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설교말씀 중에서 베드로의 고백 주님을 사랑하나이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붙잡혀 가고 베드로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심문받을 때 여종의 말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배신한 것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해 주시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네가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선 듯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만이 알고 있습니다. 이 시간 베드로의 고백처럼 모든 것은 주님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주님이 알고 있습니다. 앞날도 주님이 알고 있습니다. 겸손히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신앙생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목: 베드로의 고백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설 교 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말씀: 요 21:15-17
요 절: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
주 제: 주님의 쉐마적인 사랑의 질문을 항상 기억하며 대답할 준비를 하자. “주님을 최고로 사랑합니다”
지난 주일에 살핀 요한복음 20장과 오늘 본문 21장 사이에 20:30-31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또한 요한복음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21:25에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오늘 본문 21:1-24은 이 결론 부분 사이에 있는 것으로 특별히 강조하고 있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표적 기사가 다 기록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 가나의 표적, 5장에서 38년 된 중풍병자의 치유, 6장의 오병이어 표적, 물 위로 걸으신 표적, 9장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 치유, 11장에 죽은 지 나흘 되던 나사로를 살리심, 20장에 주님의 부활하심 등 요한복음서에서는 몇 가지 기적들을 제외하고 공관복음에서 다루지 않던 표적들만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삼 년 반 동안 행하신 표적들을 다 기록한다면 책의 분량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말씀을 전하신 것을 다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녹음을 한다거나 비디오를 찍거나 카메라고 찍거나 CD로 제작해도 그 분량은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합니다.
과연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남기는 중요한 이유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12), 그리스도이십니다(요 4:25-26, 11:27).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습니다(요 3:16-17, 5:24)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최후의 만찬 후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 14:27-28)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부으러 갔다가 빈 무덤 임을 확인하고 천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막 16:7)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면은 갈릴리에서 주님과의 만남과 부탁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마 28:16)
갈릴리는 주님의 공생애 대부분 시간을 보내셨던 사역지였습니다. 이곳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훈련하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이곳에 다시 방문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담대히 전했어야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다가 아직 오시지 않으니 저들은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을 몰라 심심풀이로 고기나 한번 잡아보자 하는 심정에서 바닷가로 나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주동하였습니다. 심지어 요한조차도 말리지 못하고 동조하고 맙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저들의 모습입니다.
그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삼 년 동안 고기 잡는 기술을 잊어버렸나요? 아니면 어부의 감각이 둔해졌나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쫓아갔던 저들이, 다시 옛 생업으로 돌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에 부활의 주님께서 해변가에 서셨으나 아무도 주님인 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두 번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에서.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로 오신 것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Children, have ye any meat?)" 여기서 ‘아이들아’(paidia) 부르심은 요즘 말로 ‘어이 젊은이들, 고기가 좀 잡았소?’로 이해하면 됩니다. 메튜 헨리는 주석하기를 마치 아버지가 자녀들을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부르는 호칭으로 해석합니다. 저들의 대답은 실망스럽게 ‘없습니다’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5절에서 베드로가 3년 전에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던 그날도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니 두 배에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받는 비결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 고백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그분의 말대로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동안 저들은 왼편만 부지런히 던졌을 것입니다. 저들의 경험과 상식과 고정관념으로는 왼편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그곳만 공격을 했으나 놀랍게도 오른편에 고기가 몰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물에 많이 잡혀 일곱 명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3년 전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깊은 곳만 던지지 않고 밤새 다른 곳에 그물을 내렸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체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이제 실패와 좌절의 밤이 지나고 희망과 용기의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눈물의 밤은 지나고 기쁨의 새벽이 왔습니다. 어두운 시간이 지나고 낮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변화의 중심점에 부활의 주님께서 서 계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힘들어하고 상처를 받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있을 때 늘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동정해 주시며,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면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축복과 은총을 받고 있으면서도 너무 좋아서 이렇게 인도하신 분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던 요한(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that disciple whom Jesus loved)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하니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얼른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내려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평소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시기심도 많았고 호기심도 많은지라, 항상 남들보다 앞서 행동하고 앞장서 왔습니다. 