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마태복음 12장 예수님 말씀]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심(마 12:1-50)

기혼샘 2021. 11. 1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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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마태복음 12장에서 안식일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먹었다는 것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안식일에 자신의 유익에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안식일에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율법주의 신앙을 하면 안 됩니다. 항상 복음을 듣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심(마 12:1-50)

 

1-21, 안식일 문제

[1-2]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 . . .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었다. 예수님의 전도 사역은 물질적으로 유여한 사역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를 따르는 길은 물질적 유여함을 기대하지 말고 가난도 각오해야 하는 길이다. 바리새인들은 주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예수께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율법에 의하면, 이웃의 밀밭 사이로 지날 때 이삭을 따먹는 것은 가능하였다(23:25).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는 추수의 행위나 노동의 행위가 아니고 배가 고파서 얼마큼 따먹은 것뿐이었으므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비난한 것이다.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사무엘상 21:1-6에 보면, 진설병[성소의 떡상에 차린 떡]은 제사장들이 먹는 떡이지만(25:9), 다윗의 일행이 몹시 배가 고팠을 때, 그들에게 제공되었다. 또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율법에 규정된 제사들을 다 드려야 하였다(28:9-10). 그것은 예외적인 일들이었다.

[6-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께서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거기에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이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실상, 구약시대의 성막과 성전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참된 사실이었다.

또 예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6:6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인용하시면서, 그들이 그 말씀의 뜻을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함이 있다. 이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가 아니고, 다윗의 경우나 제사장들의 경우와 같이 부득이한 일들에서의 자유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예배 의식보다 자비한 마음을 원하신다.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보다 남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즉 이 경우 제자들의 배고픈 형편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가복음 2:27에 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규례들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다. 신명기 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출애굽기 20:10, “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출애굽기 31:13,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인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 곧 참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또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주실 참된 안식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이루셨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6-17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참된 안식을 잃어버렸다.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는 참 안식이 없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심으로써 우리는 참 안식을 얻게 된 것이다.

죄는 안식을 잃어버리게 했으나, 죄사함은 참 안식을 회복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11:28) 또 요한복음 14: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리며 또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9-14]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 . . .

예수께서는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송사하려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을 비난하려는 자들은 그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으려 애썼고 그것을 안식일 문제에서 찾을 것 같았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이 안식일에도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붙잡아 내는 것을 예를 들면서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시고 교정하시기를 원하셨다.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한 존재인데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함을 암시하셨다.

그런 후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 마른 손을 내밀자 그 손은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어떻게 마른 손이 그렇게 회복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하였다. 말씀으로 마른 손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 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였다. 실상 안식일을 범한 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한 바리새인들이었다. 자신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며 예수는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그 날 예수님을 송사할 꼬투리나 찾았고 그를 죽이려 공모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악한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신 것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악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5-21]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 . . .

예수께서는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자 많은 사람이 그를 좇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예들 외에도,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병 고침의 사역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성경의 진실한 증거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그를 따르며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또 주께서는 병 고침 받은 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외치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함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이 인용문은 구약성경 이사야 42:1-3인데, 히브리어 본문에서가 아니고 헬라어 70인역 본문에서 인용되었다.)

주께서는 오늘날 어떤 전도자들과 같이 세속적인 마켓팅 방법을 사용해 자기를 선전하며 떠들썩하게 활동하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조용한 사역을 하셨다. 겸손한 자는 자신을 감추지만, 교만한 자는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를 자랑한다. 예수께서는 겸손하셨고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에게는 떠들썩한 활동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문을 통해 그에게로 모여왔다. 주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듯이 연약한 자들을 오래 참으시고 마침내 죄인들의 구원을 다 이루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감히 말할 수 없는 말이다. 인간으로서 누가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그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날로 구별된 날이다. 그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감히 그러한 말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예수께서 참된 신성 즉 참된 신적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그는 바른 인격자가 아닐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든지 미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가 아니고 그가 주장하신 그대로 성전보다 더 큰 자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는 한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고 그 외에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말로만 자신을 증거하신 것이 아니고 친히 병 고침의 능력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믿고 체험하며 그에게 복종하자.

