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주기도문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금식과 재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십니다.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고 이 세상 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구하고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참된 경건의 삶(마 6:1-34)
1-4절, 은밀한 구제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 . . .
주께서는 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전통 사본에는 ‘의’라는 말이 ‘구제’라고 되어 있다. 구제는 주요한 의의 행위이다. 주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적 구제를 경계하시고, 은밀한 구제를 강조하셨다. 외식적 구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급이 없다.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혹은 ‘받고 있느니라].” 외식자들은 자기의 구제 활동으로 사람의 영광과 칭찬을 구한다. 그들은 ‘정말 사랑이 많은 사람이야, 구제를 많이 하는 좋은 분이야!’라는 사람의 칭찬을 이미 상으로 받은 것이다. 그러니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상은 없을 것이다.
[3-4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 . . .
주께서는 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전통사본에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는 말 가운데 ‘드러나게’라는 말이 있다. ‘은밀하게’라는 말(엔 토 크륍토)과 ‘드러나게’라는 말(엔 토 파네로)이 대조를 이룬다. 사람 앞에 외식적으로 행한 구제와 선행은 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상이 있을 여지가 없지만, 은밀하게 행한 구제는 천부께서 드러나게 갚으실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드러난 행위만 보고 칭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밀한 행위를 보시고 보상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은밀하게 선행과 구제를 하자.
5-8절, 바른 기도의 태도
[5-6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 . .
주께서는 바른 기도의 태도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은밀한 기도이며 다른 하나는 중언부언하지 않는 기도이다. 첫째로, 주께서는 기도할 때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주께서는 외식적 구제를 경계하심같이 외식적 기도를 경계하셨다. 외식자들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를 한다. 그래서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참 기도 많이 한다, 참 경건하다”는 칭찬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기보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이며, 이것이 외식이다. 주께서는, 외식자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 기도가 가장 이상적 기도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기도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나는 기도한다’고 알리거나 보이려는 기도가 아니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도다운 기도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밀한 기도를 들으시며 ‘드러나게’(전통사본) 갚으실 것이다.
[7-8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 . .
둘째로, 주께서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중언부언’은 헛된 말의 반복이나 주문을 가리킨다.
기도의 간절함에서 나오는 말의 반복은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그러나 무조건 말이 많으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미신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인격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바른 마음에서 나온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면 기도의 많은 말은 의미가 없고 효력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태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 사실 그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영적 유익이 되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롬 8:28).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인격적이게, 차근하게 기도할 것이며,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기도할지를 생각하며, 무엇이 중요한 기도 제목일지를 묵상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 대화의 주제를 생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기도 제목들을 생각할 것이다.
주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일들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신다.
물론 그는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을 주시며(엡 3:20)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한 것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또,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 곧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기도는 신앙 성장을 가져온다. 기도는 우리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는 골방 기도와 인격적 기도를 힘쓰자.
9-13절,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9절a]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외식자들처럼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고 즉 주문 외우듯이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지 말고, 바른 기도를 하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제자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하시는 뜻으로 ‘너희는’이라는 말을 강조하신 것 같다(원문에 인칭대명사 휘메이스가 쓰였음).
주께서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표현하셨다. ‘하늘’은 문자 그대로 하늘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본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신다고 표현하였고 또 엘리야와 예수님 자신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증거하였다. 성경은 땅은 인간에게 주셨지만,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고 말하였다(시 115:16).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또한 하나님께서 높으신 하나님, 초월자이신 하나님,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의 창조자, 보호자, 공급자이심을 나타낸다. 그의 피조물인 인류가 넓은 의미에서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잃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를 경외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모든 거룩한 존경과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이다(소요리문답 100문답).
[9절b]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여섯 가지의 내용을 말씀하셨다. 첫 번째 내용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이다. ‘거룩’은 구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구별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고 영광스런 이름이시다. 그의 이름은 우리가 큰 두려움을 가지고 불러야 할 이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며 그를 높이고 찬송하며 그가 창조자와 섭리자이심을 고백하여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그를 부정하고 그를 무시하고 경멸하며 그를 대적하고 욕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물질적 부요와 존귀, 세상의 권력, 육신의 쾌락을 더 크게 여기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며 음란과 거짓과 탐욕으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비방을 받기도 한다. 로마서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10절a] 나라이 임하옵시며.
