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 예수님이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가장 높은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다.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천사들은 기쁜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했다. 이 세상을 구원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목자와 천사의 방문(눅 2:8-20)
그리스도의 겸비에 따른 가장 비천한 사정에는 모두 그의 영광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여건들이 동반되었고, 그 영광은 그 비천함을 상쇄하는 것이요, 그 굴욕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있었지만, 바로 그 4에도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를 굳게 하려 했고, 그가 장차 높이 들리우게 되리라는 전조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그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눕게" 된 것을 보면, "분명히 이는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는 대로, 그의 출생에는 천사의 합창이 동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이 그에게 경배한다고 했다"(히 1:6).
마태복음에는 이 사실, 이 하늘의 임금의 도래가 이방인들인 현자들에게도 별을 통해서 알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사건이 천사 통해서 유대 목자들에게 알려진 사실을 보게 된다. 그들 각자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제일 잘 아는 언어를 선택하여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Ⅰ. 어떻게 이 목자들이 개입되었는지를 보자. 그들은 베들레헴 근방에 있는 "들에서 유하면서," "밤에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8절). 그 천사는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그들은 이 소식을 받을 준비를 못하고 있었다)에게로 가지 않고, 야곱과 같이 "장막에 거하는 평민들"이요, 에서와 같이 "교활한 사냥꾼들"인 초라한 목자들의 무리에게로 보내졌다. 적장들도 목자들이었다. 모세와 다윗은 특별한 의미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라는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도 저 순결한 직업을 가진 자들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다.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라는 소식이 모세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아마 지극히 경건했을 이 목자들에게 "큰 구원"의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소식이 전해지던 그때에, 그들은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비록 많은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하늘의 지식을 받기는 하지만). 그들은 "들에서 유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자들은 "자신들을 깨우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바짝 깨어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보고 듣는 것을 잘 못 알아서 졸고 있는 자들처럼 기만을 당할 수는 없었다.
2. 이제 그들은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예배 행위가 아니라 자기들의 직업을 이행해 나가고 있는 중에 받았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양 떼를 지키면서," 도적이나 죽음의 밥이 되지 않도록 감시하면서 있었다. 아마 여름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처럼 양 떼들을 우리에 가두지 않고 밤새도록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정직한 직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유한다만,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길은 결코 막히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Ⅱ. 그들은 천사의 출현에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9절). "보라. 주의 천사가" 홀연히 "그들 위에 임했도다" 즉 ‘에페스테(2186)’ - 그들 위에 섰도다. 아마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와서, 그들의 머리 위 공중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지극히 크다.
(영어) 성경에는 "그 천사"라고 했으므로, 앞에서(1장) 나왔던 천사가 다시 한번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즉 "가브리엘 천사"가 급속히 날아온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불확실하다. 천사가 "그들에게 임했다"(곁에 섰다-한글)는 것은, 그들이 그런 일을 거의 생각하거나 기대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은총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길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보다 "앞선" 길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천사가 하늘에서 온 천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들 주위에 주의 영광이 둘러"있음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밤을 낮과 같이 밝게 하는 영광이요, 하나님의 현현에 동반되곤 하던 영광이요, "하늘의 영광" 즉 "지극히 큰 영광"이요,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는 그런 밝은 영광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크게 무서워하게"되었다. 마치 어떤 불길한 소식을 듣고 놀라듯이 겁에 질리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죄책 의식이 그만큼 분명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징조는 진노의 사자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의당 느끼게 된다.
Ⅲ. 천사가 그 목자들에게 전해 준 전갈은 무엇이었는가?(10-12절).
1. 천사는 그들의 "두려움"을 "중지하라는 영장"을 가져왔다 - "두려워 말라. 너희들에게 겁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원수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너희의 친구들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2. 그는 그들에게 풍요한 기쁨의 제목을 주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내가 엄숙히 선언하노라. 너희에게는 그것을 영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느니라.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만 기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소식이란, 너희에게 오늘, 이 시간에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구원주, 그리스도 주이신 구주가 다윗 성에 나셨다는 것이니라"(11절). 예수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구세주) 요,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그는 "주"시다. 만민의 주이시다. 그는 절대 주권을 지니신 임금이시다. 아니 그는 하나님이시다. 구약 성서에서는 "주"가 "여호와"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영어 성경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하나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주"라고 했으나, 우리 성경은 "여호와"로 나옴 -역주). 그는 구주이시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만 구주가 되실 것이다.