둘째로, 안식일의 의미를 알자.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안식을 상징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었다. 또 우리는 오늘날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킬 때 단순히 예배 의식을 중시하는 데 머물지 말고 참된 경건과 사랑을 실천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마음을 열고 사모하며 또 서로 사랑하고 연약한 지체들이나 처음 교회에 찾아온 자들을 기쁨으로 맞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교회를 비방하거나 주의 종들을 비방하거나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를 비방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교회를 건립하는 자들이 되자. 그것이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용한 사역을 본받자. 오늘 교회들은 본래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교회들은 온갖 떠들썩한 행사들을 도모한다. 교회의 예배들도 더 이상 전통적인 조용한 예배가 아니고 매우 소란스러운 축제적 행사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에 가르친 대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성경말씀을 힘써 배우며 서로 교제하고 사랑하고 구제하며 전도해야 한다.

22-37,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심

[22-30] 그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데리고 . . . .

그때에, 아마 그 안식일에,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귀신은 악한 영이며 사람들에게 정신적 연약을 일으킨다. 즉 사람에게 건전한 생각과 건전한 감정과 건전한 의지 대신에 연약한 생각과 연약한 감정과 연약한 의지를 갖게 하며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과 감정이나 음란한 생각과 감정을 갖게 하고 또 거짓말을 하게 한다. 또 귀신은 육체적 연약도 일으킨다. 이 사람은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가 되었다. 그는 시력을 잃었고 아마 청력도 잃었고 벙어리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셨다. 그 벙어리[눈멀고 벙어리된 자](전통본문)는 말하며 보게 되었다. 그러자 무리들은 다 놀라 말하였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메시아를 가리킨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말하였다(35:1-2, 5-6).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위가 이런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경건한 보수신앙을 가진 성도들같이 보였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도리어 그를 귀신의 왕의 힘을 입은 자로 비난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는 사람들의 모든 생각을 아신다. 그는 말씀하셨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 같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의 아들들은 귀신을 쫓아내었던 사도들이나 아니면 당시에 자칭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신인양성(神人兩性)이 한 인격을 이루신 자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크신 하나님이시며(딛 2:13) 참 하나님이시다(요일 5:20). 세상은 마귀와 악령들이 활개치는 곳인데,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 속에서 활동하는 귀신 곧 악령을 쫓아내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 임한 증거이다. 그 병자는 영육의 회복을 얻었다. 그는 바른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눈멀고 벙어리 된 그의 몸도 고침을 받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임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그가 말씀하신 강한 자는 마귀를 가리키고 마귀를 결박한 자는 사람으로 오신 자신을 가리켰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생각과 뜻과 입장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의 교회를 건설하려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과 우리의 입장을 그의 생각과 그의 뜻과 그의 입장에 일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교회를 건설하는 자들이 아니고 파괴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악한 비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비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주께서는 모든 죄와 악한 비방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살인과 간음의 죄라도, 또 하나님을 비방한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훼방하며 비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성령을 비방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그런 죄의 경계선에 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도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한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성경에 말씀한 진리를 안 후 짐짓 범하는 죄’(10:26)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와 비슷하다.

오늘날 은사 운동이나 거짓된 신비주의는 예수님이 보이신 증표를 가지지 않는다. 그 운동은 교리적 교훈적 정통성이 없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사람을 높이고 거룩함과 절제가 없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때도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다. 그는 오늘날 자신을 높이는 세속적 신비주의자들과 완전히 다르시다. 성경은 거짓된 신비주의에 대해서 조심하라고 교훈한다. 마태복음 7:22-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9-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33-35]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 . . .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나무와 그 열매는 같이 간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힌다. 우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 사람도 그렇다. 우리는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말은 사람의 중요한 행위이다. 우리는 사람의 말을 보고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악한 비난을 내뱉는 것은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고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셨다. 그것은 마귀의 자녀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3:7에 보면, 세례 요한도 그에게 왔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그렇게 불렀었다. 요한복음 8:44에 보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셨고, 또 마태복음 23:33에 보면, 그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육신적 의미가 아니고 정신적 의미이다. 사탄은 죄의 근원자이다. 독사의 자식들은 사탄의 죄성을 받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 사람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선한 말을 할 수 없고 악한 말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 . . .