두 번째 내용은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이다. ‘나라’에는 백성과 땅과 왕과 법이 있다. 원래, 하나님의 나라의 왕은 하나님이시며 백성은 인류이며 땅은 세상이고 법은 그의 명령이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켰더라면, 그 나라에서의 삶은 평안과 행복의 삶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질병도 가난도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그 나라에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결과, 평안과 행복의 삶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그의 통치권의 회복을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전도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전도요, 영혼 구원이요, 교회의 설립이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소요리문답 102문답은 이 나라를 ‘은혜의 나라’라고 표현하였다. 죄인들이 사탄의 나라로부터 구출되어 이 은혜의 나라에 들어오고 그 안에서 보호함을 얻는다.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은택을 맛본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거룩의 열매를 맺으며(롬 6:22) 항상 기뻐하고(살전 5:16; 빌 4:4) 평안하며(요 14:27; 살후 3:16) 또 물질적 공급도 받고(마 6:33) 건강도 누린다(잠 3:7-8; 약 5:14-16).
그러나 신약교회들은 요한계시록 2-3장에 증거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서 보듯이 아직 미완성이며 불완전하다. 성도 개인의 성화가 불완전한 만큼, 지상 교회들은 불완전하다. 거기에는 죄가 있고 다툼과 갈등도 있고 분열과 하나님의 징벌도 있다. 비록 지교회와 지교단이 권징을 성실히 시행하여야 하지만(고전 5:13; 계 2:14, 20), 전체 교회의 완전 성화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보류된다(마 13:29).
이와 같이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복음이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고 택한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충만하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도하는 것, 즉 전도와 영혼 구원과 참된 교회의 설립을 위한 기도이다.
이 기도는 특히 교회의 말씀 전파의 사명을 위한 기도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9:37-38). 우리는 교회에 말씀의 봉사자들이 부족하지 않고 또 그들이 힘있게 말씀을 전하기를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1,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게 하옵소서.”
또 우리는 교회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교회는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회개시키고 회개한 자들을 경건과 거룩함으로 굳게 세우며 깨끗한 예배와 봉사를 늘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소요리문답은 이 나라를 ‘영광의 나라’라고 부른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부활하고 변화될 성도들이 들어가 영생할 나라이다. 거기에는 죄도 질병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5:3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러므로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택자들의 구원과 바른 교회의 설립과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광의 나라를 대망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을 재촉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벧후 3:12).
[10절b]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세 번째 내용은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다. 소요리문답 103문답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셋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시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하시사, 하늘에서 천사들이 그러하듯이, 모든 일들에서 그의 뜻을 알며 순종하고 복종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천사들과 죽은 성도들을 통해서이다. 하늘에 있는 악한 천사들은 땅으로 추방되었고 선한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겸손하고 민첩하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 완전케 된 죽은 성도들도 늘 하나님을 찬송하며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땅이 문제이다.
땅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다. 사도 바울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라고 불렀고 우리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공중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그를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라고 불렀고 또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요일 5:19). 땅은 악인들의 세계이다. 그들은 성도들을 핍박하며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뜻하신 바를 이 땅 위에서, 역사 속에서 다 이루신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였고 그를 대항하였다. 그것이 죄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기도 내용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첫째로, 택자들의 구원과 전도와 참된 교회의 건립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6). 하나님의 뜻은 택자들의 구원이요(요 6:39-40)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마 28:19; 막 16:15) 참된 교회의 건립이다(단 2:44; 마 16:18). 둘째로, 죄 없는 삶,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1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네 번째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이다. 소요리문답 104문답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넷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로 인하여 우리가 현세의 좋은 것들의 적당한 분량을 받으며 그것들과 함께 그의 복을 즐기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한다. 네 번째 기도의 내용은 우리의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잠언 30:8도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소원을 두 가지 기본적 소원 중 하나로 증거하였다.
인간은 육신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주실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일용할 양식도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메마르고 거친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다. 그것은 비상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잘 보여준다. 시편 104:14-15는, “저가[하나님께서]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 근심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天父)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다(마 6:25-26). 또 그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31-32).
우리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 근심할 필요는 없고 단지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고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우리가 바로 살 때 그는 우리에게 지혜와 건강과 직장을 주시고, 또 수고의 대가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고 그가 주시는 복은 영적인 복뿐 아니라, 육신적, 물질적 복도 포함된다.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다섯 번째 내용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이다. 소요리문답 105문답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다섯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값없이 용서하시기를 기도하는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타인들을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구할 용기를 좀 얻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에서 ‘우리의 죄’는 구원받은 이후의 죄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의 옛 죄악들은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남은 죄악성 때문에 때때로 실수하고 범죄한다. 성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런 실수와 죄가 죄 아닌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모든 행위는 여전히 다 죄이다.