"구주가 탄생하셨다. 그는 오늘 나셨다. 그리고 그것이 온 백성에 큰 기쁨의 제목이 되므로, 비밀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이 소식을 선포해야 하며, 너희가 원하는 자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는 미리 예고된 곳, 곧 다윗 성에 나셨다. 그리고 그는 너희에게 나셨다. 너희 유대인에게 그가 먼저 보내지셨으니, 너희들, 곧 비록 세상에서는 천하고 가난하지만 너희 목자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보내지셨다." 이것은 이사야서 9장 6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우리에게 한 아기가 났고, 한 아들을 주셨도다"라고 했다. "너희 인간들에게이지, 우리 천사들에게 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천사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셨다. 이 사실은 실로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제목이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분이 마침내 오신 것이다. 하늘과 땅이여, 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라. 그가 오시기 때문이니라."
3. 천사는 이 사실을 그들이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우리가 어떻게 베들레헴에 있는 이 아기를 찾을 수 있나이까? 지금 베들레헴에는 다윗의 후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너희는 이 표적을 보고 찾으라. 그는 구유에 누워 있느니라. 구유에는 분명코 다른 어떤 갓난아기도 눕혀 있지 않느니라."
그들은 아마 "너희는, 그가 비록 어린 아기이지만 법의를 입고, 그 동네에서 제일 멋있는 집에 위풍 당당히 누워 있으며, 부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아기를 보리라"는 말이 나올 줄로 기대했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너희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가 이 지상에 오셨을 때는, 그가 자신을 스스로 구별하셨다. 눈에 현저히 드러나게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겸비함을 보여줌으로 써였다.
Ⅳ. 천사는 이 엄숙한 시기를 맞이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냈다(13, 14절). 그 전갈이 한 천사의 입에 의해서 전해지자마자(이 소식이야 말로 아주 급속히 전해졌다). 갑자기 "하늘의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했다. 분명히 그 목자들이 들은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노래는 "아무 사람도 배울 수 없는" 저 노래(계 14:3)와는 달랐을 것이다. 이 노래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1. 이 역사(役事)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지극히 높은 데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나타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크게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자기들이 비록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시지는 않았지만 - 그 사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송축할 것이다(계 5:11, 12). 이러한 은혜를 정하신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또 하나님의 한 속성이 다른 한 속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속성의 영광이 실질적으로 더욱 확실히 되고 더욱 뛰어나게 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 사건을 만드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하나님의 다른 여러 작품(솜씨)은 그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구속(救贖)하심은 "지극히 높은 그의 영광"을 위함이다.
2. 사람들이여, 그것을 기뻐하자. "땅 위에는 평화요, 사람들에게는 자비(good-will)로다"(한글과는 후반부가 다소 다름-역주).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가 이 낮은 세상에 평화를 도입했고, 그 사이에 평화로운 왕래를 개설하였다. 하나님께서 평화로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면, 모든 평화가 거기서 유래되어 나온다. 즉, 양심의 평화, 천사들과의 평화,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평화가 온다.
여기에서의 평화란 "모든 선"을 뜻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으로부터 우리에게 넘쳐 나오는 모든 선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희망하고 있는 모든 "선"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자비의 위안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것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부조화되는 길에서는 어떤 "평화"도 "선"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의 길에도, 또 중보자에 의하지 아니하는 모든 길에도 평화나 선은 없다.
여기에 보면, 지극히 엄숙하게 "선포된 평화"가 있다. 원하는 모든 자는 와서 그 평화를 향유하게 하라. 땅 위에 평화가 있는 것은 "선의(善意)의 사람"(어떤 사본은 그렇게 되었다)에게이다 ─ ‘엔 안드로포이스(444)’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해 선의를" 가지고 있는 자요, 기꺼이 화해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평화가 있다. 또는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의를 가지신 그들에게이다.
천사들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며,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얼마나 귀히 여기고 있는가를 보라. 그리스도는 비록 천사들의 성질을 벗어버리고 오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얼마나 기뻐하는가를 보라. 그렇다면, 우리들이야말로 이 사건으로 크게 감동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로다"하는 이것은 "신실한 말"이요,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가 실증한 바요, "모두가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말이다.
Ⅴ. 목자들이 갓난 구주를 방문했다.
1. 그들은 의논을 했다(15절). 천사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는 동안은, 그들은 오직 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사들이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천사들은 나타나서 결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용무를 마치면 즉시 돌아간다), "목자들은 서로 '베들레헴으로 가자'라고 이야기했다."