예수께서는 또,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무익한이라는 원어(아르고스)무익한, 쓸데없는, 부주의한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말은 그 인격의 표현이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쓸데없이 혹은 부주의하게 던진 한 마디 말이라도 심판날에 그 말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도 하고 우리의 말로 정죄를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고 참된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가 선한 말을 하려면 우리는 먼저 중생해야 한다. 중생의 새 생명을 얻은 자만이 선한 말과 행실을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3:5).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얻었다(딛 3:4-5). 이제 중생한 자는 평소에 선을 쌓는 인격 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언어생활의 훈련도 해야 한다. 야고보서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말에 온전한 자가 온전한 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에 관하여 성경에 증거 된 많은 증거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예수님은 죄로 인해 멸망할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누구든지 회개하며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는가?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알자.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 즉 통치권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이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선한 말만 하자. 무엇이 선한 말인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과 그 모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하는 말이 선한 말이다. 우리는 열 정탐꾼처럼 불신앙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고 남을 함부로 비방하지 말고 존중하고 그에게 유익이 되도록 선한 말을 해야 한다.

38-50, 가장 큰 표적

[38-40]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 . . .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이미 들었으나 그것들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항상 악하고 음란하다. ‘악하다는 말은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해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음란하다는 말은 부부관계의 윤리를 지키지 않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또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은 부부관계의 윤리가 흔들리는 시대인 것 같다. 또 음란을 조장하는 문화나 풍조가 많은 것 같다. 매춘(賣春) 행위도 성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의 풍조를 대항해야 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구하며 지켜야 한다.

예수께 나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심령에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자 한 것 같지는 않고 단지 기적을 보려는 흥미를 가진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을 보이거나 기적을 추구하는 기적주의적 종교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1:22-23). 기독교는 기적주의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전함으로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거룩한 새 삶을 살게 하는 교훈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3일만의 부활을 가리켰음이 확실하다. 예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암시한다. ‘밤낮 사흘이라는 말은 3일을 가리키는 대략적 표현일 것이다. 예수께서 무덤에 계셨던 시간은 금요일 저녁부터 주일 새벽까지, 즉 정확히 말하면, 하루 반쯤이었지만, 성경은 그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말한다(16:21; 고전 15:4).

[41-4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선지자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시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였으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치 않았다. 또 솔로몬 왕 시대에 남방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듣고 그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심히 먼 곳에서 많은 수행원을 이끌고 방문하였으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단지 물질적 차원의 기적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니느웨 사람들보다 못하고 남방 여왕보다 못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들은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였지만,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그를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많은 귀신들도 내쫓아주셨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마치 빈집과 같이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쫓겨났던 귀신이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자기가 나왔던 그 집에 들어가 거하듯이, 이 악한 세대의 나중 형편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 세대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그 세대의 주인 노릇을 할 것이며 더 악한 다른 귀신들과 더불어 그 세대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믿다가 타락한 자들, 즉 종교적 배교자들과 이단들은 세상보다 더 악한 것 같다.

[46-50]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 . . .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다. 예수께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의 남동생들과 누이들이 있었다(13:55-56; 6:3). 예수님은 맏아들이셨다(1:25 전통본문; 2:7).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으며 심지어 죄가 없이 출생했고 후에 승천했고 기도의 대상이며 하늘의 여왕이라는 천주교회의 교리는 비성경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교리이다.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께서는 말하던 사람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께는 육신적 가족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 즉 본래 신()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나의 동생들이라고 부르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그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28:10).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9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성경에 밝히 증거된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도사역을 하기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4:17; 1:15).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말했고(17:30), 또 자신이 전한 내용을 요약하기를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말했다(20:21). 또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6:22에서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3:23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이 죄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의 순종임을 밝히 보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들과 부활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특히 그가 주신 요나의 기적즉 그의 부활은 가장 큰 기적이며 믿을 만한 증거이다.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요나보다 큰 자이시며 솔로몬보다 큰 자이심을 알자. 그러므로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되지 말고 그를 영접하자. 니느웨 사람들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스바 여왕처럼 그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또 그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를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자. 하나님의 뜻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한 가족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육신의 가족관계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영적 가족관계이다. 우리는 이미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 가르친 모든 선한 교훈을 듣고 마음에 두고 힘써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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