죄는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 죄씻음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10). 목욕했다는 말씀은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의 속죄의 보혈로 죄씻음받음을 말씀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목욕한 자라도 발이 더러워져서 발을 씻듯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도 날마다 삶의 현실에서 실수하거나 범죄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로막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근심하시고 우리의 양심도 하나님과의 간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그는 우리의 죄의 용서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다른 이를 용서함에 결부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엡 4:32). 그것은 형제 사랑에 있어서 첫 번째로 필요한 일이다. 남의 잘못을 용서함이 없이는 형제 사랑을 바르게 실천하고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많은 죄와 허물을 용서하셨는지를 일깨우시는 깊은 뜻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을 때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고 또 그때 하나님 앞에서 담력을 얻고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3절a]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섯 번째 내용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소요리문답 106문답,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여섯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험을 받아 범죄치 않도록 지키시거나,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에 우리를 붙드시고 건져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많다. 마귀는 우리로 불신앙과 낙심과 죄에 떨어지도록 시험한다. 주께서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22:31).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도다”라고 말했다(벧전 5:8).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다(엡 4:26-27).
주께서는 우리가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거나 혹 떨어져도 거기로부터 구원함을 얻도록 도우신다. 그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22:31-32).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여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2:46; 마 26:41). 사도 바울은,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교훈하였는데(엡 6:10-11), 그것은 진리의 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고, 그것들과 함께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그는 말하였다(엡 6:14-18).
[13절b]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께서는 또 기도의 맺는 말로서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이는, 왜냐하면’이라는 말(호티)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소요리문답 107문답은,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주께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주기도문의 맺는 말은 우리가 기도에서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우리의 격려를 얻을 것과; 우리의 기도들에서 그를 찬송하여, 그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칩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들으시리라는 확신의 증거로서 ‘아멘’이라고 말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심과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심과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주심도 그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의 제목들을 아뢰는 것이다.
[14-15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 . . .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에 첨가하여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다.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을 반드시 용서하라고 교훈하시며,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렇게 단호히 선언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이 큰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옥 갈 만한 죄인들인 우리를 구원하여주셨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를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받는 것과 같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자를 용서하는 것은 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을 탕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1일 품삯이며,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다. 그러면 1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이다.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은 그 가치의 차이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이처럼 우리가 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는 작은 용서를 해야 한다.
16-18절, 은밀한 금식에 대하여
[16-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은 비상한 경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효력 있는 기도 방법이다.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그 모습이 영화롭게 변화된 사건이 있은 후에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던 간질 환자를 고쳐주신 후 금식기도의 효력에 대해, “이런 유의 것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7:21 전통본문). 사도행전 13:2-3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금식하며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음을 증거한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러나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금식할 때 금식하는 모양을 내지 말고 평상시와 같이 행함으로 은밀하게 해야 한다.
19-24절,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 . . .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은 자신을 위해 돈이나 재산을 저축만 할 줄 알지 선한 일들에 쓸 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보물은 현금이나 금은 패물과 오늘날 은행 적금이나 주식과 펀드나 집과 땅 같은 부동산을 가리킨다. 땅에 쌓아둔 재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듯이 스스로 손실이 생기기도 한다. 물가상승으로 돈 가치가 하락하기도 하고 금값이 떨어지기도 하고 은행 이자가 낮아지기도 하고 주식값, 펀드 값이 하락하고 집값이나 땅값이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또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듯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손실을 당하기도 한다. 도적질을 당하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며 심지어 악한 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돈이나 부동산의 강탈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 . . .
예수께서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돈과 재물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한 일,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쓰는 것을 말한다. 주께서는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을 위한 후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전도자로 보내실 때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시며 “이는 일꾼이 저 먹을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10).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에바드로디도 편에 자기에게 보내준 선교헌금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하였다(빌 4:18). 선교헌금은 우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다.
누가복음 12:33은 주께서 가르치신 이 말씀에서 주머니를 만들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구제하는 것임을 증거하였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께서는 주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는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40).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꾸어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구제는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다.
[21절]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또 “[이는]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있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보물과 마음은 같이 간다.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을 위해 마음을 쓰고 돈도 쓰게 된다. 자식을 보물로 여기는 부모는 자식을 위해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아내를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그를 위해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처갓집을 위해 돈을 쓰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저는 젊을 때 어려운 유학생활 중에, 비록 먹을 것은 많이 사지 못하고 입을 옷은 때때로 헌 옷을 사 입었지만, 사명을 위한 신학서적들을 사려고 애썼고 저의 아내는 이 일에 저보다 더 긍정적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전도와 교회 설립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구제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더 귀하시다. 그는 우리의 가장 귀한 보화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우리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그의 사랑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이 크다.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얻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천국 기업과 하나님의 자녀 신분의 회복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전도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참된 교회 설립과 부흥을 위해, 바른 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위해, 문서 사역, 인터넷 사역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
[22-23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맑으면(NASB), 좋으면(NIV)]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다. 눈은 몸의 등불과 같아서 우리의 눈이 좋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지만,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네게 있는 빛’은 우리의 영안(靈眼), 즉 영적 지식, 진리의 지식, 깨달음, 분별력을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고 힘있게 살 수 있으나,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대신 재물을 가치 있게 여기는 자는 영안이 어두운 자이다.
