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3장에서는 하만이 유대인들을 말살하여 죽이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인의 편입니다. 하만의 계략을 알고 하나님은 하만을 죽입니다. 결국 자기의 계략에 넘어가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만의 등장과 모르드개의 위기(에 3:1-15)
에스더서 3장을 열면 거기에 에스더서에서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하만이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이것으로서 에스더서에서 일종의 주인공이랄까, 스타의 역할을 감당하는 네 사람이 다 등장한 셈이 됩니다. 첫째는 아하수에로왕이요, 둘째는 에스더요, 셋째는 모르드개요, 넷째는 하만입니다. 이 네 사람이 엮어가는 이야기가 바로 에스더서의 줄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에스더서를 읽을 때마다 네 사람의 이름은 항상 기억을 하고, 그들의 역할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지 만 5년이 넘어가는 시점입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혜성과 같이 등장을 합니다. 과거 왕정시대에는 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조금의 공로가 있던지, 왕의 눈에 들기만 하면 저 말단에 있는 사람도 하루아침에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일들은 우리가 성경에서도 자주자주 대하게 됩니다. 좋은 예가 요셉 같은 케이스가 아닙니까. 요셉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총리대신이 되는 것을 기억하고 있고요, 다니엘이 포로의 신세에 지나지 않는 초라한 사람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천하를 호령하는 권좌에 앉은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니 하만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가 무슨 공을 세웠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습니다.
하만은 최고의 권좌에 앉자마자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왕이 하만을 세우면서 명령한 것이 있습니다. [하만이 행차하는 곳에는 왕의 신하는 물론이요, 모든 백성이 꿇어 절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만이 나타났다 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꿇어 엎드려 열굴을 땅에 닿도록 절하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이런 명령이 떨어지고 나니까 대궐 문에 드나들면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만이 지나간다는 말만 들리면 전부 나와서 허리를 굽혀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의 양부인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옆에 있는 동료들이 너 그러다가 생명이 위험하다고 계속 경고를 하고, 절해야 된다고 계속 옆에서 충고를 했습니다만, 모르드개는 끝까지 절을 하지 아니하면서 그 이유를 캐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유대인이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이유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는지 기회를 잡아서 출세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만이 끝까지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밝히면서 절하기를 거절 하니까 그 정보를 하만에게 고자질함으로써 자기에게 어떤 출세 길이 열리지 않나 하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만이 지나 다닐 때, 모르드개나 사람들 전부를 살필리는 없지요. 그런데 그 정보를 입수한 다음에는 가만히 보니까 정말로 한 사람이 엎드리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알아 보니까 정보대로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만의 가슴에 적개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는 그런 못된 놈이 누구냐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모르드개만이 아니라, 모르드개가 속한 모든 유대인을 전멸시켜야 비로소 그의 마음에 분이 풀릴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 전부를 몰살시킬 음모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음모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왕의 재가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왕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모르드개는 절을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자기가 유대인이다 하는 그 대답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왕이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지나갈 때에 백성들이 엎드려 절하는 것은 옛날에는 온 세계가 다 같은 관습이 아닙니까? 에스더도 왕 앞에 나갈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왕후가 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유대인이다.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서 문지기였는지, 사무를 보았는지는 알수 없지만, 하여튼 왕궁에서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왕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으며, 또 높은 신하 앞에서 그가 엎드려 절을 하지 아니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절을 했을 것이고, 또 절을 했으니까 지금까지 직업을 가지고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만에 대해서는 무엇이 달라졌길래, 모르드개가 끝까지 절을 하기를 거부했고, 자기의 생명까지 내놓을 각오를 하고 비장하게 버티는 것일까? 이것은 분명히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창세기 3:15절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두 세력의 갈등이 여기에서도 전개 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역사의 흐름과 함께 끝까지 대립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선포하셨는데, 나중에는 가인과 아벨의 대립으로, 더 내려 와서는 아브라함과 이방인의 대립으로, 유대민족과 다른 이방인과의 대립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에스더서에 이르러서는 모르드개와 하만이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아주 불꽃 튀는 대결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주변에도 마찬가집니다. 