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고난을 받으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와서 너는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며 죄를 짓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합니다. 의롭게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 범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욥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결백 주장(욥 6:1-7)
1절 바야안 이요브 아요마르
성 경: [욥6: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본문에서부터 7장까지는 엘리바스의 변론(4,5장)에 대한 욥의 첫번째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2절 루 샤콜 이샤켈 카이시 바하야티 비하바티 비모지나임 이사우 야하드
성 경: [욥6: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5:2에서 엘리바스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인다'고 함으로써 욥을 은근히 질책한 바 있는데, 본문은 그것에 대한 욥의 반박이다. 즉 고통에 처한 자가 그 고통을 토로한다고 무조건 질책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참작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욥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인과응보적인 변론만을 전개한 엘리바스의 태도에 대한 욥의 반박이라 하겠다. 나아가 이 말속에는 욥의 자기변호의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즉, 그가 당하는 고통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며, 다라서 죽음을 갈망하는 자신의 행위와 말(3장)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3절 키 아타 메홀 야밈 이키바드 알 켄 디바라이 라우
성 경: [욥6:3]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 `바다 모래'는 성경에서 대부분 셀 수 없는 많은 수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2:1; 32:12; 41:49; 수 11:4; 삿 7:12; 삼상 13:5). 그런데 여기서는 잠 27:3과 마찬가지로 `무거움'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H-artley). 고대 히브리인들은 `돌'(잠 27:3)과 마찬가지로 허다한 모래 또한 무거움의 대명사 격으로 표현하였다.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죄의 시인: 욥은 3장에서 자신의 잉태와 탄생을 저주(3:1, 3-11)하며 죽음을 갈망하였다. 따라서 본절에서 욥은 그것이 비신앙적 행위였음을 시인하고 그 죄를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별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본장에서도 욥은 3장에서와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갈구하고 있다(9-11절). 만일 욥이 3장에서 나타난 자신의 행위를 부당한 것으로 여기고 회개했다면 여기서 동일한 행위를 반복할 이유가 전혀 없다. (2) 자기변호:욥의 고난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2절). 그것은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우며(본절 상반절), 따라서 그의 현재의 말과 행동이 정당하다는 뜻이다. 즉, 3장에 나타난 그의 말이 그의 고난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하다는 의미이다. 도리어 그를 은연중 `미련한 자'(5:2)로 매도하려 한 엘리바스가 경솔한 자였다고 본다. 이 해석은 전후 구절들을 참고해 볼 때 타당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2절에서 자기 고통의 심각성을 토로한 욥이 4-6절에서는 그 고통으로 인한 자신의 토로가 정당한 행위임을 거듭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4절 키 히체 샤다이 임마디 아셰르 하마탐 쇼타 루히 비우테 엘로아흐
성 경: [욥6:4]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 여기서는 하나님의 징계, 보다 직접적으로는 욥에게 주어진 일련의 재앙을 가리킨다(1:13-19; 2:7,8). 이처럼 하나님을 `용사'(勇士) 또는 `궁수'(弓手)로, 그의 진노(징계)를 그분이 쏘는 화살로 각각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하게 발견된다(신 32:23, 42; 시 7:13; 21:12; 45:5; 애 3:13, 14 등). 여기에서 보듯 일단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왜'(why) 그것을 주셨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한 고로 그의 갈등은 지속된다.(7:20; 16:12, 13 등).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 이 말은 `그 독이 내 영혼을 삼켰다'(KJV, thepoi-son whereof drinketh up my spirit)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된다. 여기서 `그 독'이라 함은 앞절에 나온 `화살의 독'(NIV, RSV, their poison)을 가리킨다(pope, Dahood). 고대인들은 사냥을 할 때 화살의 끝에 독을 묻혀 쏘곤 했는데, 욥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독화살을 맞은 짐승이 그 독성이 온몸에 퍼짐으로 인해 차츰 죽어가듯, 하나님의 진노(화살)를 받은 자신이 점점 더 깊은 절망과 회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본절 상 반절에서는 `화살'이 `몸'에 박혔다고 했으나 하반절에서는 그 `화살의 독'이 `그의 영'을 삼킨다고 표현함으로써 `신체'에서 `영혼'으로까지 이행(移行)되어 가는 그의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 욥이 당하는 고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구절이다. 욥은 자기에게 연속적으로 주어진 일련의 재앙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4a절). 그런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재앙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대상(형벌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재산, 자손, 건강을 상실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참을 수 없는 형벌이었다. 점점 가중되는 하나님의 재앙 속에서 그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전조(前兆)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5절 하이니하크 페레 알레 데셰 임 이기에 쇼르 알 빌릴로
성 경: [욥6: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본절에서 욥은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일상적 소재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수사 의문문'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귀'(KJV, RSV, wild ass)와 소는 먹을 풀이 풍족히 있으면 결코 울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욥 자신도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결코 비탄과 불평(3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욥이 불평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자기변호의 말인 것이다. 특히 `나귀'와 `소'의 울음에 자신의 비탄(불평)을 비유한 것은 마치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들이 우는 것이 자연적이며 본능적이듯, 그의 현재의 불평도 그와 같은 성질의 것임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말속에는 욥의 불평을 미련한 것이요 시기하는 것(5:2)이라고 은근히 꼬집은 엘리바스에 대한 책망도 숨어 있다.