주님이 해변에 계시다는 요한의 속삭임을 받고 더 이상 배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한편 그는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주님과 대화하지 못했고 피하기도 했으나 갈릴리로 와서 약속하신 대로 주님께서 오시니 너무 반가웠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가 육지로부터 거리가 한 오십 간(약 200규빗=92미터쯤) 되니,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와서 육지에 올라왔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 되사 평소 모습과는 달랐지만 아무도 주님을 의심하지 아니했습니다. 숯불에 불이 피워져 있고 그 위에 생선과 빵이 있었습니다. 방금 잡은 고기를 좀 가져오라 하니 제자들은 일일이 세어 보니 큰 고기가 153마리였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엄청난 고기를 일순간에 잡았으니 얼마나 놀라고 기쁜 일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일순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153의 뜻을 한번 상고해 봅시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히브리어 글자를 합치면 153이 나옵니다. 중세 기독교의 수비학인 '게마트리아 Gematria'는 문자를 수로 사용하는 방법과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수비학의 광대한 해석체계를 말합니다. 즉 게마트리아의 본질적인 요소는 문자가 수를 나타내고 수가 문자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숫자에 의한 문자 풀이법은 바벨론의 사르곤 2세(B.C.723~705) 시대의 비명을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숫자에 의한 문자 풀이법은 유대 전통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A.D.1세기경 유대고 랍비였던 엘리에제르는 경전 해석의 32가지 방법 중 29번째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BC 3세기 이후 그리스 문명의 영향 속에서 히브리인의 숫자 표현 방식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알파벳 순서를 수의 기호로 사용하는 그리스 방식에 따라 유대인들도 히브리 자음 순서로 수의 기호를 표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자를 수의 기호로 사용함에 따라 특정한 단어가 특정 수로 나타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경이 모든 낱말과 각 글자는 일정한 숫자를 갖고 있어 서로 풀어지거나 얽힐 수 있으며 신비스러운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인데. 즉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단어들이 '코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영향은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랍비들이나 필사자들에 의해 구약성경의 문자 자음이 의도적으로 조작되는 경우가 일어났습니다. 단어와 숫자를 혼용하는 방식은 신약성경에도 종종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Beni ha-Elohim)이란 낱말이 맛소라 구약성경에서 일곱 번만 나오며, 히브리어 낱말 수의 값은 153(2+50+10+5+1+30+5+10+40)이 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 부활 후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라는 점을 들어 구약 하나님의 아들들과 연결시켜 교회(그물) 속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리스어 '물고기'의 단어 수의 값이 '153×8'(1224)로 나오는데 '그물'도 '153×8'의 값이 나옵니다. 특히 '노타리곤'으로 물고기 '익두스(ΙΧΘΥΣ)'는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Ιησουs Χριστοs Θεου Ύιοs Σωτερια),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의미를 만들기도 합니다.
둘째로, 153의 뜻은 숫자를 다 더해보면 9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1+5+3=9, 수에서 9는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worthless)는 의미입니다. 숫자에서 8이 가장 수의 가치가 높습니다. 9가 들어간 수는 모두 9가 되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666도 숫적 가치는 9입니다. 6+6+6=18=1+8=9 (9와 18 숫자는 가톨릭이나 프리메이슨에서 성수인 까닭)
9x1=9
9x2=18=1+8=9
9x3=27=2+7=9
9x4=36=3+6=9
9x5=45=4+5=9
9x6=54=5+4=9
9x7=63=6+3=9
9x8=72=7+2=9
9x9=81=8+1=9
9x10=90=9+0=9
9x11=99=9+9=18=1+8=9
9x12=108=1+8=9
9x13=117=1+1+7=9
9x14=126=1+2+6=9
9x15=135=1+3+5=9
9x16=144=1+4+4=9
9x17=153=1+5+3=9 ....
이처럼 어떤 수이든 9를 곱하면 그 결과는 9입니다. 제자들이 153마리 고기를 잡게 하신 것은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니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라 (120문도, 12지파, 12 사도, 7 집사 등)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153 숫자가 주는 의미는 새로운 출발을 보여 줍니다.
셋째로 17은 헛된 숫자 18(6+6+6)=1+8=9 보다 하나가 모자란 숫자로 축복의 숫자입니다. 요셉은 17년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성장하다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이집트로 종으로 팔려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130세에 아들의 초청을 받고 이집트 이민 생활을 시작하다가 147세에 죽음으로 그의 마지막 17년간을 사랑하는 요셉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헤브론(아버지 이삭의 거처)에 돌아와서 이삭과 17년간 살다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알버트 바안스 주석). 창 7:11에 의하면 노아와 가족, 그리고 피조물이 방주에 들어간 지 일주일 되던 날인 노아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홍수가 시작됩니다. 창 8:4에 의하면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정박합니다. 숫자에 얽힌 예화로 탈무드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세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맏아들은 내 유산 중 1/2, 둘째는 1/3, 셋째는 1/9을 가져라고 하면서 말을 17마리를 남겼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 말을 가지고 1/2, 1/3, 1/9으로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랍비가 있어 자문을 구했더니, 이 랍비는 기도하더니 하늘의 지혜를 받아 자기가 타고 온 말을 이들에게 주면서 이 18마리로 계산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8÷2=9 (+)18÷3=6 (+) 18÷9=2 = 17
도합 17입니다. 그래서 랍비는 자기가 타고 온 말을 도로 찾게 되었답니다. 이때 제공한 말을 ‘사랑’(Ahava)이라고 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사랑의 희생이 들어가니 모든 문제가 풀리고 모두 다 만족하게 되고, 그 사랑은 또 다른 문제 해결을 위해 남겨지더라는 것입니다.