마치 모르드개와 같이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무엇인가 절개 있는 행동을 하려는 하나님의 자녀의 그룹이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를 기회만 있으면 해칠려고 하는 하만의 후손들이 우리 사회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팽팽한 두 세력이 맞서고 있는 이 분위기를 이 3장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대립을 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립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고, 또 성경 전체가 이 대립상을 하나의 역사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대립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6:14절 이하를 우리가 보아도 [하나님과 벨리알이 어떻게 함께 하겠으며, 믿는 자가 믿지 아니하는 자와 어찌 멍에를 함께 하겠느냐?] 하고 말씀을 했는데, 대립은 이 역사의 종말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와서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거룩한 선민이 있는가 하면, 바깥에서 마음대로 죄짓고 있는 가인의 후손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 존재 자체가 이미 대립을 의미합니다. 그렇죠. 그러니 대립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모르드개가 절하기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하던 것을 왜 이 사람에게는 안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흥미 있는 일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부분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는 뚜렷한 해석을 밝혀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의 대답은 한마디 밖에 없습니다.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안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이라는 말은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나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경배하고 영광 돌리는 사람이지 그 외에는 절할 수 없다 하는 것을 나는 유대인이다 하는 말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감을 잡을 수 있지요. 우선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만, 두 가지만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다 받아들여도 좋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 보완하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첫째는 하만이 아말렉 자손이기 때문에 모르드개가 절하기를 거절했다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하만의 배후를 이렇게 말하지요. 아각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각이라면 아말렉 족속의 왕가의 이름입니다. 애굽의 왕가의 이름은 바로지요. 바로는 어떤 개인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하만은 분명히 아말렉 후손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을 우리가 볼 때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씨도 없이 멸족시키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한 부족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아말렉입니다. 그 이유가 신명기 25:17-19절에 나와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헤매고 다닐 때에, 얼마나 피곤하고 힘일 들었겠어요. 하루종일 걸으면서 지치고 비실비실하는 노약자들은 저 꽁무니에 떨어져 가지고 그야말로 기다시피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말렉 족속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뒤 따라와서 그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칼날로 치고 그들의 물건을 탈취하는 잔인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약한 틈을 타서 비겁하게도 뒤에서 백성들을 살육하면서 물건을 탈취해 간 이 아말렉을 하나님이 가만히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명령했습니다.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나라를 굳건히 세우게 되면 그때에 너희는 반드시 아말렉의 이름을 이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다시 말하면 아말렉은 씨도 남기지 말고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을 모세가 남겨 놓은 유언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빚처럼 지고 살았습니다. [야, 우리가 아말렉 족속을 진멸해야 할 텐데, 언제 그 일을 완수하지] 그러나 400년이 지나도록 이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사시대에 몇 번 아말렉을 토벌하기 위해서 일어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워낙 아말렉 사람들이 강하고 중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덤비지를 못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싸웠더라면 벌써 이겼을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감히 덤비지를 못하고 400년을 넘기도록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말렉 백성들의 뿌리를 뽑기는 너무나 벅찬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첫 번째 왕이 나왔습니다.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지시를 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아말렉을 치되, 남녀노소 불문하고 생명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멸하라. 