 막달라는 갈릴리 바다의 서쪽 해안 중간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그 날 보잘것없어 보이는 떡 일곱 개로 그 큰 무리의 필요를 해결해주셨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복음화의 큰 일을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해 이루셨다. 교회의 모든 일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주심으로 된다. 전도는 단지 돈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설립도 그러하다. 신약교회의 역사는 이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금액의 헌금이, 보잘것없는 조직력과 행정력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대한 일을 이루어 왔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이루어 갈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공급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날 떡 일곱 개로 약 4천 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는 배가 심히 고팠을 그 무리들에게 참으로 풍성하게 공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겨우 먹이지 않고 배불리 먹이는 분이시다. 천하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천지만물의 창조자시며 섭리자이신 그는 부자이시다. 그는 원하시면 자기 백성에게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 좋은 것을 공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며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떡 기적은 영적으로 예수께서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48, 51).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고 잔을 주시며 “이것은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26-28). 그는 한 분이시지만,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 그의 살과 그의 피는 많은 사람에게 영생의 양식이 되었다. 과연, 외적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분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풍성한 양식이 되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께로 나아오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는다.
11-21절,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11-13절]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詰難)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힐난하다’는 말은 ‘트집을 잡아 비난하다’는 뜻이지만, 그 원어(쉬제테오)는 ‘변론하다’는 뜻이다(BDAG). 예수께서는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그는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다.
기적은 사람의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호기심거리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 유익이 되나,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들을 보았으나 그를 믿지 않았다(요 12:37).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의 기적들을 보고, 또 오늘날에는 그것들을 기록한 성경의 증거를 읽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요 20:30-31).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어도 성경말씀의 충족한 증거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예수께서는 제자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고(요 20:29), 또 사도 베드로도 말하기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였다(벧전 1:8-9). 우리는 기적을 구하지 말고 기적보다 귀한 믿음을 구해야 한다.
[14-16절]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본문은 잘못된 교훈을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므로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었을 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도 하셨다(마 15:6).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라고 했다. 제자들은 떡의 누룩을 생각했으나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헤롯의 교훈을 가리키셨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외식적이었고, 사두개인들의 교훈은 이성주의적이었고, 헤롯의 교훈은 세속주의적이었다고 본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잘못된 교훈들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도 바른 교훈이 아닌 것들은 다 조심해야 한다. 요한일서 4:1,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오늘날 우리는 천주교회나 이단종파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교회연합운동, 포용주의, 은사주의, 열린 예배 같은 교회 속화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17-21절]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5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떡이 없음에 대해 의논함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둔함을 지적하시며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제자들이 떡 기적을 잊어버렸는가 하고 물으셨다. 그는 떡 다섯 개를 5천명에게 떼어줄 때 남은 조각을 몇 바구니나 거두었는지, 또 떡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어줄 때 남은 조각이 몇 광주리나 되었는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열 둘과 일곱이라고 각각 대답하였다. 바구니와 광주리의 차이는 불분명하다.
두 차례의 떡 기적은 확실한 사건들이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사건들을 다시 확인시켜주셨고 또 후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기적들의 확실함을 한번 더 증거하셨다. 그러나 떡 기적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인격이다. 떡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일들을 포함한 모든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외적인 기적보다 내면적인 믿음을 구하자. 또 성경적인 바른 교훈을 붙들자. 또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확신하자. 그는 두 차례나 떡 기적을 행하셨다. 그는 소경, 앉은뱅이, 나병환자, 중풍환자, 열병환자, 귀신들린 자 등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또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포도주 기적과 떡 기적을 행하셨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이런 기적들은 확실히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거기에 더하여,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받고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자.
22-26절, 소경을 고쳐주심
[22-23절]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께서는 벳새다에 이르셨다. 그곳은 떡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다(눅 9:10).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그에게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였다. 그들은 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있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영적 소경인 죄인들을 구주 예수께로 인도하는 열심 있는 성도들의 모범이다. 소경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도,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항상 어두운 세계 속에서 산다. 그는 생활하기나 길을 걷기에도 불편하다. 물론 세상의 불행한 일들이나 미움과 격노의 얼굴이나 죄악된 일들을 보지 않는 장점도 있기는 하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의 손을 붙들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병자들을 고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는 믿음 없는 자들 앞에서는 기적 행하기를 꺼려하셨다(막 6:5-6). 그는 그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다. 그 소경은 비록 볼 수 없어도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아마 그의 눈에 손을 얹으셨을 것이다. 그런 후, 그는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24-26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그 소경은 우러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때에는 병자가 보통 즉시 고침을 받았으나 이 경우는 웬일인지 즉시 고침을 받지 못했다. 그 소경은 사람들이 보이지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간다고 말하였다. 그의 눈은 시력을 얻었으나 완전치 못하였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 눈에 다시 안수하셨고 그로 다시 쳐다보게 하셨다. 그 소경은 완전하게 고침을 받았고 만물을 밝히 보았다. 주께서는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전통본문에 보면, “마을에 들어가지 말고 마을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병고침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가 두 번 안수하심으로 소경을 고치신 것은 우리의 영안(靈眼)을 고쳐주시는 일에 비교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영안(靈眼)이 있다(계 3:18). 우리는 과거에 죄인이었고 영적 소경이었다(엡 4: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었을 때 우리의 영안(靈眼)이 열리었다(고후 4:6). 그러나 마음의 눈의 시력은 단번에 완전케 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밝아진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7-19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천국 영광의 풍성과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힘써야 하고 진리의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이미 얻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 귀머거리와 벙어리, 소경과 앉은뱅이 등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심과,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통해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고 또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 구원을 얻었다. 신약성경의 증거를 통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다 구원을 얻었다.