6절 하예아켈 타펠 미빌리 멜라흐 임 예쉬 타암 비리르 하라무트
성 경: [욥6: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1) 엘리바스에 책망 : 엘리바스의 변론(4, 5장)은 욥의 고난의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욥이 `왜' 고난 받는가 하는 질문에도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도리어 엘리바스는 자기 변증적인 일반론으로 변론을 일관함으로써 욥의 심중에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의 변론은 마치 소금을 치지 않아 간이 맞지 않은 음식, 그래서 사람의 입맛에 구역질을 일으키게 하는 음식처럼 욥에게 무미건조하고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달걀의 흰자위처럼 핵심에서 이탈해 있었다(Anderson, Habel).(2) 욥의 자기변호: 일반적으로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것을 먹는 것은 고역스런 일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달걀의 흰자위를 그 노른자 위에 비해 맛없는(영양가 없는)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싱거운 음식, 달걀의 흰자위)을 싫어한다. 욥에게 있어서 그의 고난이 바로 이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즉, 그것은 지극히 싫어하는 음식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어야만 하는, 즉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인내해야만 하는 데에 그의 고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겠으나 전자의 해석이 좀 더 타당하므로 여기서는 그것을 취하기로 한다.
닭의 알 흰자위 - 이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한데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멀건 흰 죽(공동 번역) : 일반적으로 죽에는 소금을 넣지 않아 그 맛이 없다. 마찬가지로 엘리바스의 변론도 그것처럼 아무런 맛과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이 해석은 `닭의 알 흰자위'를 앞절에 나온 `싱거운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2) 쇠비름의 즙액(Anderson, Harthey, Keil and Delitzsch) : 쇠비름(purslane)은 팔레스틴의 길가나 밭 같은 데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1년생 풀로서 그 즙액에서 아무 맛도 없다. 엘리바스의 변론도 이와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따라서 이 해석 역시 (1)과 마찬가지로 상반 절의 내용을 반복,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셈이다. (3) 꿈결에 흘린 침(Tur Sinai) : 이는 `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무드를 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헬렘'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아, `꿈'으로 번역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달걀의 `흰자위'를 `침'으로 보는 이유는 삶지 않은 달걀의 흰자위가 끈적끈적한 것처럼 잠결에 흘린 침 역시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해석법을 따를 경우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한 욥의 반응은 더욱 신랄한 것으로 된다. 즉, 꿈결에 흘리는 침이 그 끈적거림과 악취로 인해 구역질 나게 하듯, 엘리바스의 변론 역시 욥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4) 닭 알의 흰자위(개역 성경 탈굼역). 이중 어떤 해석법을 취하든 본문이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질책, 또는 욥의 현재 고난에 대한 자기변호를 담고 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7절 메아나 리니고아 나피쉬 헴마 키디베 라히미
성 경: [욥6: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욥은 엘리바스의 변론을 먹기 싫어하는 음식에 비유한 데 이어(6절), 여기서는 그것을 만지기 조차 싫어하는 음식에 비유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 이는 욥이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못된 식물 - `나를 아프게 하는 음식'(NIV, food makes me ill), `나를 짜증 나게 하는 음식'(RSV, food that is loathsome to me)' `몸이 아플 때에나 먹는 것'(공동번역), `나의 슬픈 음식'(KJV, my sorrowful meat)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들이 가능한 것은 개역 성경에서 `못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데와이'(*)가`(병이 들어) 쇠약해지는', `혐오하는', `슬퍼하는'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8장 설교말씀] 성전 봉헌과 솔로몬의 기도(왕상 8:1-66)
'기혼샘 원문 성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2편 히브리어 강해설교말씀] 하나님이 세우신 왕 예수님(시 2:1-12) (0) | 2021.12.08 |
---|---|
[요한복음 헬라어 성경 예수님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5) (0) | 2021.12.05 |
[고린도전서 1장 헬라어 원문강해] 고린도 교회 분쟁에 대한 바울의 책망(고전 1:10-17) (0) | 2021.12.01 |
[마태복음 헬라어 성경강해] 헤롯의 유아 학살과 나사렛 귀향(마 2:16-23) (0) | 2021.11.25 |
[여호수아 히브리어 성경말씀] 아이성 군대를 유인하는 여호수아(수 8:10-17) (0) | 2021.11.12 |
[출애굽기 4장 히브리어 원어 강해] 모세와 아론이 호렙산에서 만남(출 4:27-31) (0) | 2021.11.12 |
[누가복음 헬라어 성경 강해]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남(눅 1:32-38) (0) | 2021.11.06 |
[신명기 히브리어 원어 강해] 가데스에서 정탐꾼 파견 회상(신 1:19-25) (0) | 2021.11.05 |