윗 세상에서 온 특별한 전갈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에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갈로 스스로 노력하여 우리의 신앙을 돈독히 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하도록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고 관찰과 경험으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그 전갈(메시지)을 확증한다는 것은, 결코 천사들의 증언이나 거룩한 증언 그 자체에 대한 모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목자들은 의심쩍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즉 "가서 정말인지 아닌지 알아봅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가서 이루어진 이 일을 봅시다"라고 말했다. "주께서" 그렇게 "그것을 그들에게 알리셨거늘," 거기에 또 무슨 의심의 여지가 있겠는가? "천사들에 의해서 된 말은 견고하고" 틀림없는 진실이다.
2. 그들은 즉시 방문했다(16절). 지체 없이 그 장소로 "빨리 갔다." 아마 천사가 성경에 기록된 것(사관의 구유로 가라는 따위) 이상으로 그들에게 자세히 일러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을," 그리고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다." 그들이 찾아낸 "그리스도 주"의 빈한하고 초라한 모습이 그들의 신앙에 자극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가난하고 빈천한 처지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안락한 생활을 직접 체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이 보았던 천사들의 환상을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고, 자기들이 들은 천사들의 노래도 말해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던 것이었다. 그 동네에서 제일가는 귀부인이 찾아오는 것 이상의 격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들이 그 아이에 관해서 보았던 환상들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경험을 서로 나눔으로써, 그들은 서로의 신앙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Ⅵ. 목자들은 이 보도를 퍼뜨리려고 애썼다(17절). "그들이 그것을 보고" 즉 "그리스도 주"라는 것을 믿을 만한 것을 그 아기에게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지극히 만족했다. 그 아기의 사정이 비록 자기들처럼 초라했지만,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일러 준 사실과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마치 문둥이들이 주장했듯이(왕하 7:9에 보면, "오늘은 좋은 소식의 날이로다. 우리가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되리라"). 그들은 "자기들에게 들려진" 이야기의 전모를 "널리 알렸다." 즉 "천사"와 요셉과 마리아가 "이 아기에 관하여" 알려 준 것, 곧 그가 구주요, "그리스도 주"라는 사실, 그리고 그에게는 "땅의 평화"가 있고,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었던" 자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 등을 알렸다. 그들은 이 소식을 모든 자들에게 고했고, 그것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서로 일치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세상에 와" 있는 이때에도, 세상이 비록 그를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충분한 통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가? 진실로 왜 "사람들 모두가 목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기이히 여겼는가?" 말이다(18 줄어들). 목자들은 솔직 담백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감히 남을 속이리라는 의심을 받을 위인들이 못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믿을 만하며, 그들의 말이 참이라면, 메시아가 왕궁이 아니라, "말구유에"났다는 사실을 듣는 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천사들이 그 소식을 그렇게 "초라한 목자들"에게 알려 주면서 대제사장에게는 알리지 않은 사실도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구주와 구주에 대한 자기들의 의무, 또는 그로 인해 얻을 자기들의 유익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않았다. 오히려 그 사건을 "9일간의 기사(奇事)"처럼 방울져 떨어지게 했다. 오. 그 세대들의 경이로운 어리석음이여! 그들이 그토록 고의적으로 "자기들의 눈을 담아버렸으니," 그때 그들의 평화에 속하는 일이 그들에 논에 숨겨졌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Ⅶ. 그들의 말을 믿고, 그것을 이용하고 그들의 인상을 받아들인 자들도 있다.
1. 동정녀 마리아는 그들의 말을 자기의 "개인적인 명상"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생각했다"(19절). 그녀는 증거를 종합하고 소중히 생가하며, 그녀에게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사실들과 비교하려 했다. 그녀의 자기의 정절이 의심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정절을 밝혀 주기를 바라고 침묵하고 기다렸듯이, 이제는 자기의 영예로 드러났지만, 역시 하나님께서 영예를 공표하기를 맡기고 침묵을 지켰다. 자기가 해산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천사들만 알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도 충분한 만족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들은 간직할 값어치가 있고, 그것을 안전히 지키는 길은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명상이란 기억을 돕는 최선의 도움이 된다.
2. 목자들은 그 사실들을 자기들의 보다 더 "공개적인 찬양"의 제목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일에 감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달랐다.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20절). 그들이 알려 준 보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돌린 감사를 기쁘게 받으셨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천사에게 "들은 것"으로 인하여, 또 "구유에 있는" 아기를 "그들이 본"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막 들었을 때 듣던 바대로 그 아기가 "강보에 싸여" 있음을 본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 비록 그는 극단의 겸비의 상태에 있었지만 ─를 본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그의 "구유"가 어떤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요 "걸림돌"이나, 또 어떤 자들에게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감탄과 찬송을 보낸다.
[헬라어원어성경 요한복음 4장] 신하의 아들 치유 이적(요 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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