둘째로, 우리는 더욱더 밝은 영적 시력을 사모하자.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와 뜻을 희미하게 이해하지 말고 밝히 이해하고 확신하기를 소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하였다(엡 1:18-1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의 진리와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과 죄사함의 가치와 천국과 영생의 가치에 대해 더욱 깨닫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심령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진리, 즉 믿어야 할 교리적 내용과 행해야 할 생활 교훈을 다 바르게 깨닫고 믿고 확신하고 또 그 모든 교훈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영적 소경인 우리 주위의 믿지 않는 많은 이웃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육신의 소경도 불쌍하지만, 영적 소경은 그보다 더 불쌍하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목적도, 죄의 심각성도, 지옥 형벌도 알지 못하고, 천국의 영광도, 영생의 보화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우리는 그런 자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자신의 죄악 됨과 허무함을 깨닫고 죄사함과 영생과 천국의 복된 구원을 얻게 하자.
27-30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함
[27-28절]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라는 호칭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268회나 사용되었다. ‘제자’는 선생님에게 말씀을 배우며 그를 따르는 자를 가리킨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에서 약 4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도시이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그에 대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참 믿음은 바른 지식을 동반한다. 예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사람들의 견해를 모르셔서가 아니고 이제 제자들이 자기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지 선지자나 종교적, 도덕적 선생이 아니셨다.
[29-30절]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이전에 자신에 대해 많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증거한다. 단지, 세례 요한이 그에 대해,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증거하였고(막 1:8),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로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다(막 1:11). 또 그가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실 때 그 귀신이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불렀다(막 5:7).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기보다 행동으로 증거하셨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는 자신이 전도하기 위해 오셨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또 그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열병환자, 한편 손 마른 자, 혈루병자, 귀머거리, 소경 등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귀신들린 자들을 많이 고쳐주셨다. 또 그는 다른 기적들도 행하셨다. 그는 떡 기적을 두 번 행하셨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물으심으로써 자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알리기를 원하신다. 그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는 신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구약시대에 선지자, 제사장, 왕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는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실 자이었다. 그는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며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시며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며 보호하시며 악한 자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신 것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견해를 나타낸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 사실, 이것이 복음서 전체의 요지이며 성경 전체의 기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맨 처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했다(막 1:1).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요 20:31) 또 사도들이 전한 가장 기본적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다(행 5:42; 16:3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 16:31).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자신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것은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이며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라야 메시아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사회적 안정을 주시고 병자들이 고침 받고 물질적 궁핍이 제거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이사야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예언하였다(사 35:1-2, 5-6).
그렇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 그런 환경적 회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영적 회복에서부터, 즉 먼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세상의 육신적, 물질적, 사회적 회복도 뒤따를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요지이며 복음서들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인류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셨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부는 아니다. 장차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시작된 구원은 영화롭게 완성될 것이다. 그것이 영광의 천국이다. 메시아의 사역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렇게 완성될 것이다.
31-38절, 예수님을 따르는 길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이때 이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적어도 두 번 더 증거하실 것이다(마 16:21; 17:22-23; 20:17-19).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도 말씀하셨다(마 20:17-19).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실 자가 아니고, 오히려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자이시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했다(고전 1:23). 그의 죽음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속죄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32-33절]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책망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무지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았지만 고난 받으실 그리스도로는 알지 못하였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사는 것만 생각했지 죽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베드로의 최선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였다.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교훈한다. 그것은 세 가지 내용이다. 첫째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꺾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주신 의무이었고 구약 율법의 요구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행하신 일이었다. 히브리서 5:8-9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형수의 형틀이다. 사형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서 거기서 그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요한복음 19:17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말로 골고다라는 곳에 나오셨다고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셋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제자는 선생의 교훈을 믿고 그 교훈을 행하며 그의 본을 따르는 자이다. 그것이 그를 따르는 것이다. 주께서는 이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제자들은 그를 따라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주께서는 자기희생을 요구하셨다. 이것은 무거운 요구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되 이런 희생을 생각지 않는다. 이런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들은 믿는 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바로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즐거이 복종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옥 형벌을 받을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가 죄사함과 구원을 얻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희생이 우리에게 지나친 요구가 되겠는가?
[35-37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만일 사람이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 한다면, 그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자요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참 제자이며 그의 구원은 확실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얻는다 할지라도 영생의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누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마 24:30) 그를 부끄러워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통해, 그의 제자들의 증거를 통해, 즉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확신하자.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러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다. 그는 죽음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주신 자기부정의 길을 걸으라는 교훈을 따르자. 그것은 그가 친히 가신 길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자. 우리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이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의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을 행하자. 우리는 자기희생과 죽음까지도 각오하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그의 영광의 재림을 소망하자.
[요한복음 2장 예수님 말씀] 가나 혼인 잔치 포도주 기적(요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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