그리고 모든 우양가축을 다 멸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사울은 그 명령을 따라서 토벌하러 갔습니다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산채로 생포해 왔고, 나중에는 자기 눈에 드는 살진 양과 소들을 그대로 끌고 와 버렸습니다.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하나님이 떠나시고 나니까 어린 다윗을 보고 질투를 참지 못해서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지 않아요. 그러니 보세요. 사울왕이 이처럼 비참한 꼴이 된 것은 아말렉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모르드개는 어느 지파의 사람입니까? 베냐민 지팝니다. 즉 사울 왕의 후손입니다. 기스의 증손이라고 했습니다. 기스는 사울 왕가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모르드개는 하만이 어떤 사람인가, 그의 출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언제 알았는지는 몰라도 철천지 원수인 아말렉, 자기의 위대한 조상 사울 왕을 몰락시킨 아말렉, 베냐민 지파하고는 정말로 상종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아말렉의 후손이 높은 자리에 않은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에게 굽신거리면서 절을 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나는 죽어도 못한다. 하는 마음을 모르드개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기에서 문제가 있다면 아각이라는 것이 아말렉의 아각이냐? 하는데 이 해석은 상당히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배워야 합니다. 악의 잔뿌리를 남겨 놓지 마십시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말렉을 하나도 없이 진멸했다면 오늘날 이 하만이 등장 할리가 없지요. 그리고 이 하만 때문에 페르시아에 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1년여 동안 그야말로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고통을 받았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악의 잔뿌리를 남겨 놓으면 나중에는 뽑지 못할 만큼 커 버립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그런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조그마한 악이라고 아, 그까짓 것! 하고 내버려 둡니까? 천만에요. 조그마한 악을 가정에 남겨 놓으므로서 그 악이 나중에는 전부를 망치는 원인으로 등장할 수가 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한 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때문에 두고두고 상처 입은 것, 고통받은 것 생각하면 무엇으로 그 대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도 부모가 가정에서 악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적당히 남겨 놓은 그것 때문에 자손들이 얼마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허덕이고 있습니까? 좋은 예가 첩을 데리고 살았다. 또는 이 여자, 저 여자를 관계해서 여러 자녀를 낳았다고 했을 때에, 그 자손들이 재산 문제로 싸움이 벌어지고, 생일 하러 모였다가 멱살잡이를 하다가 감옥으로 들고 날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가 조그마한 죄, 큰 죄는 물론이고요. 이것을 자를 때에, 잘라야 되는데, 자르지 않고 남겨 둠으로서 그 뿌리가 자자손손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깨닫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는 꼭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악은 지극히 작은 잔뿌리라도 마지막까지 뽑아야지 남겨 놓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아말렉이 누굽니까? 여러분에게 하만이 누굽니까? 내 가까운 곳에 하만이 누구며, 내 가까운 곳의 아말렉의 후손이 누가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끝까지 상종하지 않아야 되고, 끝까지 머리를 숙이지 않아야 될 존재가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는 모르드개에게서 이 강한 신앙의 지조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수에게는 우리는 절할 수 없다! 우리들은 사람을 원수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금하시는 악에 대해서 우리가 굴복할 수가 없지요. 아무리 세상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준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신앙절개 다 팔아먹으면서 그 앞에 가서 절할 수는 없지요.
대적해야 될 자가 누군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끝까지 머리 숙이지 않고 정면대결 하면서 꼭 이겨야 할 대상이 누군가를 우리는 날마다 분별하고 살아야 합니다. 누굽니까? 마귀요, 죄요, 악이요, 우리의 신앙생활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시험과 올무입니다. 나의 영혼을 부패시키고 내 영혼으로 하여금 병들게 하는 모든 것들이 내 주변에 있는 아말렉이요, 하만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모르드개처럼 나는 유대인이다. 나는 베냐민 자손이다. 하는 기백과 긍지를 가지고 대결할 줄 아는 사람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즉 모르드개의 신앙 양심상 절을 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이라고 했지요. 유대인이라는 이 말은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무엇이라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왕이 하만이 지나갈 때마다 꿇어 엎드려 절하라 하는 명령 속에는 모르드개에게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왕이나 높은 귀인에게 절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성격이 있었을 것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드개의 생각에 이런 식으로 사람 앞에 절하는 것은 내 신앙 양심상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 앞에만 이렇게 섬기고 절하라고 했지, 어떤 인간이나 다른 신 앞에 절대 이런 식으로 절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유대인이 아니냐? 하는 무엇이 와닿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만에게는 엎드려 절하는 방식이 달랐는지도 모릅니다.
