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장에서는 번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양과 염소와 새의 번제에 대해서 말씀한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에서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사다. 번제는 제물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이 향기를 맡은 향기로운 제사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의 제물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제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 제사를 드리게 했다. 성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번제에 나타난 예수님을 발견하자.
번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사(레 1:10-17)
[10]-[13] 양의 번제
(10)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제주의 사는 생활 형편에 따라 소를 드리든지 양이나 염소를 드린다. 그러기에 꼭 같은 규례에 의한다. 무흠 한 수컷으로 드림도 같고, 그 피를 뿌림, 그 제물을 처리함이 다 같다.
(11)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의 북편이란 말이 쓰여 있다. 단 동편은 재버리는 곳이요(1:16), 서편은 물통을 두는 곳이요(출 40:7,30, 27:9-19), 남편은 제단에 올라가는 언덕이다(출 27:9-19), 남은 곳은 북편만이 남아 있다.
(12) “각을 뜨고” 소의 번제와 같거니와 “기름을 베어낼 것이요” 소의 번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각을 뜰 때에 기름을 따로 베어낸다. 각들과 같이 기름이 따로 한 부분이 됨을 뜻한다. 그 희생의 지체 중에 제일 열량(칼로리)이 높은 것이 기름이다. 그 무흠 한 제물은 건강하고 살도 찐 짐승이니 기름도 상당히 있는 것이다. 이 기름을 다른 지체같이 한 부분으로 베어낸다. 기름은 비상한 때를 대비해서 저축했던 영양품이다. 다른 영양품이 결여되어도 기름이 많이 저장되었을 때 보충할 수 있는 것이 기름이다. 내 생활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 시간적으로도 정신 드는 아침 시간, 연령적으로도 젊은 시절, 물질적으로도 제일 상품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 기름에 해당한다.
또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좀 여유 있는 생애를 가지면서 교회생활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기름기 있게 예배를 드린다. 시간을 지킨다. 여유 있게 겨우 명맥이나 보존하지 말고 남는 것이 있게 저축이 되리 만큼 신앙생활을 하여야 기름을 베어낼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출석에 있어 예를 든다면 겨우 남에게 끌려서 다니는 그에게 베어낼 기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겨우 식탁에 앉아서 눈이나 감았다 뜨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식의 기도 생활엔 기름을 베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남의 체면에 의하여 마지못해서 헌금을 드리는 그런 봉헌 생활 속에서 무슨 기름을 베어내지는 못한다. 성경 목록을 보고 그 페이지를 찾는 그런 성경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서 베어낼 기름이 생기지 않는다. 그 외의 예들도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유가 있을 때 기름이 생겨진다. 베어낼 기름이 있어야 번제물 될 자격이랄 수 있는 것이다.
(12) “제사장은 그것을 다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소의 번제에서도 언급한 바이다.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제사장의 하는 일은 그것을 다 그 전부를 다 번제단에 불사른다. 하나도 뺄 수는 없다. 전부를 그것을 다 번제로 사른다. 내 생활, 내 소유, 내 생각, 내 정성……전부를 그것을 다 하나님께 드린다. 이것이 번제다. 교회에서 때로 헌신 예배를 드린다. 이것이다. 어느 것이 내 것이랄 수가 없다. 다 하나님의 것이다. 내 생명을 속해 주셨으니 다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바치는데 무슨 의의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생활이 헌신 생활인 것이다. 이 다짐을 늘 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살고 있음은 배반이요 반역이랄 수가 있는 것이다.
(13) 이렇게 번제를 드리는 것은 “물로 씻을 것”이다. 깨끗이 해서 드린다. 부정하게 드리지는 못한다. 어차피 불에 태울 것이로되 깨끗이 씻은 후에서야 번제단에 사르는 것이다. 내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거니와 내 각각의 지체들이 그 피에 작용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출애굽기 제25장에 보인 대로 오른 귓부리, 오른 엄지손, 오른 엄지발에 피를 작용케 한다. 때로 어린양 예수의 피가 내 지체에 작용해야 한다. 보지 않을 것을 본 일이 있으면 피가 눈에 작용해야 한다. 각 지체가 다 피의 작용으로라야 깨끗함을 입는다. 이렇게 된 지체들을 또 다 모아서 번제단에 드린다. 이것이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14]-[17] 새의 번제
(14) 생활의 여유가 없는 분으로 양이나 소를 드리지 못할 분을 위해서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로서 번제를 드릴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 앞에 마음이 첫째이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 문제는 아니다. 과부의 엽전 두 푼을 크게 보신 것도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새는 안수하지는 않았다. 이는 기르든지 산새든지 품에 품고 온 것이니 벌써 안수한 것 같이 생각되어 이런 지시가 없었는지 모른다. 비둘기는 순한 새로 집에 기르기를 사람들이 즐긴다. 유대 나라엔 산비둘기가 철새로 무리를 지어 날아오는 모양이다(아 2:11-12, 렘 8:7).
비둘기는 쉽게 얻을 수 있다.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정성스럽게 기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기 위해 비둘기를 기른다. 이러한 심정을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실 것이다. 이런 정성이 차차 흐려져서 형식에만 얽매여 주님 당시엔 성전에서 비둘기 장사까지 들어오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요 2:14, 마 21:12) 우리 신앙이 이렇듯 형식화해 버리면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신다. 외면하신다.
내가 드리는 예배는 그렇지 않은가, 몇 푼 주고 사서 새를 드리려는 심정은 아닌가,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갈 6:7).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 앞에 어찌 정성 없이 아무렇게나 몇 푼 주고 사서 드리려는 식일 수는 없는 것이다. (15)-(16) 이 비둘기를 머리를 비틀어 잡는다. 피를 그릇에 담을 것이 없는 고로 단 곁에 흐르게 한다. 그리고 그 먹통과 더러운 것은 제단 동편 재버리는 곳에 버리고, 새는 양 날개를 잡아 찢되 다 찢지는 말고 제사장이 불사를 작은 새니 마치 각을 뜬다든가 큰 짐승 같이는 아니하나 그 뜻은 다 거기 내포되어 있다. 적은 피로 흘려졌고 몸을 쪼갰으니 각을 뜬 것과 같고, 더러운 것은 제했으니 정결케 하기도 한 것이다. 번제물은 다 같은 수속을 하게 된다.
(17)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소의 번제에서나 양의 번제에서나 새의 번제에서나 꼭 마찬가지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규례대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속죄제는 사람들이 죄를 대속하는 제사려니와 번제는 사람들의 부족함을 예수께서 대신해 주시는 예표로서의 제사인 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 본분이 사람에게는 있는 것이다. 죄를 범치 않는 데만 그칠 것은 아니다. 본분을 힘 있게 감당하여야 한다. 아들 된 자 불량자 안 되어 만족한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야 한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무슨 범죄 했다는 말이 없다. 그릇에 기름이 떨어졌을 뿐인데 버림을 받았다.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게으른 종도 주인에게 본전의 손해는 안 끼쳤으되 버림을 받았다. 우리들이 주를 섬김에 늘 부족함이 있다. 신앙생활에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아직도 우리의 부족함을 늘 채워 주신다. 이 사실을 우리는 번제를 통하여 받는다. 하나님께 이 부족한 것을 표한다. 주님께서 그 부족한 것을 다 채워주신다. 여기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누가복음 10분 설교문] 가장 작은 자(눅 9:46-48,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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