창세기 13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잘못된 선택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이주하였는데,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큰 죄인들이었다. 롯은 외적인 조건만 보고 영적, 도덕적 조건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직장이나 직업이나 거주지를 택할 때 월급이나 직위나 외적 조건만 보지 말고 먼저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여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생각과 태도이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는 한쪽을 더 위하거나 다른 한쪽을 더 소홀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고,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인가, 재물인가, 즉 하나님인가, 세상인가를 택해야 한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기운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씨라고 말씀하셨다(마 13:22). 재물에 대한 애착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국 실패케 할 것이다. 주께서는 자기에게 찾아온 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으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나갔다(마 19:21-22). 주님의 택함을 받아 열두 사도 중에 속하였던 가룟 유다는 결국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흥정하였고 그들은 그에게 은 삼십 개(아마, 30스타테르 즉 120데나리온, 노동자의 4개월 품삯)을 달아 주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인데, 그때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딤후 3:1-5).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며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이며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오직 하나님과 그의 뜻을 구하는 자들만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였다(요일 2:15-17). 결국, 사람은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 하나님인가, 세상 즉 물질인가,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만 참 주인으로 섬긴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재물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수단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 재물에 종노릇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재물을 이 땅에 쌓아두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재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도와 구제를 위해 언제든지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그는 “너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돈을 땅에 쌓아두기만 하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믿음 없는 생활이다. 예기치 못한 일을 위해, 또 노후의 대책을 위해, 어느 정도의 저축은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은행 저축이든지 부동산 구입이든지 땅에 쌓아두기만 한다. 그는 그것들을 다 못쓰고 죽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남겨두는 것도 큰 의미는 없다. 그것이 자식에게 유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삶이다.
둘째로, 주께서는 “너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돈과 재산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전도 사업을 위해, 참된 교회의 건립을 위해, 바른 신학교 사업을 위해, 바른 문서 사역과 인터넷 사역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하는 선한 구제 사업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주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돈을 쓴다. 우리가 땅의 헛된 일에 가치를 두면 그런 것에 돈을 쓸 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선한 사업에 가치를 두면 그것을 위해 돈을 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이 밝은 정도대로 살 것이다. 우리의 눈이 어두우면 세상의 헛된 것을 위해 살 것이지만, 우리의 눈이 밝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선한 사업을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우리 목숨까지도 드릴 것이다. 또 그것은 주의 말씀대로 참으로 우리를 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나님인가, 돈인가?
25-34절,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 . . .
예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하므로 재물을 크게 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먹고 입는 것의 관심은 결국 재물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꼭 잘 먹어야 사는 것이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며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행복지수는 가난한 나라에서도 높다고 하며 장수마을은 반드시 부자 동네가 아니라고 한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이며 유익한 교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선한 교훈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을’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음식의 내용, 옷의 종류에 너무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하지 말고 더 좋고 아름다운 옷을 입으려 하지 말고 그런 것들에서 인간의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인간의 행복은 그런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먹을 수 있는 것을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는 것이 좋다. 맛있는 음식이 몸에 해로운 경우도 많다. 과자나 빵, 동물성 기름이 많은 음식, 위에 너무 짜거나 맵거나 자극적인 음식, 흰밥 같은 탄수화물의 치우친 섭취 등. 또 과식은 오히려 몸에 나쁘다. 잡곡, 야채, 과일, 견과류, 생선, 계란, 육류 등 골고루 소식하는 것이 좋다.
주께서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음식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옷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이 사람을 위해 있고 옷이 사람을 위해 있다. 그러므로 옷도 단정하고 편한 옷이면 좋다. 물론 색깔도 밝고 예쁜 것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옷이 너무 요란하거나 단정치 못한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피부에 좋은 옷이 좋은 옷이고 몸에 편한 옷이 좋은 옷일 것이다.