많은 물고기가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했습니다.(요 21:11) 3년 전에 두 배에 가득 물고기를 잡을 때는 그물이 찢어졌었습니다(눅 5:6). 그때 찢어진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의 뒤를 쫓았습니다. 이번에도 엄청난 고기가 잡혔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했다는 것은 이 그물은 교회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찢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주님께서는 바로 세상의 것은 헛되고 아무것도 남는 것은 없으나 사랑만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가르치시면서 9x17 = 153의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만이 남으며,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주님께서는 피곤하고 지쳐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Come and dine!) 우리가 식사를 할 때 누가와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달리 느껴집니다. 또 누가 준비했는가도 중요합니다. 또한 누가 돈을 내느냐도 중요합니다. 저는 장로님들이 사주시는 밥을 맛있게 먹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제가 지불하는 식사를 또 먹고 싶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아침 식사는 별미였습니다. 떡을 친히 가져다가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하십니다. 꿀맛입니다. 춥고 떨리는 시간에 따뜻한 숯불이 있습니다. 얼마 전 주님께서 체포당하신 새벽에 대제사장 뜰에 있던 모닥불 주변에서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었는데, 이제 갈릴리 모닥불에서 주님과의 서먹했던 관계가 회복되는 현장이 된 것입니다. 생선도 먹고 떡도 먹은 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진솔한 대화는 식후에 이뤄집니다. 그래서 중요한 회의를 할 때는 잘 먹은 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충분히 기도하고 생각하고 가장 창의적인 순간에 중요한 안건을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정책 당회를 가질 때도 좋은 환경에서 잘 쉬고 잘 먹으면서 하면 더욱 효과가 좋습니다. 주님의 질문은 아가페로 물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친구 간의 우정을 표시하는 필로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두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같은 대답을 합니다. 아가페로 물으셨는데 대답은 필리아입니다. 솔직한 대답입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십자가 고난을 멀찍이 피했던 그인지라 감히 아가페 사랑을 한다고는 대답을 못하지요. ‘주님 그렇습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필리아 수준의 사랑을 하고 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내 양을 치라”라고 사명을 주시고, 세 번째는 동사를 아가페에서 필리아로 바꾸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필로)하느냐?”하니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필로)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왜 주님께서는 세 번씩 질문하셨나요? 쉐마적인 질문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페), 너는 목숨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페), 너는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하느냐?(필로)’ 우리는 주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하시면, "예 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다짐하여 실천하십시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는 목양의 사명을 주십니다. 갈릴리 호반에서 가진 이 사랑의 대화와 다짐을 통해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그를 격려하시면서 사명을 주실 때마다 ‘나도 너를 사랑하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아니했노라’ ‘과거를 묻지 아니하노니 장차 나의 양 떼들을 돌보고 먹이며 양육해 달라’는 마음의 표시를 하신 것입니다.
쉐마(신 6:5)에 보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한 내용은 오늘 이 시간 나에게 물으시는 쉐마적 질문입니다. 1) 너는 마음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느냐? 2) 너는 뜻(목숨, 호흡)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느냐? 3) 너는 힘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우리는 이 대답에 늘 “아멘”이라고 대답할 준비를 합시다.
이뿐 아니라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까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무슨 뜻입니까? 거듭나기 전에는 자기 의지대로 살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진 인생은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잔도 마셔야 하고, 그런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9).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두 번째 소명입니다.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온전히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요한(주님의 사랑하는 그 제자, 만찬석에서 예수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을 보고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요 21:21) 묻습니다. 그래도 요한을 챙겨주는 이는 베드로입니다. 형의 역할을 잘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후에도 동역을 합니다. 주님의 답변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 21:22) 하십니다.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네가 온전히 바르게 서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오해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요한은 죽지 아니하겠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주님의 언급은 예를 들면 “내가 올 때까지(재림)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이 갈릴리 호반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있음을 기억하시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며 주님께 사랑고백을 하고 사명을 새롭게 받으십시다. “너는 나를 따르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며 온전히 주님만 따라가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손잡고 언제 어디나 언제 어디나 예수님 손잡고 언제 어디나 가리라/ 밝은 길에든지 어두운 길에든지 언제 어디나 언제 어디나 예수님 손잡고 언제 어디나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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