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0편에서 시편 기자는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회고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자신을 고쳐주셨다고 회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응답받게 됩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건지심을 찬송함(시 30:1-12)
[1-3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 . . .
다윗은 말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의 대적들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를 끌어내소서,”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또 그는 심한 질병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나를 고치셨나이다,”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본문에 ‘음부’(쉐올)는 ‘무덤’을 가리키고, ‘무덤’(보르)은 ‘구덩이’라는 뜻이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도에게는 종종 죽음의 위기가 있다.
다윗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2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어려운 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자는 행복하지만,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줄 모르는 자는 불쌍하다. 고난은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단련시키신다(롬 5:3-4).
다윗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체험하며 하나님을 높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곤란에서 건져내셨고 병을 고치셨고 죽음의 구덩이에서 그를 끌어내셨다. 다윗은 이 체험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위해 살게 되었다. 성도는 기도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더 높이며 그를 섬기며 그를 위해 살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마다 그러할 것이다.
[4-5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주의[그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다윗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라고 말한다. ‘그의 성도들’(원문)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경건한 자들을 가리킨다. 또 ‘그의 거룩한 이름에’라는 원어(레제케르 코드쇼)는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경건한 자들은 그의 뛰어나신 위엄과 영광, 그의 크신 긍휼의 영광을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해야 한다. 찬송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5절 전반부를 다시 직역하면, “이는 잠시간은 그의 진노 안에 있으나 생명은 그의 호의 안에 있음이로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잠시 동안 지속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했다(애 3:33). 그는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매를 들어 그들을 때리시지만, 자기 백성을 영원히 노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생명은 그의 호의 안에 있다”고 말한다(KJV). ‘생명’이라는 원어(카임)는 ‘평생’이라는 뜻보다는 ‘복된 생명’이라는 뜻 같다. 그것은 구원과 기쁨과 복을 포함하는 개념일 것이다. 물론 본문은 이러한 생명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전반부의 ‘잠시간’이라는 말(레가)과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벌하시지만 또한 고치시고 회복시키신다. 선지자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했다(호 6:1). 하나님의 호의는 그의 진노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이다.” 사사기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평강의 기간은 그가 내리신 징벌의 기간보다 보통 2배에서 심지어 5배 가량까지 길었다. 예를 들어, 사사 옷니엘 때에 이스라엘은 8년간 징계를 받았으나 그들이 회개했을 때 그들은 40년간 평안을 누렸다.
[6-7절]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 . . .
다윗은 또 말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형통할 때 자신감과 안정감을 가졌었다고 고백한다. 사람은 평안하고 형통할 때 육신적 자신감과 안정감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지 못하는 육신적 자신감과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실상 그런 자신감과 안정감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삶에는 평안과 고난이 번갈아 나타나며 고난이 닥치면 사람은 여지없이 자신의 연약과 무력을 드러낸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힘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였다(빌 4:13). 우리의 힘과 평안은 하나님 안에서만 있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자신의 산을 세우셨다고 고백한다. ‘내 산’ 곧 다윗의 산은 다윗의 왕국을 가리킬 것이다. 그 왕국은 시온산에 세워져 있을 뿐 아니라, 구약성경은 왕국을 ‘산’으로 자주 표현한다(사 2:2; 단 2:35, 44). 자신의 왕국이 하나님의 은혜로 굳게 세워졌다는 다윗의 깨달음은 바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127:1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고전 15:10). 우리의 가정이나 사업도 그러하다.
그러나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우시니 자신이 근심하였다고 말한다. 세상이 밝은 것은 태양 때문이며 그것이 가려지면 땅 위에 그늘과 어두움이 생기는 법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인생은 평안과 형통을 누리지만, 그 빛이 가려지면 그에게 즉시 환난과 곤고함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이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8-10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다윗은 죽지 않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9절 전반부를 직역하면, “나의 피에,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이다. ‘나의 피에’라는 말은 ‘내가 피 흘려 죽을 때에’라는 뜻 같다. 그것은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라는 구절과 동일한 뜻이라고 보인다. 다윗은 자신이 죽고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이 죽지 않기를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그가 죽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9절 후반부가 그것을 보인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는 삶의 의미를 하나님께 찬송하고 그의 진리를 선포하는 데서 찾았다. 이러한 삶의 목표는 매우 성경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3:7, 21). 사도 바울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고후 5:15).
다윗은 자신의 생명의 회복과 연장이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으로 될 것을 믿었다.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다. 우리의 생명의 연장과 강건함 그리고 의롭고 바른 삶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11-12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 . . .
다윗은 또 말한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다윗은 전에 슬픔 가운데 있었고 베옷을 입은 자와 같았다. 그것은 그의 대적들 때문에, 그의 질병 때문에, 죽음의 위협 때문에이었다. 그는 큰 질병 중에, 죽음의 위기에 있었다. 이 세상은 슬픈 일이 많은 세상이며 우리도 구원받기 전에는 슬픈 세상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고 그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다. 죽음의 곤경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이처럼 기쁨의 춤을 출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에게서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뻐하였다(출 15장). 에스더 때 유다인들은 멸절될 위기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로 구원받았을 때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해 즐거움이 되었던 12월 14일과 15일을 부림절로 지키기 시작하였다(에 9:21-22).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때 슬픔이 변하여 춤추며 즐거워함이 되리라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렘 31:13).
다윗은 그런 기쁨으로 춤추며 기뻐하였다.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한다(살전 5:16; 빌 4:4).
하나님의 큰 구원을 체험한 다윗은 이제 심령에서 나오는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고 영원히 그에게 감사를 올리고자 한다. ‘내 영광으로’라는 말은 ‘내 영혼으로’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목적도 그의 은혜를 찬송케 하시기 위함이다(엡 1장).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야 한다(히 13:15).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이 있음을 알고 두려워하지 말자. 성도에게는 대적자도 있고 몸이 아플 때도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때도 있고 주께서 얼굴을 가리우셔서 근심하며 슬퍼할 때도 있다.
우리는 고난받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의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다. 그는 우리의 대적이 이기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은총과 기쁨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잠깐 그의 진노 안에 있으나 우리의 생명은 그의 호의 안에 있을 것이다. 저녁에는 울음이 있어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이다. 우리의 슬픔은 변하여 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자. 우리는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감사하자. 우리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원히 그에게 감사하자.
[사무엘상 13장 설교말씀] 사울이 합당치 않게 제사 드림(삼상 13:1-23)
'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니엘 12장 주일설교말씀] 마지막 때의 예언(단 12:1-13) (0) | 2022.04.05 |
---|---|
[이사야 15장 하나님 말씀] 모압에 대한 경고(사 15:1-9) (0) | 2022.04.05 |
[출애굽기 성경 주석 강해설교] 만나와 메추라기(출 16:1-36) (0) | 2022.04.02 |
[창세기 29장 주석 강해설교말씀] 야곱의 하란 생활-결혼(창 29:1-35) (0) | 2022.04.02 |
[사무엘상 13장 설교말씀] 사울이 합당치 않게 제사 드림(삼상 13:1-23) (0) | 2022.03.27 |
[민수기 21장 설교말씀] 광야의 놋뱀과 예수님과의 관계(민 21:7-9) (0) | 2022.03.26 |
[창세기 24장 주석 강해설교말씀] 이삭의 아내를 택함(창 24:1-67) (0) | 2022.03.26 |
[여호수아 6장 주일설교말씀] 여리고 성을 정복함(수 6:1-27) (0) | 2022.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