주께서는 그런 것들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염려는 평안이 없고 근심하며 걱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염려하는 사람은 마음이 두근거리고 생각이 많다. 또 심하면 머리가 아프기도 한다. 염려하는 마음은 요동하는 바다, 풍랑 이는 바다 같다. 평안은 마음의 단순함이다. 거기에서 마음의 고요함, 조용함이 생기고 마음의 평정과 평온이 생긴다. 평안한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 같다. 이런 평안에서 기쁨과 행복이 나온다. 그러나 불안과 염려와 걱정은 우울함, 두려움을 만들고 그런 사람은 행복하지 못하다.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天父)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훨씬 더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도 기르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고 말씀하셨다(욥 38:41). 하나님께서는 새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을 기르신다. 시편 104:25-29는,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한다.
‘공중의 새’는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새’를 가리킨 것 같다. 새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부지런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우리는 새들보다 훨씬 더 낫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위해 준비하실 것이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예수께서는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키’라는 원어(헬리키아)(KJV)는 일차적으로 ‘나이, 수명’을 가리킨다. 또 ‘한 자’(페퀴스)라는 말은 시간의 측정에도 사용된다.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그 수명을 한 자나 더 연장할 수 있느냐?’라고 번역했다(NASB, NIV). 우리가 염려해도 우리의 키를 조금 더 크게 할 수 없고 우리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없는 것이라면, 왜 쓸데없이 염려하느냐는 뜻이다. 우리의 염려는 우리의 목숨을 위해, 또 몸의 건강을 위해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준다. 마음의 평안은 건강에 유익하지만, 마음의 불안과 염려는 병이 될 뿐이다.
[28-29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천 짜는 일]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심지어 솔로몬도 그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옷에 대한 염려를 언급하시며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씀하신다. 모든 꽃은 다 아름다운 것 같다. 색깔도 모양도 아름답다. 들판에서 자라는 작은 안개꽃 같은 것도 보잘것없어 보여도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런지 예쁘다. 식물의 생명력은 강하고 신기하고 기특하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들의 백합화는 심는 수고나 천을 짜거나 재단하고 바느질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으나 솔로몬의 아름다운 옷보다 더 아름답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옷이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 인간의 솜씨보다 하나님의 솜씨는 훨씬 더 뛰어나고 놀랍다.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아름다운 백합화나 다른 들풀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시적인 들풀들도 그처럼 아름답게 입히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입히실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와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창 1:26, 27). 하나님의 자녀 된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 교인들은 더욱 존귀하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우리는 믿음이 적다. 하나님은 온 데 간데없고 물질세계만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물질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은 안 보이고 물질세계만 보는 무지하고 믿음 없는 자들인 것이다.
[31-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것임이니라. 이는]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아심이니라].”
주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다시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두 가지 드셨다. 첫째로, 물질생활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그들은 미래에 대한 염려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아는 우리들, 또 하나님의 아신 바된 우리들, 세상 끝날까지 그의 보호와 도우심과 공급을 받을 우리들은 달라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 즉 우리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천부(天父)’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보호자시요 공급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물질생활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 . . .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엉뚱한 처방 같고 게으른 자의 처방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열심히 일해야 잘 먹고 살고 행복할 것 같으나 실상 그렇지 않다. 그래서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드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먹이고 기르시며 입히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곧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며 행하는 것을 말한다. 죄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에덴동산에서 의식주에 부족이 없이 영원히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이 세상에서는 땀 흘려 일하는 것도 포함한다. 구약성경은 우리가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 가르친다(출 20:9). 성경은 우리가 개미에게 가서 근면함을 배우라고 가르친다(잠 6:6-11). 성경은 게으르지 말라고 가르친다(롬 12:11). 성경은 일하기를 힘쓰며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친다(살전 4:11; 살후 3:10). 우리는 다 부지런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곧 의식주의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가 먼저 힘쓸 것을 힘쓰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다.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이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족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이것은 중요한 교훈이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내일 일을 염려하게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이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족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인생은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날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 하루로 충분하다. 내일의 것을 오늘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살면 된다. 사람은 일을 할 때 조금 염려하기도 할 것이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된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염려는 불신앙에 불과할 것이다.
25-34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먹는 음식의 내용이나 입는 옷의 종류보다, 우리의 목숨과 몸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음식을 골고루 조금 먹으면 되고 옷을 편안하고 단정하게 또 겨울에는 따뜻하게 입으면 된다.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자.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된다. 우리는 한 날의 괴로움이 그 날에 족한 줄 알고 살면 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누가 밥 먹여주냐?’고 우리를 비웃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실 것을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가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보존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믿고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들을 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인생의 바른 길이며 또 행복의 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주의 모든 필요들을 채워주실 것이다.
[사무엘상 1장 히브리어 강해] 아들 잉태를 위한 한나의 서원기도(삼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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