이 해석은 대단히 좋은 해석이라고 보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에게도 이런 시험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니엘은 매일 자기 방에 가서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의 생활을 습관처럼 해왔습니다. 다니엘의 흠을 잡아서 어떻게 하든지 권좌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던 질투심 많은 신하들이 흠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으니까 다니엘의 신앙에서 흠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왕에게 가서 아첨을 합니다. 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사람들이 절하게 하고, 다른 신에게 절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만약에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를 사자굴에 던져 넣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다니엘이 자기의 생명에 위협을 느꼈을 때에 평소에 하던 기도생활이라도 적당히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골방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게 살짝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는 나는 다리오왕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말해 놓고는 자기 혼자서 속으로 기도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 양심이 그것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내 신앙양심을 거역하면서 나는 적당히 넘어갈 수는 없다고 다니엘은 결심을 하고 실천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지금, 모르드개에게 일어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만 해야 할 경배 행위를 하만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나는 절대로 할 수가 없다. 내 신앙양심으로는 할 수 없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양심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범하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마음의 소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좀 다르게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에 대해서 목사님들은 두 그룹으로 갈라졌습니다. 1938년 제27차 장로교 총회가 모였을 때에 총회장과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신사는 일본당국에서 분명히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것은 국가의식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앞에 가서 머리를 숙였다고 해서 우상숭배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는 신사에 가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소! 이것은 분명한 우상숭배요. 양심의 차이의 문젭니다. 한편에서는 국민의식이라고 하고, 한쪽은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감옥으로 끌려가서 순교를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장사를 하다가 보면 신앙양심에 관한 문제가 많이 발생하리라고 봅니다. 꼭 같이 예수 믿는 집안인데, A라고 하는 상점과 B라고 하는 상점이 나란히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A라고 하는 상점의 주인은 장사를 하는 사람이 약간의 거짓말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가 없지. 이것은 장사를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괜찮은 거야. 그래서 조금도 가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손님이 찾아오면 당신이 첫 손님인데, 이익을 남기지 않고 본전에 드립니다. 한 푼도 안 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 남기는 뭐가 안 남아요. 그러나 B라고 하는 상점의 주인은 아무리 그것이 상술이라도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 아무리 상술이라고 궤변을 부려도 그것은 거짓말이니까. 하는 신앙양심상 할 수가 없어. 그래서 앞에 놓인 케이크를 보고 본인이[이것 오늘 아침에 가지고 왔어요. 어제저녁에 팔다 남은 거예요?] 하고 물어보면 오늘 가져왔다면 금방 사가지고 갈 것을 [아 어제저녁에 좀 늦게 사가지고 온 거예요.]라고 말하니까 [하루가 묵은 것이구만] 하고는 그냥 가버립니다. 금방 손해가 났지요. 그러나 아무리 손해가 나도 나는 신앙 양심상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 하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렇게 신앙양심에 차이가 납니다.
사실 우리가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앙양심만큼 악용을 많이 당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교파가 지금 수백 개가 될 것입니다. 그 많은 교파분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는데, 많은 교회가 서로 나뉘고, 교단이 나누어지면서 싸웠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무엇을 들고 나왔는가 하면 신앙양심을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의 신앙양심상 너희들과는 함께 교파를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신앙양심상 이런 문제를 가지고 우리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신앙양심상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20, 30년의 역사가 지난 다음에 대부분의 경우가 그것은 신앙양심이 아니라, 감정이었고, 인간의 고집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므로 신앙양심이라고 할 때에는 대단히 신중해야 합니다. 신앙양심을 바로 쓸려면 몇 가지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첫째는 영성이 밝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영성이 밝아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 가지고, 신앙양심이 어디 있어요. 영적인 눈이 어두워 가지고, 영적인 눈이 병들면 일본 우상 앞에 가서 절하고도 우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또 자기는 신앙양심이라고 우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만이 신앙양심 운운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 주의 하셔야 할 것은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양심을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옹고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겸손히 들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신앙양심도 필요하다면 수정할 수 있는 마음의 폭이 있어야 됩니다. 아직도 복음성가는 예배시간에 부르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안되느냐 하면 신앙양심상 안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찬송가냐? 통일 찬송가에 있는 것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새로 개편을 할 때마다 복음성가 중에서 새롭게 찬송가에 들어가는 것은 안 부를 거냐고 하면 그런다는 거예요. 신앙양심상 그럴 수 없냐는 거예요. 이 정도로 고집을 피우면 이거 세상에서 제일 힘든 대상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행히 그런 분들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제가 복음성가를 잘 몰라서 많이 부를 수가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지요.
오늘날 교회가 어지러운 것 중에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도 나도 신앙양심을 들고 나오면서 고집을 피우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말이 아닐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신앙양심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폭을 넓혀서 다른 형제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래서 자기보다 더 좋은 견해가 있으면 자기 스스로 수정할 수 있을 때 신앙양심을 말할 수 있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것은 신앙양심이 아니라 자기의 주견이 되고 맙니다. 또 하나 신앙양심을 말하기 위해서는 좀 기다리면서 시간과 함께 살피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급하게 금방 생각이 난다고 해서 앞뒤도 살피지 않고 들고 나오면 안 됩니다. 과연 이것이 내가 신앙양심을 걸고 해야 할 말인지, 안 해야 될 것인지 깊이 묵상할 줄 아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모르드개가 그렇게 숙고를 한 다음에 하만에게 절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 보세요. 에스더가 왕궁에 끌려 들어갈 때에는 에스더 보고는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지금 유대인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지요. 어떤 때는 숨기고 어떤 때는 밝힙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이것을 신앙양심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언제 침묵하는 것이 좋으냐? 이것도 신앙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언제 말할 것이냐? 하는 것도 신앙양심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르드개는 분명히 무엇인가 기준이 있어요.
우리에게도 그렇지 않습니까?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고, 자기 자신을 노출시킬 때가 있고, 조용히 숨길 때가 있고... 신앙양심에 따라서 처리하는 것입니다. 6.25가 터졌을 때, 북한에 있는 목사님들에게는 양 떼를 버려두고 나 혼자 남한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양 떼와 함께 앉아서 순교를 할 것이냐? 하는 것을 놓고 몹시 고심을 했습니다. 그때에 목사님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종들은 지금 피해야 한다. 바울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부의 목사님들은 그러나 나는 피할 수 없다. 양 떼를 두고 어디를 가느냐?라고 강단을 지키다가 행방불명된 분들이 많습니다. 자, 이것도 신앙양심입니다. 누구는 잘하고, 누구는 못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때, 그때의 자기의 신앙양심을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언제는 숨기고, 언제는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들어 내놓고 말하고... 이것이 도대체 제 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하나 보시기 바랍니다. 2장 마지막에 보면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다가 거기서 일하고 있는 왕의 내시 가운데 빅단과 베레스라고 하는 두 사람이 가만히 아하수에로왕을 암살하려고 모의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모르드개가 이 정보를 에스더를 통해서 왕에게 알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처단한 사건이 나옵니다. 자, 보세요. 언제는 모르드개가 왕에게 충성을 하려고 왕을 죽이려는 사람을 고자질해서 왕에게 순종하고, 언제는 하만에게 절하라고 하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언제 충성하고, 언제 거역하는 것입니까? 이것도 신앙양심으로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남의 자녀들은 항상 양심의 거리낌이 없도록 때를 따라 분명하게 자기의 처신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준은 하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옳으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을 분명히 분별할 줄 아는 신앙양심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동의 기준을 잃어버립니다. 기준을 잃어버리면 나중에는 세상과 타협하고 악과 손을 잡아 버리고, 자기의 고집을 내세우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만이 이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진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 가지고 날짜를 뽑았지요. 12월 13일에 완전히 유대인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하만이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날짜가 너무 길어요. 지금 1월인데, 12월로 정했으니 11달이나 남았습니다. 그동안에 어떤 방해가 있을지 모르고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지요. 무슨 문제든지 너무 오래 끌면 불상사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비를 뽑다가 보니까 12월 13일이 뽑혀서 그대로 시행하다가 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자, 그런데 잠언 16:33절에 보면,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시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사람이 제비를 뽑기는 뽑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배후에 있습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1달 후로 뽑히게 하시고, 모르드개가 달릴 장대에 하만이 오히려 거꾸로 매달리게 할 계획을 하나님이 가지시고 진행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악인들이 완벽하게 계획을 한다고 하는 그 속에도 틈을 내시고 그 완벽하다는 계획 때문에 오히려 함정에 빠지게 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놀라우신 하나님이신지 몰라요.
그래서 지금,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밤이 캄캄하게 짙어 있는 것 같지만, 그 캄캄한 밤 중에도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광명한 아침을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신 것을 우리는 에스더서를 통해서 봅니다. 하만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지금 대낮같이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조금 지나면 캄캄한 밤을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 것을 봅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의 백성을 통해서 선하신 그의 섭리를 통해 그 백성에게 모든 선을 갚아 주시기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 보이지 아니하는 손길! 이것을 우리는 에스더서를 통해서 봅니다. 에스더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면,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모르드개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면,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그 당시의 유대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오늘의 하나님의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원수들의 계략을 무너뜨리시고, 모든 악한자들의 함정을 하나님께서 메꾸시고, 거룩한 백성인 우리가 저 하나님 나라까지 신앙의 승리를 하면서 걸어갈 수 있도록 오늘도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성경인물 다윗 설교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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